詩 2017 180

악마의 탈을 쓴 인간/배 중진

악마의 탈을 쓴 인간/배 중진 사랑하는 사이인지 뜻을 같이하는 사이인지 모르는 남녀가 만나 가정을 꾸미듯 새들도 보금자리를 만들어 정성을 다해 키워나가는 재미가 있지 싶은데 언제부터인지 새끼들의 숫자가 줄어든다 한 마리가 무섭게 핏덩이를 쪼아먹고 있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짐승 같은 남편이 아들딸을 건드리기 시작하는 것을 어미가 보았고 그 순간부터 필사적으로 자식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지만 인간이길 거부하는 남편은 교묘하게 부인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곤 너의 엄마는 간통한 남자와 몰래 도망쳤다고 속인다 사랑하는 너희들을 내팽개치고 그러나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기억을 더듬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는 것을 보았고 깜깜한 밤중에 묻는 것까지도 가정 내에서 이뤄지는 살인극..

詩 2017 2017.10.14

어머니를 그리워하며/배 중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배 중진 붉은 해가 떠오르는지 서쪽에 있는 높은 건물의 유리가 온통 빨갛다 재빠르게 동쪽의 창문을 여니 천지사방이 화려하고 마음까지도 타오른다 어머니 기일이건만 가서 뵙지도 못하고 이역만리 서쪽 하늘만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지 않았던가 슬픔은 막 차오르고 마지막 뵌 모습이 어른거리며 그 밝던 아침 하늘이 점점 어두워진다 형제에게 미안하고 홀로 계신 아버님께 죄스러워 불효도 이런 불효 없으리 아침에 밝은 해가 뜨나 싶었는데 이내 구름이 덮여 끄물거리는 날씨랍니다. 어제는 찌고 덥기까지 했는데 오늘은 평상시의 온도를 유지한다고 하는 예보를 듣긴 했답니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화려한 모습을 보고 싶고 더 늦기 전에 많은 것을 배워 막 치달리는 세상에도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현명한 판단을 하..

詩 2017 2017.10.11

친구 생각/배 중진

친구 생각/배 중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우산을 쓰니 잊었던 옛날이 떠올라 피식 웃지 않을 수가 없었고 어제와 같이 생생하나 세월은 무척이나 도 흘렀고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에 있어 감회 또한 깊었다 닭에게 준다고 메뚜기를 잡으러 나섰는데 맑은 하늘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하니 누나가 집으로 얼른 가라며 등을 떠민다 친구 누나와 산 쪽으로 있는 논배미로 걸어 들어가면서 망설이는 동생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길래 먹구름이 무서워 친구와 마을 쪽으로 뛰기 시작했고 가지고 있는 것은 우산 하나였다 중간에 천둥소리 요란한 후 소나기 퍼붓기 시작하였어도 나 살리라 하고 들고 뛰었고 따라오는 불알친구가 투덜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칭얼대며 울기 시작하였다 그랬어도 멈추지 않았다 기다렸다가 다정하게 ..

詩 2017 2017.10.10

경천동지/배 중진

경천동지/배 중진 경기를 일으키듯 울부짖는 까마귀들이 새벽을 깨워 짜증이 났지만 최근에 세 개의 굵은 가지가 밑동부터 싹둑 잘려 신음하는 나무에 비하면 조족지혈인지라 살그머니 소리 나는 곳으로 다가가 창문을 통해서 내려다보니 백여 마리가 남아 있는 나뭇가지에 둘러앉아 앞으로 일어날 문제에 대해서 사심 없이 심각하게 격론을 벌이고 있더군요 사태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쉽게 결론이 나지 않으리라 여기면서도 묵묵히 기다려 주었지요 아침이 되자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는지 점점 소리는 작아지고 하나둘씩 떠나가기 시작하더군요 가을이지만 약간 찌는듯한 느낌이고 붉은 서러움이 하늘까지 도달했는지 장대비가 줄기차게 퍼붓더군요 왜 아니겠는지요/ 잘린 나무의 소원/배 중진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까마귀가 돌아왔습니다 아..

詩 2017 2017.10.08

힘차게 달려라, 샌디/배 중진

힘차게 달려라, 샌디/배 중진 금발의 작은 샌디가 황혼의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성당 쪽으로 날아가듯 뛰어가고 있었다 뒤에서는 같이 가자고 아우성이고 함께 가자고 멈추라 하여도 작은 것이 더 큰 아이들보다 빠르고도 당차게 앞만 보고 달린다 그러던 Sandy가 팔순을 앞두고 폐암으로 신음하고 있다 친구들이 해로운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도 길고 가냘픈 손가락 끝 빨갛게 물들인 손톱 사이에 멋지게 담배를 잡고 맛있게 들이마시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으며 지그시 감은 눈과 세상을 잊은듯한 모습으로 내뿜는 하얀 연기가 매우 보기 좋았는데 60년 이상 피운 담배를 마지못해 며칠 전에 끊고는 화학요법을 받기 시작했어도 우려했던 것보다 긍정적이었고 너무 늦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언..

