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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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재상 중 한명.
중국 초한쟁패기, 전한(前漢) 한고제(漢高祖) 시대 정치가. 진(秦) 시대에도 관직에 있었으며, 이후 유방(劉邦)의 막료(幕僚)로 그의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조참을 제치고 유방에게 가장 많은 식읍을 하사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공신 서열에서 소하에 밀리지만 그 공이 작지 않았던 장량에게는 유방이 무려 3만 호의 식읍을 내리려 했으나 장량 본인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한신은 비록 제나라 왕의 자리를 어이없게 유방에게 빼앗겼지만 그 후에 초나라 영토의 왕으로 즉위가 되었다.
찬후(酇侯)로 봉해지고 식읍 7,000호를 하사받았다. 전설의 관직이라 할 수 있는 상국(相國)[1]에 임명되고 "구석(九錫)"[2]을 수여받아 한나라 역사에서도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시호인 문종(文終)과 합칭해 차문종후(酇文終侯)라고도 한다.
2. 진나라의 관리[편집]
소하는 강소성(江蘇省) 서주시(徐州市)에 있는 패현의 풍읍이 고향이었다. 평소에 법 관련 공부를 했었는지, 현내에 소하보다 딱히 법률이 밝은 사람이 없어 패현의 현령은 소하를 주리(主吏)로 두고 있었다.[3] 사마천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별달리 특별할것도 없은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하는데……다만 조상국세가를 보면, 소하와 조참은 현의 아전들 중에서는 호걸이라고 부를만하긴 했었다고 한다. 유방과는 이때부터 면식이 있었다.
이때 유방은 딱히 벼슬도 하지 않는 백수였는데, 이것저것 관청에서 곤란해질 일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소하는 유방을 적당히 도와주었다. 이거 부정부패 아닌가? 나중에 유방이 정장(亭長)이라는 조그마한 벼슬을 하나 하자 그때도 일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소하가 유방의 사정을 이것저것 도와준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보통 의례적으로라도 "태조의 신령한 덕을 알아보아서……" 같은 식의 언급이 있을만도 한데, 사기(史記)나 한서(漢書)나 그 동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조차 없다. 소하가 유방의 진면모를 알아차려 그를 도와주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고조본기(高祖本記)에서는,
유계(유방)는 원래 큰소리를 자주 치나 이루어지는 일은 드뭅니다.
라고 발언하는 부분이 있다. 이게 자그마치 정사에 기록된 언급이다(...) 유방이 땡전 한푼도 없으면서 여공(呂公)에게 하례금을 1만전 내겠다고 허세부렸을 때에 대한 언급이다. 누가봐도 빈정거리듯이 말한거다.
딱히 유방을 소하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일 하나만으로는 사람 마음을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높이 여겼다고 해도 하는짓이 너무 터무니없으면 빈정거릴 수도 있고……임협(任俠)의 태도로 이웃끼리 돕자고 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간에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므로 그 이유에 대해선 알아서 생각해보자.
여하간 이런 이후에도 유방을 소하가 꾸준히 도와준 사실은 분명하다. 유방이 함양(咸陽)으로 요역하러 떠날 당시에도, 다른 사람들이 300전 씩을 보태줄때 유독 소하만 혼자 500전을 보태주었다.
일 잘하는 사실은 이때부터 유명했는지, 진나라의 어사(御史)들이 패현으로 와서 감찰을 하거나 같이 일을 처리할때도 가장 일을 잘했고, 진나라 어사들도 감탄해서 그를 데려가서 입조시키려고 했지만 소하는 손사레를 치며 가지 않았다. 역시 그 이유에 대해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망해가는 진나라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물에 잠기는 배에 안 타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3. 전시재상(戰時宰相)[편집]
3.1. 유방을 추대하다[편집]
소하에게 500전을 받고 유방이 함양으로 떠나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 · 오광의 난이 발발 했고, 진승 등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소하가 있던 패현의 현령 역시 그런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먼저 반란에 동참해야 하겠다고 여겨, 마침 함양으로의 이동을 때려 치우고 망탕산(茫荡山)에서 숨어 지내던 유방을 번쾌(樊噲)를 보내어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정작 유방이 돌아올 때가 되자, 마음이 또 바뀐 현령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유방이 들어오는것을 막으면서, 유방과 친해보이던 소하와 조참(曹參)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느닷없이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된 소하와 조참은 부리나케 성벽을 넘어 도망쳐서 유방에게 붙어버렸다. 유방이 "현령 그 놈을 잡아 죽여야 패현이 무사하다." 는 내용의 글을 적어 성 내로 화살에 묶어쏘아 보내자, 성 내에서 이에 호응하여 현령을 때려 죽이고 성문을 열게 된다.
