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2015 267

저녁 연기/배 중진

저녁 연기/배 중진 매우 작은 흰 눈이 말없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오후 멀리 단독주택의 굴뚝에서 모락모락 흰 연기가 올라가는데 옛날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초가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간다는 것은 땔감이 풍부하다는 것이요 귀한 쌀로 밥을 짓는다는 것이니 누구네 집이라고 또렷하게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아이들과 뛰어다니면서도 천진난만한 모습만큼이나 걱정없는 환한 얼굴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먹을 것이 부족하여 굶는 사람이 있다는데 저 연기는 난방용 보일러에서 나오는 것이고 세월은 흘러 인구밀도는 매우 높아졌고 쓰고 버리는 것이 너무 많아서 지구는 오염으로 신음하고 아름다운 추억의 저녁연기는 이웃을 앓게 하는 두통거리로 전락하여 가뜩이나 좋지 않은 사이인데 바람은 그쪽으로만 불어 제쳐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네 ..

詩 2015 2015.02.15

하얀 겨울/배 중진

하얀 겨울/배 중진 흰 눈이 쏟아지던 2월의 어느 날 흰머리가 너무 많아 보기 싫다는 사람이 있어 하얀 마음으로 이발관에 갔더니 흰 눈 떨어지듯 날리는 흰 머리칼 앞보다는 옆머리가 더 희었었는지 맥없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어느새 저렇게 하얗도록 까맣게 몰랐었는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피식 웃었더니 새로 바뀐 이발사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으며 열심히 큰 키를 구부려 정성을 다하는데 손놀림이 영 마땅치 않았지만 그래도 전문가인데 어떠랴 싶었으며 불현듯 군대에서 재수 없이 병장 박재수한테 걸려 귀를 기계로 흠집을 만들어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떠오르며 박 병장도 이 사람 못지 않은 큰 키였지 싶고 딴 것은 몰라도 배구는 그래도 했었지 생각하다가 다시 기계 소리에 놀라 거울을 바라보니 아무리 짧게 깎았어도 ..

詩 2015 2015.02.14

설강화(雪降花)/배 중진

설강화(雪降花)/배 중진 오늘도 내리는 흰 눈을 바라보면서 아직은 겨울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닫아 버리지만 그럴수록 설강화에 대한 그리움이 스멀거리는데 뾰족한 기치 창검처럼 냉혹한 방패의 흰 눈을 뚫고 꼿꼿한 꽃대는 절개를 뜻하며 살짝 고개 숙인 것은 우아한 곡선미를 은근히 자랑하는 듯하고 엄동설한의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수줍게 받아들이면서 겸손하며 강한 바람에 꺾이지 않고 순종의 미를 살리면서도 외로이 따로 피지 않고 군락을 이뤄 협동심을 배양하고 씨앗을 실어나르는 개미를 유혹하기 위하여 아래로 드리워진 종 모양 하나의 흰 꽃을 피우는 배려도 잊지 않았으며 아무리 눈이 많이 쌓이고 얼음으로 감추려 해도 불굴의 의지로 녹이며 남들은 춥다고 흰 이불 속으로 들어가지만 어두운 곳에서 기를 쓰고 밝은 곳..

詩 2015 2015.02.13

잠 못 이루던 밤/배 중진

잠 못 이루던 밤/배 중진 교육계에 종사하다 은퇴한 누나가 푹 쉬고 싶다고는 했지만 벌써 몇 년째 해외여행을 가지 않아 이상하다 했더니 언제 고국에 올 것이며 얼마나 묶다가 갈 것인가 이것저것 묻더니 이번에 들어갈 때 같이 따라가겠단다 그것도 두 여동생과 같이 여행하겠다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라서 무엇부터 일을 처리하여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고 1996년 부모님 모시고 캐나다 및 미국 동부를 여행하고 LA와 샌프란시스코를 포함한 서부를 둘러보고 하와이로 날아가 즐기셨다가 한국으로 향하셨던 3주간의 일정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했으나 온통 여행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뒤척이더니 새벽 4시 즈음에나 간신히 눈을 붙일 수 있었고 그 뒤론 정신이 사나워 깨어있어도 혼..

詩 2015 2015.02.11

사랑이란/배 중진

사랑이란/배 중진 순수한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동원하여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사랑이 소유욕으로 변하고 집착으로 이어진다면 서로 불편한 관계로 치달리고 급기야는 사랑했던 사람을 강제수단으로 나만을 위해 존재하길 바라고 남에게 가지 못하도록 억류하며 믿지 못하고 잔혹하게 냉대하다가 상대방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슬픈 종말을 맞이하니 그것이 사랑이라고 누가 표현을 했으며 그것이 정당한 길이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며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하느님의 선처를 갈망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이라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유린한 자의 궁색한 궤변일 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남녀가 똑같은 운명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남도 좋아하는 것이 있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詩 2015 2015.02.08

