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황혼/배 중진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만 기억력이 좋으신 줄 알았더니
구순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도 생생하게
자세히 설명하시다 못해
사돈에 팔촌의 친인척 관계와
나이 및 자손들까지도 거론하시고
언제 누가 몇 살에 죽었으며
부의금으로 얼마를 내셨다는 것을
소상하게 기록하셨고
아들과 딸이 언제 전화했고 돈 얼마나 주고 갔는지도
명필로 적어 놓으셔 그 당시 뭘 하셨는지도 알겠는데
아쉽게도 개인적인 감정은 이입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셨고 느끼셨으며 배우셨는지 알 수는 없으나
혼자서도 온종일 무료해 하시지 않고 바쁘시다
절수의 목적으로 샘가에서 소변 후 물 한 바가지 부으시며
일부로 변기를 사용치 않으시고
절전을 위해선 찬밥도 마다치 않으셨으며
어지간한 추위와 더위에 난방은 물론
에어컨과 선풍기도 틀지 않고 버티신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고 이면지 활용은 물론
쌓아놓은 신문만도 산더미 같은데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것이 오밀조밀하게 짜여 있어
누군가 섣불리 이빨쏘시개라도 옮겨 놓으면
말없이 제자리에다 갖다 놓으시고
거동이 불편하시지만
옛날 일은 소상하게 기억하고 계시며
어떤 때는 어제와 그제 말씀하신 것을
또 반복해서 말씀하셔도
멀리에서 온 아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즐겨 또 듣는 것은
홀로 적적하셔 대화 상대가 없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가끔가다 장단 맞추기도 하는데
하나 흠은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어제는 성환초등학교에 1957년 처음 부임하셔
잊지 못할 학생들 이름을 기억하시다가 손자를 시켜 학교에 연락하여
부재중인 교장이 나중에 전화하게 하였으며
조만간 제32회 동기들의 연락이 있을 거라는 말씀을 두 번 하셨고
말씀하시다 보면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어
어쩔 수 없기도 한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인연과 결혼
본인의 혼사문제는 맞선도 보지 않고
장인이 찾아와 당사주를 받아간 지
한 달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는 말씀과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관계
면장과 지서장의 굳은 언약이 후손들 사이에서
끝내 결실을 보았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고
미호천 제방은 할아버지가 면장으로 계시며 이룩한 공적으로
결국은 내판 들판이 생긴 사연이고
돌은 우리 마을 뒷산과 여러 곳에서 채석해갔음을 알았고
그 이외에도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피난시절 상황을 소상하게 말씀하신 것이
처음 듣는 과거사였기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오순도순 이야기하다 보니
아름다운 저녁노을에 젖어드네
부자지간의 대화
과거와 현재를 달리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詩 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운 개미/배 중진 (0) | 2015.09.01 |
---|---|
불확실한 미래/배 중진 (0) | 2015.09.01 |
오토바이/배 중진 (0) | 2015.08.31 |
농촌을 지키는 것들/배 중진 (0) | 2015.08.30 |
꿀벌/배 중진 (0) | 2015.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