일단 반란이 일어나고 나자, 이제 사람들을 이끌 주모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유방에게 이 일을 부탁했다. 유방은 짐짓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소하나 조참이나 여기서 유방에게 거슬려서 좋을 것도 없고, 또 만약 주모자로 모반을 저질렀다가 일이 실패하면 자기 친척들이 모조리 도륙 당할까봐 두려웠던 그들은 유방에게 모든 일을 양보했다. 유방은 이렇게 추대되었다.
3.2. 한나라의 승상[편집]
거병 후 소하는 유방의 옆에서 여러 공무를 도왔다. 한동안 소하는 기록에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유방이 항량(項梁)의 세력에 편입되고 이곳저곳에서 전투를 계속하는 와중에 장수가 아니었던 소하가 눈에 띌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소하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것은 유방이 함양 입성에 성공하고 난 후였다. 본래 시골 무리들 정도였던 유방과 그 부하들이 진나라 제국의 수도였던 함양에 입성하고 나서, 대부분은 보물을 찾아 헤맸지만 오직 소하만은 진나라 승상부에 보관되어 있던 여러 문서와, 어사부의 율령도서(史律令圖), 지적도 및 호적부 등의 문헌들을 수집하여 깊숙한 곳에 감추어 보관했다.
이로 인해 유방은 훗날의 전쟁에서 중국 전역의 요새, 각 지역의 호구 숫자,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는 지역 등의 여러 정보를 파악하여 한발 앞서 나갈 수 있었다. 반면에 유방의 뒤를 이어 입성한 항우는 화끈하게 궁실들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대조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항우가 유방의 뒤를 이어 함양으로 진격해 옴으로서 유방의 처지는 곤란해졌고, 홍문연(鴻門宴)의 일이 있은 후에 천하의 벽지인 파촉(巴蜀)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다가 항복한 장한(章邯)을 비롯한 진나라의 항장 출신 번왕들이 유방을 견제하는 형세가 되자, 유방도 어그로가 머리 끝까지 올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은 심정으로 항우를 공격해버릴 생각을 품었다. 주발(周勃), 관영(灌嬰), 번쾌 등도 모두 이에 동의했다.[4]
하지만 소하가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않습니까?"라며 이들을 저지한다.[5] 이에 유방이 "그럼 일단 제일 먼저 너부터 죽이고 시작할까?"라며 화를 냈지만, 소하는 먼저 가든 늦게 가든 그게 그거겠죠.[6]라는 초강수 반응으로 유방을 설득했고, 곧 승상으로 임명된다.
3.3. 한신을 천거하다[편집]
이때 미래의 천하 대장군 한신은 하후영(夏侯嬰)의 천거를 받고 군량을 담당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에 임명되었으나, 딱히 주목을 받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썰미가 남다른 소하가 한신과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눈치챘다.
당시 유방군의 대단히 상황이 좋지 못했는데, 터벅터벅 촉으로 걸어온 유방군이 산시성 남정(南鄭)에 이를 무렵이 되자, 이 벽지를 견디지 못하고 하루에도 여러 장수 수십명이 탈영하는 막장스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머나먼 지역에 고향을 두고 있는 병사들도 매일마다 동쪽의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노래만을 불러댔다.
