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 8

꽃뱀/배 중진

꽃뱀/배 중진 하필이면 꽃뱀끼리 만났다 넓은 세상에서 서로 피하면 될 텐데 길을 딱 막고 상대가 피하길 기다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엉켰다 자존심 건 숙명의 한판이었다 명예냐 돈이냐 입을 쩍 벌려 물고 휘감고 뒹굴었다 결판은 아주 쉽게 났고 서로 떨어져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본다 감쪽같이 먹어 치웠으면 속이 후련하겠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상대가 허점 보일 때까지 참기로 했다 약점을 노려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기로 똬리를 튼다 기회가 많지 않았기에 더욱 분하다고 생각한다 일단은 생각마저 동면에 들어가기로 한다

詩 2023 2023.01.29

이웃집 남자/배 중진

이웃집 남자/배 중진 출근하시는 이웃집 남자를 뵈었고 같은 Elevator를 이용했는데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셨으나 아무런 부담이 없으신 모양이다 2008년 이후 잘 다니시던 은행에 문제가 생겨 구조조정을 하면서 잘리셨고 세쌍둥이의 아버지는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으셨다 샌님같이 예쁘장하고 작은 체구의 그리스계통인데 사모님은 아일랜드계 선생님이셨으나 은퇴하셨지만 큰 집을 버리고 이웃이 된 지 불과 2년 전 대학생인 두 딸과 아들은 집을 떠나 기숙사에 기거한다 대형 상점에서 허드렛일하심을 감추지 않으셨고 부인이 출퇴근을 돕는듯하더니 근무 시간이 바뀌는 바람에 백인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버스를 집 앞에서 타시는데 하필 내려서 터덜터덜 노구를 이끌고 삶의 현장으로 마지못해 가는 곳이 전에 살던 집 앞인데 멋진..

詩 2023 2023.01.21

눈발/배 중진

눈발/배 중진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흰 눈이 우리 도시까지 오긴 했는데 왜 왔는지 자신을 찾지 못했고 우왕좌왕, 갈팡질팡한다 강풍이 얼마나 세게 몰아치는지 저 멀리 소나무는 요동을 치고 있었고 높은 곳에서 공사하는 현장에서는 그것도 모자라는지 Crane을 두 대나 까마득히 올려서 공사하고 있었다 뒤편에서는 해님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서로를 희롱하지 싶은 게 순식간에 간데온데도없이 흔적도 없다 창문 쪽으로 피어있는 베고니아는 처음 보는 눈보라를 보았는지 모르겠다 창문에 붙어있는 눈도 있었기에 아마도 어렴풋이 상대를 의식하지 않았을까 싱겁게 삭풍이 으르렁거린다 장난기가 동한 하늘에서 앞을 가리지 못할 정도의 눈발을 날려도 본다 결국 모든 것은 허장성세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투로 파란 하늘이 짧은 날을 에고..

詩 2023 2023.01.18

천진난만/배 중진

천진난만/배 중진 벌거숭이산을 벌거벗고 달리던 시절 시냇물을 따라 송사리 잡겠다고 덤비던 시답잖던 시간 배고픔을 몰랐고 가난도 몰랐으며 벗을 것도 없었던 여름 산재한 불편함도 일상이었던 겨울 그리움도 부족함도 전혀 몰랐던 아름다운 세상 나만의 순간 세월은 흘러 너와 나를 알게 되고 이웃을 두려워하고 세계 속에 하나의 작은 구성원임을 인식하고 꿈을 찾아 걷다 보니 지나온 거리가 까마득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느꼈을 땐 힘에 부쳐 아득함만 밤마다 꿈을 꿔 잊지 않으려 애를 쓰는 나의 고향 천진한 어린이와의 만남은 또 다른 아름다운 별천지

詩 2023 2023.01.14

베고니아/배 중진

베고니아/배 중진 녹색 심장의 하얀 베고니아가 푸른 창밖으로 향하여 노란 작은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그때까지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친구가 넘어져 무릎이 깨졌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시기상으로도 너무 일렀죠 작년보다 재작년에는 아예 피지도 않아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라요 아무리 미물이라도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꽁꽁 언 가슴에 작은 꽃은 태양 같은 희망이었어요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에서 고인이 된 친구의 무덤을 찾은 것이 새해였는데 보답하는 심정으로 찾아온 예쁜 꽃 같이 있다는 위로 주위가 외롭지 않다는 다정함을 느꼈다 *Begonia 1/11/2023 그렇게 피었다가 졌다고 생각하고 1월을 넘겼는데 2/24 중간에서 꽃잎이 떨어진 흔적이 보여 살폈더니 원망 어린 눈길을 보내는 아름다운 꽃이 있었을 줄이..

詩 2023 2023.01.12

부싯돌/배 중진

부싯돌/배 중진 아주 먼 옛날에는 성냥불만 그어도 확 옮겨붙어 활활 지글거렸다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이글거림을 확인했다 이젠 부싯돌로 불을 붙이려고 노력한다 자꾸 꺼짐을 알면서도 애를 쓴다 보는 이에게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조약돌을 던져 조용한 호수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세상만사 바람이 불지 않아 호젓함을 좋아했는데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자꾸 파문을 일으킨다 하지 말라고 해도 재미있는가 보다 전에는 그런 것을 무척 따라 했지만 지금은 사랑이 저 멀리 고개를 넘어가 있어 해괴하다는 느낌이다 걸림돌이 되지 디딤돌이 되지 않는다 혹시 알아 꺼진 불도 다시 보자

詩 2023 2023.01.10

새해 결심/배 중진

새해 결심/배 중진 옷은 옷이로되 몸이 불어 맞지를 않는구나 애를 쓰며 불룩한 배를 눌러도 보고 호흡을 멈추고 감추려 해도 소용없는 짓이구나 배불리 먹을 때는 좋았지 조금씩 불어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미련한 것인지 감각이 없던 것인지 조각가처럼 다듬어 조금씩만 깎아도 좋으련만 조족지혈인 양 너는 포복절도하고 나도 쓴웃음 지으니 조만간 큰 결단을 내려야겠다 이러다 제 명에 못 살겠다는 생각을 했고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좋은데 무려 50장 이상의 양복바지를 넘겨야 하니 작심삼일이나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詩 2023 2023.01.08

안갯속/배 중진

안갯속/배 중진 감출 듯 자욱한 안개에 휩싸여 간신히 서 있는 외로운 나무 한 그루 주위에 있던 나무들 순식간에 싹둑 다 베어져 사라지고 사시나무 떨듯 존재를 무색게 했는데 기적같이 살아남았고 귀한 까마귀 한 쌍 둥지를 틀게 하였구나 가까이에 까마귀가 자주 출몰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덮는 안개 때문에 이 지역에 살던 인디언들이 하얀 평원이라 명명했다는 동네 오늘도 배가 고픈 까마귀들 아우성쳤는데 오늘 이곳에 먹을 것이 있음을 기억한다고는 하지만 오늘, 내일을 따지기 전에 누군가 날아가다가 먹이를 보았지 싶고 오늘이 다 가기 전에 그것을 서로 나눠 먹는 것이 아니겠나 옹졸한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앙상한 나뭇가지뿐이라 보금자리를 떠난 까마귀마저도 찾지 않지만 여름이 되면 제 고향을 ..

詩 2023 2023.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