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2020

호랑이 담배 피울 적/배 중진

배중진 2020. 12. 23. 00:24

호랑이 담배 피울 적/배 중진

 

옛날 옛적에

할머니는 안방을 지키시고
우린 초저녁까지 할머니 방에서 놀다가
잠을 잘 때면 
나만 홀로 사랑방, 할아버지가 쓰시는 방으로 건너가야 했는데
그때가 가장 무서웠답니다
안방 마루에 불을 밝히고 동생들한테 사랑방까지 가기 전까지는
전깃불을 끄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여 약조를 받아내곤 
뛰기 시작합니다

 

부엌을 거쳐
나뭇간
소가 있는 널찍한 외양간

그리고 사랑방이지요 
바로 들어가기 직전의 아궁이 언저리가 광으로 들어가는 곳이라
넓기도 하지만 컴컴하여 도둑놈이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더 무서웠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도착하여 
안방에다 대고 외쳐 마루의 불을 끄라고 하곤

사랑방 불을 부리나케 소등하고 쏙 들어가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사랑방에 고래고래 소리 질러
할아버지한테 사랑방 문밖의 불을 켜 달라고 
명령을 한 다음에 모든 것이 이뤄지지요

 

안방은 전체가 모여 식사하는 곳이라
아마  할아버지는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했지 싶습니다
할아버지 등을 긁어드리는 것이 귀찮고 싫었지만
그렇게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곤 했지요 
문풍지가 얼마나 심하게 흔들리는지 그것도 숨죽이게 합니다 
자기의 숨결 소리가 무서워 마음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이불속으로 머리 전체를 숨겨야 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때가 가장 그립습니다

 

가끔은 오줌도 싸고 
아침에 할머니가 군불을 때시면
젖은 속옷을 은근슬쩍 말리느라 뭉그적거리며 뒤척이는 척도 했지요
요대기엔 세계지도가 그려지면서 아마도 일찍이 세상을 동경했는지도 모르지요
모든 것은 꿈결에 시원한 맛을 본 후 그런 일이 벌어진답니다

 

02/04/2019

'詩 20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닷가의 살인/배 중진  (0) 2020.12.27
공황발작/배 중진  (0) 2020.12.24
떠나는 해/배 중진  (0) 2020.12.20
철새/배 중진  (0) 2020.12.19
첫눈/배 중진  (0) 2020.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