詩 2017 2017.10.07

잘린 나무의 소원/배 중진

잘린 나무의 소원/배 중진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까마귀가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아파하는 나무를 모른척하지 않고 슬픔을 같이 하려고 왔겠지요 나뭇가지가 싹둑 잘려나간 그 아픔 감수하고 꼿꼿하게 서 있는 나무가 가엾기도 하지만 기특하기도 하고 미더웠던 모양이지요 남모르게 한동안 같이 울어주곤 쉼터를 마련해준 것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으며 깃털을 한올 한올 가다듬으며 그동안 잊었던 이야기를 끝도 없이 전해주고 내일 또 찾아오마 약속하곤 떠났지요 고목은 말도 못 할 정도로 아팠지만 휑한 모습으로 기를 펴려는 인내를 보여주기도 했고 가증스러운 인간을 탓하기 전에 미증유의 대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천천히 밤길 가는 대보름 달을 보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고 빌었지요 완재2017...

詩 2017 2017.10.06

한가위 보름달/배 중진

한가위 보름달/배 중진 추석이 내일이라고 하는데 어째 보름달이 저렇게 찌그러졌을까 정말 내일이 한가위가 맞아? 외국에 살다 보니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뚜렷하게 다를 것이 없으며 그저 바쁘게 쫓아다니기만 했기에 둥근달이 뜨면 뜨는가 보다 중추절이라고 하니 시원해서 좋다는 것뿐인데 달마저 아직 채 완전히 차오르지 않은 것이 내 맘처럼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가 보다 고국 고향 부모·형제 친구를 떠올리면 그리움으로 이지러져 더욱 슬퍼지게 하는 날 언제나 부족한 이 마음 영원히 만족할 수 없으리 2017.10.04 21:27 망월 보름달 찌그러진 달 이지러진 달 쟁반같이 둥근달 한가위 달 한가위 밝은 달 한가위 보름달 아직 채 차오르지 않은 달 둥근달 매끄럽게 차오른 둥근달 채 완전히 차오르지 못한 ..

詩 2017 2017.10.04

싹둑 잘랐어야만 했던가/배 중진

싹둑 잘랐어야만 했던가/배 중진 원래 이곳은 식물원이었다 한다 인간이 비집고 들어 오기 전에는 그래서인지 아름드리 거목들이 즐비하고 많다 보니 일부러 개수를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요소요소에 잘 자라나 그늘을 넓게 만들어 주고 급히 지나가는 바람을 잠깐 불러 세우기도 하며 집 없는 새들과 곤충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기도 하여 거룩하고 인자함의 산 증거다 그런데 늦게 들어온 인간이 시건방지게 주인장 행세를 하며 툭하면 가지치기하여 아픔을 주고 서슬 시퍼런 친구들을 하루아침에 고꾸라지게도 하더니 언제부터인가 보기 싫다고 나가라고 한다 잘못 들었나 싶어 못 들은 거로 했더니 어느 날 트럭을 몰고 온 무지막지한 인간들이 앞뒤를 가로막더니 소음이 굉장한 기계를 들이대어 순식간에 밑동만 남기고 싹둑 잘랐다 몇백 년을 평화..

詩 2017 2017.10.04

우수수 떨어지는 것들/배 중진

우수수 떨어지는 것들/배 중진 세면장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는 대로 줍는데도 알게 모르게 휘날리는가 보다 남이 보기에는 제 갈무리 못 한다고 하겠지만 가을이 되니 더 빠지는가 보다 옆에서 자꾸 지청구하길래 대머리인 양반에게 그곳의 머리카락은 무슨 사연으로 사라졌는가 되받아치니 할 말이 없는지 슬그머니 사라진다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케네디 대통령이 가을에 풀썩 쓰러졌고 영원할 것 같은 박정희 대통령도 믿는 부하한테 좋은 시절에 꼬꾸라졌지 않았던가 밖으로 나가면 밟히는 것이 낙엽인데 그들은 보기 싫다고 하는데도 일부러 떨어졌겠나 머리카락이 부족하여 열등감 차원에서 말이 많은 것인지는 몰라도 조각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없이 사고하며 화려한 가을을 즐길 수는 없는지 떨어지는 것이 어디 머리카..

詩 2017 2017.10.03

기도/배 중진

기도/배 중진 평일엔 혼자 가는 성당이지만 같이 성당에 가는 주일 아침엔 항상 이만저만해서 늦었기에 서둘러 차를 빼 집 앞에 대고 같이 갈 사람을 기다리는데 오른쪽 창문에 난데없이 벌이 나타나 오도 가지도 못하고 붙어있어 사람이 곧 나타날 테니 물러가라고 손가락을 대보고 유리창을 올렸다 내렸다 장난쳐도 꼼짝하지 않는다 날씨가 추운 관계로 운신도 못 하는 것이 투명한 유리창에 붙어 그나마 있는 온기를 느끼는 것인지 기도하는 것인지 그래도 그렇지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놀랄 것 같아 안달을 하여도 막무가내이기에 차에서 내려 좀 떨어진 곳에서 입김을 불어 보아도 냄새가 날 테지만 괘념치 않고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다 몸달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잡히는 것으로 떼어 내려고 해도 아무것도 없어 성금 하려고 했던 지..

詩 2017 2017.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