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2022

함박눈이 내리던 새벽/배 중진

배중진 2022. 2. 3. 00:55

함박눈이 내리던 새벽/배 중진

함박눈이 쏟아지는 줄도 모르고
곤히 잠들었던 먼 옛날
아랫방엔 할머니가 주무시고
사랑방엔 할아버지가 기침을 하시고
건너방엔 우리 6형제 옹기종기 모여 단잠을 자는데

통학생이 방학 때인데도 불구하고 고등학교에 가야 한단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단 하루 서두르는 날이라
어머니만 알고 계시는데

깨우지 않아도 제 할 일을 하는 자식은
자신만 챙기면 되었지만

어머니가 하시는 일은 자신을 위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더욱 일찍 일어나셔 아들의 밥상을 차려주시는데
식구 전부를 위한 조반을 준비하시기에는 너무 일러 
할아버지 밥상이 식을 염려가 있어
작은 냄비에 아들만을 위한 밥을 지어 주시고
그것도 모자라 털신을 아랫목에 묻었다가
막 나가려는 아들에게 내어주신다 

뽀드득 소리가 나는 정겨운 새벽
첫발자국을 만드는 신선한 시간,
뒤돌아보는 발자국이 바름은 저 발자국을 따라오는 사람이 있기에
함부로 만들 수도 없거니와 정복자, 선구자라 착각도 했지 않았겠는지 

코가 얼얼하고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한 엄동설한이었어도
세상이 두렵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고
반세기가 지났어도 가슴 속에 뚜렷하다

 

12/18/2013 Mohonk Mountain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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