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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배 중진

국화/배 중진 남들보다 일찍 시작하는 새봄 연로하신 할아버지 젊음을 가꾸신다 작은 터에 몇 가지 꽃을 일찍 심어 냉혹한 겨울엔 아무도 모른다 이른 봄 회심의 미소를 지으시며 물끄러미 담배를 꼬나물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준다 걷지도 않으시고 문밖에 쭈그리고 앉은 모습이 항상 떠오른다 낙엽이 흩어지며 그동안 자란 국화가 화려한 꽃을 피웠다 꽃 위로 떨어진 갈잎이 무성하지만 방긋 웃는 모습이다 어둠이 내리깔리고 새들도 사라진 저녁 발소리 죽여가며 산책하다가 몇 송이 국화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취하지만 어르신은 보이지 않는다 담배 냄새도 늦은 가을 하늘 사라졌다

詩 2022 2022.11.07

Robin/배 중진

Robin/배 중진 떠난 지가 오래되었다고 체념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춥다는 핑계로 날아갔다 남이 가니 어쩔 수 없이 간다고 에둘러댔다 그러던 네가 발각되었다 갔던 것이 온 것인지 가지 않고 숨어 있다가 들킨 것인지 여러 변명을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제 딴에도 반가움을 표시하느라 꼬리를 들썩들썩거리고 머리를 번쩍번쩍 치뜨고 부리를 쩍쩍 벌려 지저귄다 사랑에 실패하여 떠나가지 못했는지 날개가 부러져 남았는지 먼 곳 찾아가다가 중간에 낙오되었는지 우리네 만큼 사정은 많겠지만 긴 겨울 극복하고 살아남았으니 다행이고 동장군이 채 물러가지도 않았는데 입성하여 가상하고 고향을 잊지 않고 찾아와 감사하니 내 너를 어쩐다? 2022.02.20 08:34 로빈 아메리칸 로빈 American r..

詩 2022 2022.02.20

낙엽 밟는 소리/배 중진

낙엽 밟는 소리/배 중진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는 소리 혼자만이 듣기 아까워 뒤에 처진 친구에게 기다렸다가 물어봤다 낙엽 밟는 소리가 좋은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숨을 할딱이면서도 냄새 구수하고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단다 우리는 또 말없이 걷다가 은행알이 떨어진 곳에 다다라 깨진 달걀처럼 터져버린 은행을 가리키며 친구에게 건드리지 말라고 눈빛으로 말했다 일전에 발로 툭 차는 것을 보고는 경악했기에 삶이 오래전에 시작한 은행을 짧은 역사를 지닌 미국인들은 성격을 파악하지 못해 냄새가 고약하게 나는지 만지면 가려운지 알 턱이 없어 그런 무모한 짓을 했으리라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단풍도 즐기고 벽난로에 나무를 태우는 냄새도 맡으며 운동 삼아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고 있는데 거대한 나무뿌리에 포장된 길..

詩 2020 2020.11.03

무너진 금자탑/배 중진

무너진 금자탑/배 중진 모래알같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만난 우리 그중에서도 밤낮으로 함께 있고 싶은 친구 한순간이 아닌 영원을 꿈꾸는 연인 그 사랑도 같은 마음으로 기쁨을 똑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 둘 사이에 바람이 끼는 것을 꺼렸는데 햇빛조차 어루만지는 것을 싫어했는데 어쩌다 따로따로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무심한 세월이여 무정한 사람이여 무상한 인생이여 무너진 사랑의 금자탑이여 11/08/2015 New York Botanical Garden

詩 2020 2020.11.02

아무렇지도 않은 세월/배 중진

아무렇지도 않은 세월/배 중진 세월은 거칠게 흐르는 강물 같고 나란 존재는 작은 물고기에 지나지 않아 휩쓸려도 그만이고 거슬러 보아도 흔적도 남지 않아 도도한 물결은 거칠 것이 없어 잠깐 사이에 저만큼 떠밀려 왔음을 알았고 내팽개쳐진 느낌이라 허무하고 슬픈 거야 그렇게나 말거나 이렇게나 저렇게나 강물은 개의치 않고 모든 것을 삼켜 김영래2019.02.17 19:09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도 어둑하게 저물어갑니다 즐거운 저녁되시고 기쁨이 함께하세요 잘 보고 감사하는 마음전합니다~~ 높은 산과 깊은 강이 있고 논보다는 밭이 더 많은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눈이 덮인 밭은 제 고향의 어디메쯤 되어 보여 친근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고향을 지키는 개들이 난리 칠만한 상황입니다. 신고도 하지 않고 들어와 냄새를 풍..

詩 2019 2019.02.15

연리지/배 중진

연리지/배 중진 빠르게 달리는 차들이 인터체인지에서 거의 같은 속도로 동서남북으로 흩어지고 만난다 간판만 보고 성급하게 치달리느라 옆에 무엇이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데 오늘은 앞이 꽉 막혀 옴짝달싹도 못 하니 짜증이 날 수밖에 조금만 가면 출구라서 더욱 몸이 쑤신다 경찰차들이 수십 대 번쩍거리는 것을 보니 대형사고임이 틀림없다 남의 생명이 귀중하니 촌각을 다툴 일은 절대 아니다 옆에 있는 작은 공간에 가로수들이 멋대로 심겨 있음이 보였고 그중에 두 나무가 뿌리는 각각인데 자라면서 붙었다가 또 제 갈 길로 뻗어 나갔다 이곳은 만나고 헤어짐이 아무렇지도 않은 곳이요 누구도 눈여겨보는 곳이 아닌데 느림이 있어 그제야 보였다 오늘 너와 나의 인연이었다 따로따로인데 얼음 밑의 금붕어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따라오..

詩 2019 2019.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