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까칠한 기억/배 중진
찌는 날씨에도
마당 가득 타작하기 위해 보릿단을 펼쳐 말리고 있었으며
곁에는 보릿단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기도 하여
꺼끄러기 때문에 근처 가까이도 가지도 않았던 껄끄러운 날
그래도 시원한 사랑 마루에서
두툼한 솜이불을
걸상에 걸쳐 놓고
마냥 뒹굴고 있던 차에
산천초목이 벌벌 떨게 폭음이 터졌고
높지도 않은 산의 고압 송전선에서 연기가 치솟아
동네 어르신들은 앞을 다투어 총알같이 산으로 달려가셨으며
동작이 굼뜬 초등학교 2학년 어린아이는
헐레벌떡 모처럼의 구경거리를 놓칠세라
산 쪽으로 올라가다가
옹달샘 근처에서 울부짖으며 내려오는 마을 분들과
장정들을 보았는데
들것에 실려 오는 불행한 아이는
겁 없고 날렵한 4학년 선배였고
검붉은 피가
사방팔방으로 찢긴 새까만 몸에서 나오고 있음을 보았으며
꺼져가는 신음이 그나마 들렸던 짧은 기억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까칠한 순간은 껄끄럽게 남아
떨치려 해도 떨칠 수 없고
보리만 보면
보리 생각만 하면
그때 생각이 나고
왜 그랬는지 전혀 알 수는 없지만
그 높은 송전탑에 발바닥이 간질거리면서도 올라가
꺾은 오리나무 가지로 내리쳤으니
운명이 바뀌리라 생각이나 했을까마는
죽은 선배와
자식을 허무하게 잃은 아버지의
슬픈 술주정이 또렷하게
가슴에 남아
생각할 때마다
후벼 파며
까칠하게 남아 있다
그날 밤
천지개벽이라도 할양으로
천둥·번개 치며 소나기가 무섭게 쏟아졌던 기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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