이런 판국에 한신 역시 중용을 받지 못 하자 냅다 달아나버리고 만다. 이 사실을 들은 소하는 미처 사정을 고할 겨를도 없이 한신의 뒤를 쫒아 추격했다. 이때 유방은 이제 소하마저 나를 버리고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두 팔을 잃은 것처럼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다 소하가 돌아오자 기쁘면서도 화가 나서 이유를 물었는데, 소하는 한신을 쫒아가 데려왔다고 말하고, 그를 대장으로 임명할 것을 권했다.
이 당시 소하의 직언은 몹시 충격과 공포.
대왕은 평소에 오만무례하십니다. 오늘 대장군을 임명한다고 하시면서 대장 될 사람에 대한 태도가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하십니다. 이런 대우로 인해 한신 같은 호걸들이 대왕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왕께서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시려고 한다면, 필시 좋은 날을 잡아서 목욕재계(沐浴齋戒) 하신 다음, 단을 세우고 예를 갖추어 의식을 행해야 합니다.
자기 주군이 되는 사람에게 "님 평소에 너무 건방을 부리잖아요." 고 까는 것(……) 다만 유방이 황제가 된 후에도 왕릉(王陵) 등이 "폐하는 본래 오만무례하십니다." 같은 발언을 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당시 유방군은 군신간의 격의가 그리 없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3.4. 전쟁의 기반[편집]
한신을 얻은 유방이 이윽고 동쪽으로 나가 삼진(三秦)을 평정할때, 소하는 산시성 남정에 남아 파(巴)와 촉(蜀) 지방을 진무하고 법령을 발포하여 이 지역을 확실한 한나라의 세력권으로 만들었다. 삼진을 평정하는 한나라 군대의 군량과 마초는 모두 여기서 끌어올린 부세 덕택이었다.
기원전 205년, 삼진을 평정한 유방이 마침내 여러 제후들과 함께 초(楚)나라의 항우에게 도전할 때, 소하는 같이 움직이지 않고 훗날의 혜제(惠帝)인 태자 유영(劉盈)과 함께 섬서성 임동현 동북쪽인 역양(櫟陽)에 남아 관중(關中) 지방을 지켰다.
이때 소하는 단순히 관중을 지키기만 한게 아니라, 한나라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궁실을 건축하고, 법령과 규약을 제정하고 관중 각 지역에 군과 현을 두어 행정조직을 완비했다. 즉, 개인이 국가의 기반을 마련해놓은것. 소하는 이러한 일을 할때마다 유방에게 보고했으며, 만일 유방에게 보고하기 힘들때도 적절하게 처리하고 유방에게 보고하면 유방은 이에 따랐다. 뭐 따질게 있어야지, 혼자 다 하는데
생각을 해보면, 이 시점에서 한나라는 관중과 파촉을 병합한 것인데, 이건 전국칠웅 중 최강이자 다른 육국을 벌벌떨게 했던 진나라의 세력권 그 자체다. 물론 전쟁의 여파 등으로 과거 진나라 정도의 생산력은[7] 나오지 않더라도, 이미 그 시점에서 항우의 세력이 비해 생산력으로 그리 꿇릴것은 없었던 것. 문제는 진나라가 멸망하며 무너진 행정조직을 완비하는 일인데, 소하는 매우 빠른 시기에 이 일을 해내었다.
이후 항우와 유방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소하는 이렇게 만들어놓은 행정력을 바탕으로 양식과 마초를 끊임없이 유방에게 지원해주었다. 유방은 항우와의 싸움에서 여러번 패하였지만, 소하의 도움으로 계속해서 재기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보급들은 일일히 그 기록이 세세하게 남아있지는 않지만, 이를테면 팽성전투의 사례가 있다. 팽성의 싸움에서 60만 대군이 항우의 군대에게 처참하게 박살난 유방은 형양(滎陽)에서 한신과 합류하고 패잔병을 수습하며 어떻게든 재기를 하려고 했다. 이때, 소하는 관중의 노약자들까지 끌어모아서 어떻게든 병력을 만들어 유방에게 보냈고, 유방은 이 병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다시 규합하여 초나라 군대를 격파해서 대치 상황을 이루어냈다.[8]
항우는 몇차례 유방에게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전쟁 자체를 종결시킬 만한 결정적인 패전은 안겨주지 못했다. 유방이 싸움에서 밀려도 이내 소하의 보급으로 세력을 어느정도 다시 회복했고, 이때문에 계속해서 대치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것. 이렇게 유방이 탈탈 털리면서도 어떻게든 항우를 견뎌내고 있는 사이에, 한신은 북방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있었다.