친구의 자동차/배 중진

친구의 자동차/배 중진 친구의 자동차는 친구만큼이나 세월이 흘렀고 친숙한 사이 일지라도 친애하여 같이 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당사자는 유지비만 조금 더 들어갈 뿐 달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며 작은 차라서 연료비도 적게 들고 달마다 내는 할부금도 없으니 홀가분하다고 자랑도 하지만 돈도 있고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이니 품위도 지킬 겸 근사한 차를 타고 다니라고 애원하며 사정을 해도 남들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며 장거리 용은 아니지만 짧은 거리를 자랑스럽게 타고 다니는데 눈이 산더미처럼 쌓인 요즈음 남들은 삶의 전선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나가지만 급할 것 없고 은퇴하신 분이라 주차장에 두꺼운 하얀 솜이불을 뒤집어쓴 차는 그분의 차가 유일하여 오가며 볼 때마다 웃음만 나오고 겉은 멀쩡한 흰색이지..

詩 2015 2015.02.08

지금은 뭘 찾아다니는지/배 중진

지금은 뭘 찾아다니는지/배 중진 혼자 걸어 다닐 때 즈음은 이웃 소꿉동무들을 찾아다니고 뛸 줄도 알았을 땐 산천으로 쏘다니며 자연을 하나씩 배워나가기도 했고 청춘기에는 어두운 곳을 헤매기도 하고 남들이 하니 여자 뒤꽁무니도 따라다니면서 어른 흉내도 내고 국방의무도 충실히 수행했으며 어떻게 하다 보니 학업도 마치게 되었는데 장년기에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뜻을 품고 이역만리 떠나와 생판 다른 곳에서 먹고살기에 정신없었으며 와중에도 뜻을 세웠지만 엉뚱한 곳으로 점점 뻗대어 나갔음을 알아차려 돌아가려 했지만 너무 멀리 동떨어져 오도 가도 못하더니 노년기는 정신은 말짱하나 몸이 굳어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였고 하루가 다르게 아픈 곳이 생겨나 찡그린 얼굴이요 이대로 짧은 인생 주저앉을 수 없다 하여 언제가..

詩 2015 2015.02.07

기적/배 중진

기적/배 중진 다급하게 울리는 기적에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잊었는데 그 순간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고 전철은 화염에 휩싸인 채 공동묘지 옆에 멈췄네 한 사람의 실수로 여러 명이 화를 입었고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어마어마한 사고를 유발하여 긴 하루 어렵게 보내고 가족의 품에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어 감사드리는 순간 집 근처에서 불귀의 객으로 전락했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당신 남아있는 사랑스러운 가족들은 어찌하라고 매우 춥고도 눈이 수북이 쌓인 어느 날 아무런 이별의 말씀도 없이 따스한 가정으로 돌아오지 않는지요 지옥 같은 순간에도 기적은 일어나 살아남은 사람도 있지만 그들의 삶은 예전과 같지 않을 테고 매일 같은 장소를 지나쳐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저주하면서 가진 것이 많으나 ..

詩 2015 2015.02.06

닭띠해는 아니지만/배 중진

닭띠해는 아니지만/배 중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판화 하나 중2에서 중3으로 넘어가는 1969년 겨울 방학 때 연하엽서를 정성 들여 담임선생님께 보내드리면서 훌륭한 지도력과 은혜에 감사드린다고 적었고 멀지도 않은 곳에 사시는 화가님은 잊지 못할 판화를 제작하여 제자를 감동케 하셨고 작대기라고 부르시면서 맞이하는 새해 열심히 공부하여 원하는 고등학교 가길 원하셨는데 두고두고 진국이신 선생님이 그립고 빨간 벼슬의 거대한 수탉 한 마리가 여명의 동쪽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홰를 치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붉은 해도 깜짝 놀라 벌떡 떠올랐지 싶었으며 1968년 여름 방학 들어가기 전 무지개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던 하굣길 흙탕물이 무섭게 흐르던 시냇가를 같이 거닐면서 기말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면 부모님이 ..

詩 2015 2015.02.04

인연/배 중진

인연/배 중진 33개월 어렵사리 서울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충남에 있는 옛 직장에 찾아가서 인사드렸더니 더 좋은 곳으로 발령을 내주었기에 2개월 정도 근무하는 척하며 친구로 사귀었던 여인 객지에서 외로운 마음을 위로받았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지만 인연은 끈질겨 일 년 이상 서울과 당진을 연결하는 전화선으로 정을 쌓다가 무등산으로 친구들과 같이 등산하기로 했으며 서대전에서 만나 새벽을 달려 아침에 광주역에 도착했는데 인연이 없는 산인지 등산이 허락되지 않아 광주역에서 우러러 미지의 산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고 그대로 발길을 돌려 대둔산으로 향했으나 일주일 후 광주사태가 발생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그렇게 잊힌 산이 되었고 우리 사이도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 통화하길 뜸하더니 어느 사이 냉랭함만 감돌고 서로를..

詩 2015 2015.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