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2020

흑곰의 세상/배 중진

배중진 2020. 6. 17. 03:08

흑곰의 세상/배 중진

 

우리 도시에 곰이 나타났습니다
어슬렁거리며 먹이를 찾고 있습니다

 

나무가 아닌 높은 건물도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동물이 아닌 차량이 달리는데도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신기해서 사진을 찍습니다
용감하게 곰 쪽으로 달려가는 미련한 짓도 합니다

 

경찰이 추격하니
곰은 날쌔게 담을 넘어 피하고
다른 경찰차가 뒤쫓으면 방향을 확 바꿔 달아납니다
어디가 처음이고 끝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흑곰은 헬리콥터까지 따돌립니다

 

인간이 세상을 두려워하여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그들의 대담성이 발동하여
숲을 벗어나기 시작한 모양이고
영역을 넓혀 활동하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듯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능글맞은 곰/배 중진

어슬렁어슬렁
킁킁거리며
동면에 들어가기 전에
혹독한 삶을 저주하며

마지막으로
필요한 음식을 찾아
잣나무 밑에 당도하니
땀 흘려 청설모가 숨겨놓은 먹이가 있었고

먼저 찾아 먹는 놈이 임자요
어쩌지 못하고 빼앗기는 놈이 약자더라
잠을 자는 놈은 잔다지만
먹을 것을 다 빼앗긴 놈은 어찌 지내려는지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공격자세를 취하지만
상대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곰이라
달걀로 바위치는 격

농사라고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정성을 들여 모았는데
앞길이 캄캄하고 긴긴 겨울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미련하고 잔인한 놈 벼룩의 간을 내먹다니

 

낮은 곳에서의 삶/배 중진

알래스카의 미련한 곰도
눈이 잔뜩 쌓인 높은 산을 오르지는 않는다
높은 곳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고
그곳에는 기대 이상으로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음을
오랜 경험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다

바닷물이 썰물 되어 빠져나간 공간엔
아무것도 없는 듯해도
그곳엔 먹을 것이 있음을 안다
큰 것을 바라지도 않고
작은 조개를 찾아 오랫동안 발라 먹는다
고맙게도 조개는 숨통을 조여오는 것도 모르지만

작은길을 내주기에
밀물이 밀어닥치기 전에 주린 배를 채워야 함도 안다

큰 덩치에 맞지 않는 행동일지라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큰 짐승이 우스운 행동을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삶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만물의 영장 인간과는 달리
높은 곳에
죽기를 각오하고
올라갈 이유가 전혀 없다

 

6/3/2019

 

끝내 곰은 잡지 못했고 숲속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포획해서 인간사회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옮겨 살게 했으면 좋으련만 언제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나
인간을 해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답니다. 특히나 늦은 밤에 외딴곳에서
조우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겠지요. 사슴은 자주 자동차와 충돌하여 경고판이
많이 세워져 있기도 하고 근처에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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