이때, 유방은 관중의 일을 소하에게 일임하고 본인은 항우를 막아내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렇게 되면 유방의 본거지인 관중은 완전히 소하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고, 소하가 만약 다른 마음을 먹게 된다면 유방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라는 것. 이 때문에 유방은 계속해서 소하에게 사람을 보내 칭송하는 말을 했지만, 소하의 배신 가능성에 대해 심각히 우려하고 있었다. 이때 포생(鮑生)[9]이라는 사람이 소하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한왕은 전장에 나가 풍찬노숙하며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사자를 여러 번 승상께 보내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왕이 승상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승상을 위해 한 말씀 드리자면, 승상께서는 자식과 손자 및 형제들 중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을 모아 모두 한왕에게 보내 한왕의 싸움을 도와 온 힘을 다하라고 하십시오. 한왕은 필시 승상에 대해 안심을 하고 다시 신임을 할 것입니다.
이에 소하는 그 말대로 시행했다. 이후 유방은 소하에 대해 안심하고 마음을 놓게 된다. 가장 군주에게 의심받을 위치에 있었지만 뛰어난 처세술로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러한 소하의 도움 등에 힘입어 BC 202년, 유방은 마침내 항우를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4. 제국의 재상[편집]
4.1. 사냥개와 사냥꾼[편집]
천하가 평정되고 나자, 이젠 천하통일에 힘쓴 공신들의 논공행상을 할 차례였다. 문제는 웬만한 공신들 모두가 "내가 제일 공을 많이 세웠다!" 하면서 싸우는 바람에 1년이 지나도록 도저히 결론이 나지 못한것. '유경, 숙손통 열전'의 언급을 보면, 이 당시 공신들의 모습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군신들이 연회석 상에서 서로 공을 다투다가 심지어는 술에 취해 망동하며 검을 뽑아들고 기둥을 내려치는 자들도 있었다. 고제가 보고 매우 근심했다.
이때, 보다못한 유방은 자신이 직접 소하를 차후(酇侯)에 봉하고, 공신들 중 가장 많은 식읍을 하사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서 항의했다.
우리들은 모두 몸에 갑옷을 두르고, 병장기를 손에 들고 전투에 친히 참가하기를 많게는 100여 회, 적게는 10여 회에 걸쳐 했습니다.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적군의 땅을 평정함으로 해서 모두가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소하는 우리와 같이 전투에 참가하여 힘들여 싸워 세운 공로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는 단지 필묵을 잡고 입으로만 전쟁을 하고 전투에는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오히려 소하의 공을 우리들 맨 위에 놓으시려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이 때 유방의 대답은 그야말로 걸작 그 자체. "너희들은 사냥개를 알고 있냐?"라고 유방이 묻자 모두 당연히 알고 있다고 말했고, 유방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냥을 할 때 짐승을 추격하여 물어뜯어 잡는 것이 사냥개의 역할이다. 그러나 짐승의 종적을 추격하여 숨어 있는 곳을 사냥개에 알려는 주는 것은 사냥꾼의 임무이다. 지금 그대들이 한 일이라고는 간신히 짐승들을 잡아왔을 뿐이라 그 공로로 말하면 단지 사냥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소하는 짐승들의 소재를 파악하여 사냥개들에게 그 목표를 분명히 알려주어 잡아오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 공로는 마치 사냥꾼의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동안 여러분들은 혼자, 많아봐야 2-3명이 나를 따랐다. 그러나 소하는 자기네 일족 사람들 수십 명으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하여 천하를 횡행하며 전쟁을 치르게 했다. 어찌 그의 이러한 공적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에 모든 군신이 조용해졌다고 한다.
