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배 중진
옛날 아주 까마득한 옛날에
아미산 밑으로
한 무리의 가족을 이끌고 정처 없이 어디론가 가다가
잠깐 쉬면서
산세를 살피니
아담하고 그렇게 호젓할 수가 없었고
더군다나 물도 좋고 공기 맑은 곳이라
일가를 이뤄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느티나무도 심고
밭도 개간하고
논도 일궈 풍요로움을 경작하니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있을까
마을은 절로 번성하여
수많은 사람을 길러냈고
느티나무도 어언 400년이 넘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성장하면서
동네에서 일어나는 길흉을 다 보았거늘
누가 범상치 않다 큰소리치지 않을쏜가
특별히 바라는 것도 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시원한 바람을 잡아주었기에
뜨거운 여름이면 이리 뻗고 저리 누워
녹작지근한 심신을 달래주던 곳
누가 감사치 않을 수 있었더냐
어느 이상한 날
근본도 없이 막돼먹은 녀석이
비어 있는 밑동에 불을 질러
경천동지하게 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요절했다는 소문이라
하늘도 무심치 않거니와
나무를 식수한 지 422년이 지난 오늘
요리조리 살펴보니
이토록 건강한 모습 일찍이 본 기억이 없어
아마도 이 마을에 좋은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까
태평성대를 이루지 않겠나
앞으로도 수백 년간
1593년 3월에 식재한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