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2023 16

악마/배 중진

악마/배 중진 죽음의 사자가 찾아오는데 눈치채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봄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 온갖 꽃을 피우듯 아주 자연스럽게 작은 승용차가 너무나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교회로 들어섰다 여자처럼 보이지만 과감했고 남자처럼 행동했지만 어설펐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배우는 교정 교회에 소속한 학교 순식간에 9살짜리 3명은 하늘나라로 올라갔고 60대 3명도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으며 유언대로 악마도 사살되어 지옥으로 처박혔고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어른은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지 못했고 감시 카메라도 사건 해결의 빌미를 제공하지만 목숨을 구하지 못했고 단단하게 생각했던 굳게 잠긴 문도 악인을 막지 못했으며 평화를 지키라고 설계된 자동소총은 비웃기라도 한 듯 깨트렸다 악마는 천사를 극도로 싫어하는가 보다 꽃같이..

詩 2023 2023.03.29

욕심꾸러기/배 중진

욕심꾸러기/배 중진 언제나 장난꾸러기였다 가끔은 애교꾸러기이기도 하지만 내숭꾸러기 능청꾸러기 토깽이였다 점점 자라면서 변덕꾸러기로 변해 천덕꾸러기가 되어 걱정을 끼치고 엄살꾸러기 응석꾸러기로 일관한다 어느 날부터 의심꾸러기로 변해 소심꾸러기 걱정꾸러기로 남들과 달리 맑은 날을 우려도 하고 말썽꾸러기가 되어 다른 토끼들과 매일 다툼이 잦았다 심술꾸러기는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되었고 늦잠꾸러기로 빈둥댄다 싶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점점 뚱뚱해져 늘 빠져 다니던 울타리를 악착꾸러기는 통과하지 못하고 익살꾸러기처럼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 친다 4/22/2019 마곡사

詩 2023 2023.03.20

밤새 안녕/배 중진

밤새 안녕/배 중진 잘 자고 일어나 뉴스를 확인하니 남미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근처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났다고 한다 운전면허도 없는 16살짜리가 운전했고 빗길에 그것도 빌린 차로 이동하다가 새벽 2시 30분에 졸다가 튕겨 나가 8-17살 사이의 6명 중에 9살짜리만 살아남았다 그 아이들의 사랑하는 부모는 어디에 있었고 무슨 사연으로 Parkway를 고속으로 달리다가 미끄러지면서 나무를 들이받고 불길에 휩싸였단 말인가 우리같이 경험이 많은 사람도 피치 못할 사정이라면 밤에 미끄러운 도로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조심하며 가는데 이제 갓 운전면허증을 딸 수 있는 청소년에게 장난감이 아닌 살인 무기를 감독도 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자기들끼리 떠들며 무섭게 칠흑 같은 길을 질주하다 아차 하는 순간에 잘못 틀었지 싶다 실..

詩 2023 2023.03.20

길고양이/배 중진

길고양이/배 중진 모든 것을 사랑하는 여인 특히 동물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인간 관찰력이 뛰어나고 관심이 많은 여자 쓰레기통에 버려진 거북이를 주워다 기르는 사람 만리장성을 쌓는 이웃이 많아지자 이사를 결심했기에 가족으로 모시는 거북이와 고양이를 건사하면서도 그들이 자연사하면 더는 맞아들이지 않기로 했지만 떠돌이 고양이가 눈에 띄었고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 유인하여 동물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받게 한 다음 전처럼 집 주위에 방사했는데 9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는 사랑이 그리웠는지 떠나질 않네 마침 집에서 기르던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세상을 떠난 직후라 두 마리만 키우면서 더는 하고 못 본 체했지만 초인종을 누르고 도움을 청하는 듯하여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세상을 하직한 고양이가 분신이 되어 돌아왔다 고양이들 ..

詩 2023 2023.02.27

노망/배 중진

노망/배 중진 한때는 촉망받던 정치인이었다 존망도 받으면서 승승장구하더니 열망만 앞세워 결국은 민망한 자리까지 올랐다 허망하게도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았고 날로 건망 증세는 심해져 건드리는 족족 폭망의 길로 들어선다 쇠망이 따로 없고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소망을 품고 같은 길을 모색하던 나라들이 도망치듯 버려두고 자기 살길을 찾아 나선다 선망의 대상이 더는 아니었고 갈망하던 대국도 아니었다 앙망받던 정치인이라면 내려올 시기를 선택하여야 한다 멸망의 길로 치달리기 전에 자신을 알아야 하고 애국충정으로 흥망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나만을 아는 사람이 아닌 충실하고도 야망이 있는 정객을 뽑아야 한다 4/24/2019 동학사