일단 소하가 가장 대우를 높게 모두 봉작을 받고 나자, 이번에 여러 군신들은 "공신의 서열을 정해주세요." 라고 말하면서 조참을 최고 공신으로 추천했다. 조참이 수많은 싸움터를 전전하며 몸에 70개가 넘는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 그 이유.[10] 하지만 이미 유방은 군신들의 반대를 모두 꺾어버리고 소하에게 최고의 봉작을 주었는데, 이제 와서 조참을 최고 공신으로 하면 이런저런 말이 나올게 뻔해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해주고 싶었다. 이때, 유방의 심기를 알아차린 관내후(關內侯) 악천추(鄂千秋)가 발언하였다.
여러 대신들의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조참이 비록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며 적군의 성과 땅을 점령한 공이 비록 크다고 하나, 그것은 일시적인 공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항왕(項王)과 5년 동안에 걸쳐 서로 대치하고 전투를 벌린 폐하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 싸움에 지고 그때마다 그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 뿔뿔이 흩어져 버리자 홀홀 단신으로 도망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하는 그럴 때마다 관중의 자제들을 모아 폐하가 계시는 전선으로 보내 그 잃어버린 병력을 보충시켰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모두 폐하의 지시를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한 일입니다.
또한 관중에서 수만의 군사들을 전선으로 보낼 때는 언제나 폐하께서는 싸움에서 패한 직후의 가장 위급한 때였습니다. 한군과 초군이 형양에서 몇 년간에 걸쳐 대치할 때, 군중에는 양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소하가 관중에서 수레나 선박을 이용하여 양식을 보내주어 한군은 굶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비록 여러 번에 걸쳐 효산(崤山) 이동 지역의 싸움에서 패하는 동안 소하는 오로지 관중 지방을 굳건히 보전하여 만세에 길이 빛날 공훈을 세웠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비록 조참과 같은 사람 100명이 없다한들 한왕실에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한왕실은 조참과 같은 사람들을 얻음으로 해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일시적인 공로를 세운 사람을 만세에 길이 빛날 공적을 세운 사람 위에 놓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마땅히 소하의 공을 맨 위에 올리고 조참을 그 다음으로 하시옵소서.
즉, 조참 같은 사람은 100명이 없어도 무방하지만 소하의 공은 맨 위로 올려야 한다는 것. 이에 유방은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정했고, 소하에게는 신발을 신고 전당에 오를 수 있고, 칼을 찬 상태로 황제를 볼 수 있고, 황제를 배알할 때도 작은 걸음이 아니라 큰 걸음으로 걸을 수 있게하는 등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다. 눈치 빠르게 소하의 편을 든 악천추도 역시 보상을 받았다.
유방은 이런 조치 이외에 따로 2천호의 식읍을 더해주었다. 이는 과거 유방이 함양으로 떠날때, 소하만 2백전을 더 주었던 일 때문.
4.2. 성야소하, 패야소하[11][편집]
한신을 유인해 죽이다[12] |
그렇게 무탈하게 지내던 와중, 기원전 196년, 한나라를 떠들썩 하게 했던 진희(秦豨)의 반란이 일어났고, 유방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떠났다. 이때, 관중에 있던 한신은 진희의 반란에 동조하여 내부에서 협력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미 초한전쟁이 이어질 시기부터 "나 왕 시켜 주라" 등등 유방의 어그로를 끌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유방에게 사로잡혔다가 풀어지는 등 분위기가 대단히 심상찮았기에 선수를 쳐보려고 했다는 이야기. 이 반란 모의의 신빙성이야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이 시점에서 여후(呂后)는 한신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신의 용병술이 워낙 대단하니 함부로 적대 의사를 표방하고 잡으려고 하면 되려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이때 여후가 계책을 물어본 사람이 바로 소하였다. 평생 행정만 맡아온 소하에게 참으로 뜬금없는 요구같긴 한데(…) 소하는 진평이 빙의한 것처럼 이미 진희가 패배했다고 거짓 정보를 꾸몄고, 한신에게 "축하하러 오는게 몸보신에 좋을 것" 이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이에 한신은 의심없이 궁으로 나왔다가, 여후가 준비해놓은 무사에게 사로잡혀서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신은 소하의 추천으로 인해 한나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소하 때문에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다.
