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2012

충민공 임경업 장군/배 중진

배중진 2012. 12. 22. 02:10

 

충민공 임경업 장군/배 중진

날씨가 청명해진다고 했는데 멍청했는지
꺼져가는 나라가 밝게 보인 이유가 무얼까
난국에 우뚝 선 충신이었는데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요


근심한다고 탐관오리들이 정사를 돌보겠는가
호랑이를 때려잡았다고 경축할 수도 있겠지만
사나운 장수를 옭아매고 정적에 의하여 억울하게 사라지니
업보였는지도 모르겠네
 

절개를 외면하고 강호에 묻혀 살 수도 있었으나

사나이 대장부 중원을 호령하고 지조를 지켰지만

험난한 세월을 극복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장살을 당했으니

후세에 보고 듣고 배우는 이가 있다면 그나마 위안으로 삼겠네

 

높은 산이 있고 두터운 숲이 있어야
호랑이도 살고 죽어서 가죽을 남길 수 있듯
강대한 나라 없는 장군이 어찌 산천을 호령하고
역사에 길게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2012.12.22 02:26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임경업(林慶業)
1594년 ~ 1646년

별명
고송(호), 충민(시호)

태어난 곳
충청북도 충주

복무
조선
주요 참전
병자호란, 정묘호란

임경업(林慶業, 1594년~1646년 음력 6월 20일(양력 8월 1일))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친명배청파(親明排淸派)

무장이었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가 충민(忠愍)이며,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충주(忠州) 출생이다.

판서(判書) 임정(林整)의 후손이다.

24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4년(인조 1) 이괄의 난 때에는 반란군을 토벌하여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영변부사에 등용되어 북방 경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의주에 있는 백마 산성을 다시 쌓았다.

당시 누르하치가 만주 대륙을 통일하여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칭하고 명나라와 조선에 싸움을 자주 걸어왔다.

후금의 소규모 부대가 국경을 넘어오자 이를 여러 번 격퇴하여 되돌려보냈다.

그는 조선 조정 내 친명 인사의 한사람으로,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주었으며, 임경업은 명나라를

위하여 오랑캐를 무찌르는 것으로 보답하여, 명나라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송환과 사형

그는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호송되었다. 이때 국내에서 좌의정 심기원의 모반에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심기원이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접한 1646년 인조는 임경업을 심문하기 위해 임경업의

환국을 요청했고, 순치제는 그를 내주었다.

조선에 돌아온 그는 친청파 인사인 김자점의 비판과 죄를 주어야 된다는 여론에 의해 죽었다.

1646년 6월 17일 인조 24년 인조의 친국 과정에서 심기원과는 아무런 관련 사항이 없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지자 임경업을 시기한 김자점이 나라를 배신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위반했다며,

형리들을 시켜 장살(杖殺)시켜 버렸다.

 

사후

사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김자점도 몰락하고, 북벌론을 주장하던 송시열, 윤휴 등이 집권하였으나 청나라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신원, 복권 주장은 번번히 묵살되었다. 그 뒤 숙종 때에 가서야

1697년(숙종 23년) 복관되었다.

1697년(숙종 23) 복관(復官)되었으며, 충주 충렬사(忠烈祠), 선천의 충민사 등에 배향되었다. 1726년(영조 2년)에

호서지방 사람들이 충렬사(忠烈社)를 세웠고, 이듬해(영조 3년)에 조정에서 사액(賜額)을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1791년(정조 15년)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어제달천충열사비”이다.

1978년 충렬사는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성역화되었다.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구전 소설 임경업 전 등이 있다. 시호는 충민이다.

 

일화
임경업은 죽기 직전 “천하의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나를 죽이는 것은 큰 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냐?”라고

외치며 한 많은 생을 마쳤으니 그의 나이 53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대여, 나는 죽이려 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느냐?”라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한다.
임경업을 모함하여 때려죽인 김자점도 얼마 못가 역모를 꾸미려다가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임경업이 금교역에서 탈출한 이후 청나라에서는 그의 부인을 심양으로 끌고 가서 고문했다. 그러나, 임경업의

부인은 “우리 주인은 대명(大明)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가 있는가?”라고 하며 품에서 칼을 꺼내어 자결을 했다고 전해진다.

 

검호(劍湖)에 달빛 옛날과 같은데 강물은 나가고 들어오고
달항(達巷 : 충주)사람 가버리고 길게 울리는 소리 고르지 못하구나.
오래된 잣나무 있는 황폐한 사당은
천년의 강상(綱常)이로다.
구름수레와 무지개 깃발
영걸스러운 위엄은 시원스럽구나.
신하는 절하고 머리 조아리니
천자가 위에 계시네.
저 웅원(熊袁)과 함께 있구나. 좌우에는 범을 그린 활집을 지녔네.
어찌타! 저녁이면 내려와서 그 혼령은 항상 다니던 곳 맴도네.
주나라(중국 = 명을 지칭)땅 돌아보니 곡식만 주렁주렁,
노나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부모의 나라라네.
상을 갑자기 물리지 마라. 신령이 음식을 즐기고 있구나.
화로에는 향 한 줄기 타오르고 제기에는 온갖 향기로운 음식 가득하구나.
깊은 뜻이 함께하여 뭉치니
탄식하는 소리 들리는 듯하네.
쳐다보니 앞에 있는 듯 홀연히 뒤에 있는 듯 하더니 바람이 사라지니 조용해지는구나.
새벽별은 빛나고 있으니
그 신기함을 두우(斗牛)의 별자리에 물어보리라.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경연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규장각검교 직제학 신 이병모(李秉模)는

하교를 받들어 삼가 글씨를 쓰고,
보국숭록대부 행 판돈녕부사 겸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신

윤동섬(尹東暹)은 하교를 받들어 삼가 전액한다.

금상(今上) 15년 신해(정조 15, 1791년) 8월 일에 세움
御製達川忠烈祠碑

 

한국유사, 노원마신님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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