詩 2023 2023.02.17

추상/배 중진

추상/배 중진 하늘은 맑고 기온도 높고 바람도 불지 않는 아침 창밖은 평화롭기만 하다 빨래방 뒤편 주차된 차에서 젊은 아낙네가 주섬주섬 옷을 꺼내고 있고 저렇게 많은 양의 옷가지를 본 적이 없는데 독한 마음을 먹고 작정했지 싶다 건사하는 가족이 많아 아무렇게나 벗어던져 놓은 더러운 옷들 감당하기 벅찰 테고 연약한 몸으로 혼자서 저 많은 것을 어찌 처리하는지 기다렸는데 마지막은 너무 무거워 두 손에 큰 자루 하나씩 질질 끌고 들어갔다 그다음은 모르지만 세탁기 없는 집에 세 들어 사는가 보다 옛날 대가족이었던 우리 집에서 어머니의 겨울철 삶을 회상해 본다

詩 2023 2023.02.17

생각나는 사람/배 중진

생각나는 사람/배 중진 초등학교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있다 강바람이 옆에서 불어오기에 신작로 밑의 마른 논바닥으로 다들 내려갔는데 혹한도 두렵지 않은지 꿋꿋하게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건만 어디서 저런 강한 의지가 생겼는지 믿을 수가 없어 다시 뒷모습을 살폈지만 온갖 압력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 그 자체였다 반장이 되어 학급을 이끌어 나가는데 약한 아이에게 칼을 꺼내 위협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것을 목격하고 과감하게 앞장서서 만류시킨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세월이 흘러 남들이 흥청거리며 유행가를 불렀지만 언제 배웠는지 모르지만 우리 고유의 가곡을 분위기에 맞지 않게 멋들어지게 불렀던 사람 누군가 "고향의 노래"를 보내왔다 유명한 테너가 불렀고 배경이 우리가 자랐던 옛 고향..

詩 2023 2023.02.09

1월/배 중진

1월/배 중진 흰 눈이 떨어지자 베고니아도 떨어졌습니다 잠시 착각을 했는지 아니면 창밖의 세상이 그리웠는지 모든 꽃잎을 떨궜습니다 밤사이 잘 지냈는지 아침 인사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매정하게 메마른 잎으로 변해 넋을 잃게 했습니다 영원하리라 생각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단 며칠간만이라도 더 꿈의 대화를 나눴으면 했는데 2월이 오는 것도 보지 못하고 뭐가 성급했는지 저 멀리 구름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아마도 일 년 후에나 가능하리라 생각하니 짧았던 시간이 매우 그립습니다 따스함과 포근함으로 모든 것을 녹였었는데

詩 2023 2023.02.01

꽃뱀/배 중진

꽃뱀/배 중진 하필이면 꽃뱀끼리 만났다 넓은 세상에서 서로 피하면 될 텐데 길을 딱 막고 상대가 피하길 기다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엉켰다 자존심 건 숙명의 한판이었다 명예냐 돈이냐 입을 쩍 벌려 물고 휘감고 뒹굴었다 결판은 아주 쉽게 났고 서로 떨어져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본다 감쪽같이 먹어 치웠으면 속이 후련하겠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상대가 허점 보일 때까지 참기로 했다 약점을 노려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기로 똬리를 튼다 기회가 많지 않았기에 더욱 분하다고 생각한다 일단은 생각마저 동면에 들어가기로 한다

詩 2023 2023.01.29

이웃집 남자/배 중진

이웃집 남자/배 중진 출근하시는 이웃집 남자를 뵈었고 같은 Elevator를 이용했는데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셨으나 아무런 부담이 없으신 모양이다 2008년 이후 잘 다니시던 은행에 문제가 생겨 구조조정을 하면서 잘리셨고 세쌍둥이의 아버지는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으셨다 샌님같이 예쁘장하고 작은 체구의 그리스계통인데 사모님은 아일랜드계 선생님이셨으나 은퇴하셨지만 큰 집을 버리고 이웃이 된 지 불과 2년 전 대학생인 두 딸과 아들은 집을 떠나 기숙사에 기거한다 대형 상점에서 허드렛일하심을 감추지 않으셨고 부인이 출퇴근을 돕는듯하더니 근무 시간이 바뀌는 바람에 백인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버스를 집 앞에서 타시는데 하필 내려서 터덜터덜 노구를 이끌고 삶의 현장으로 마지못해 가는 곳이 전에 살던 집 앞인데 멋진..

詩 2023 2023.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