송(宋)나라 사람 홍매(洪邁)는 자신의 저서인 용재속필(容齋續筆)에서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가 천거했기 때문이요, 이제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소하의 배신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항간에 성공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다라는 말이 떠돌게 되었다(信之爲大將軍, 實蕭何所薦, 今其死也, 又出其謀. 故俚語有成也蕭何敗也蕭何之語)" 라고 기록하였다.
유방은 소하가 한신을 죽이는데 한 몫 했다는 말을 듣고, 소하를 상국(相國)에 봉하고 5천호의 식읍을 더하고 호위대를 붙여주었다.[13]
4.3. 미앙궁을 건설하다[편집]
전한의 궁전이었던 미앙궁(未央宮)을 건설한 인물도 소하. 동궐(東闕), 북궐(北闕), 전전(前殿), 무고(武庫), 태창(太倉) 등등 여러가지를 만들었는데, 마침 한왕 신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유방은 그 장관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지만, 유방도 바보가 아닌지라 저렇게 궁궐을 크게 짓고 하면 백성들의 부담이 장난 아니라는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고, 흉노의 침입도 부담스러웠던 상황. 이 때문에 유방은 소하를 호되게 질책했지만, 소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궁실을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무릇 천자가 사해를 자기 집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 궁궐이 장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고, 또한 이후로는 이 보다 더 장엄한 궁궐을 축조하지 말도록 영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즉 아직 천하가 안정되지 않아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 이러나 저러나 혼란스러운 틈을 타 궁궐을 지으면 황제의 권위도 살고 천하도 좀 더 나아진다는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는 이거보다 더 크게 지으면 안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 물론 후대의 군주들은 더 크게 지었다[14] 이에 유방도 화를 풀고 기뻐했다.
4.4. 처세술로 위기를 모면하다[편집]
소하가 상국이 되자 여러 사람들이 소하를 축하하였는데, 유독 소평(召平)이라는 사람만은[15] 축하를 하지 않고 소하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화가 승상의 몸에 미친 듯 합니다. 지금 황제께서는 반란군을 소탕하느라 외지에서 고생하시는데, 상국은 큰 고생을 하지 않고도 상이 늘어났는데 이게 과연 좋은 일이라고 보십니까? 지금 한신이 반란한 일때문에 황제께서 크게 놀란 상태인데, 지금 여기서 '호위대'를 하사하신 것이 과연 좋은 의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소하는 곧바로 식읍의 추가와 호위대를 사양하고, 모든 가산을 황제의 군비로 사용하게 했다. 이에 유방은 의심을 풀었다. 이후 기원전 195년, 이번에 유방은 구강왕 영포(英布)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다. 이때 유방은 소하에게 사람을 계속 보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 보았는데, 이 모습을 본 소하의 주변 사람이 그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상국께서 멸족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훅들어온다지금 황제가 그대를 여러번 떠보는것은, 그 명성이 너무 엄청나서 그런 것입니다. 일부러 명성을 떨어뜨리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에 소하는 일부러 백성들의 집을 싸게 사들여 명성을 더럽혔다. 이에 유방은 어느정도 안심을 했는데, 실제로 귀환하는 길에 보니 백성들이 "상국이 강제로 백성들의 집을 사들입니다. 벌써 수천명이 집을 빼앗겼습니다"이라고 하는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이를 믿게 되었다. 유방은 소하에게 "니가 백성들에게 사죄해야지." 라고 말했는데, 눈치 없는 소하는 이때 진나라 때 조성된 황제 전용 사냥터인 상림원을 개방하여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게 해달라고 주청을 올렸다. 이에 유방은 소하가 자기 돈은 불리면서 유방의 재산을 뜯어서 인심을 사겠다는 심보라고 의심하여 소하를 감옥에 집어넣어 버렸다. 이때, 왕씨(王氏) 성을 가진 위위[16]가 소하가 뭘 그리 잘못 했느냐 하고 유방에게 따졌다. 소하는 어찌나 인망이 두터웠던 건지 걱정해주는 사람도 참 많다.(…) 유방이 불안해할만도 하다 한신한텐 괴철처럼 쓸데없이 바람넣는 인간이나 있었는데 유방은 진시황의 이사를 거론하며 허물은 자신이, 좋은 것은 군주에게 양보하는 게 좋은 신하라고 들었는데 소하는 자신은 뇌물을 받으면서 유방의 재산을 이용해 못된 짓을 꾸미려 하기에 가두었다고 말했고,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가 항우, 영포, 진희와 싸울 때도 관중을 지키던게 소하인데, 그때 소하가 한발만 움직였어도 일을 이뤘을 텐데 그때도 반란을 안 일으킨 소하가 이제와서 뇌물 한 두푼이 탐나 일을 꾸미겠습니까? 그리고 진나라가 망한 이유는 바로 진시황이 그렇게 싫은 말에 귀를 닫았기 때문이었는데 어찌 이사와 진시황을 본받겠다는 천박한 말을 하십니까?
그 말을 들은 유방은 뉘우치는 바가 있어서 마음이 편치 않아 소하를 곧바로 석방했다. 감옥에서 나온 소하는 맨발로 유방을 찾아와 사죄하였고, 그 모습을 본 유방은 "내가 걸주(桀紂) 같은 폭군이다." 라고 하면서 소하에게 사죄하였다.
여담으로, 이때 유방은 영포와의 싸움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후였다. 소하에 대한 갑작스러운 공격적인 태도는 자신이 죽고 난 후에 명성이 어마어마한 소하가 헛된 짓을 꾸몄을 경우에 대한 불안감이 이유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말했듯이, 소하가 정말 반역을 할 생각이었다면 그 전에 더 좋은 기회가 많았기에 이를 이유로 유방이 잘못된 감정적 판단을 막을 수 있었다.
유방은 곧 숨을 거두었고, 이후 혜제가 즉위하게 되었다.
5. 최후[편집]
한혜제 2년(기원전 193년), 소하가 병에 걸려 죽을 날이 다가오자 혜제가 소하를 찾아와서 차기 재상을 물었다. 황제께서 더 잘 알것이라던 소하는 "조참이 어떤가?" 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황제께서 좋은 재상을 얻었으니, 소하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소하는 전답과 가옥을 살 때는 항상 외딴 벽지에 마련했는데, 집을 지을 때는 담장을 세우지 않았다. 소하가 숨을 거두면서 남긴 말은 이러하였다.
나의 후대가 현명하다면 나의 검소한 면을 배울 것이고, 현명하지 못하더라도 권세있는 사람들에게 빼앗기지는 않으리라!
소하는 본래 조참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해서 그와 몹시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유방에게 잘 보이겠다고 100조참<1소하를 주장한 악천추 탓이다 소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참은 "내가 상국이 되겠지." 하고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짐을 꾸렸는데, 진짜로 황제의 사자가 곧 조참을 부르러 왔다. 상국으로 임명되고 난 조참은 일이라고는 눈꼽만큼도 하지 않고 놀기만 했는데 혜제에게 설명한 이유가 폐하도 선제보다 못하고, 내 능력도 소하에 미치지 못하는데, 소하가 한 그대로만 하면 무슨 문제가 있겠나?라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의문을 가지던 혜제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납득했다.[17] 여기서 유래된 것이 바로 소규조수의 고사이다.
6. 평가[편집]
살아 있는 쇼미더머니
전쟁에서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인물
《사기》 '소상국세가'에서는 소하가 죽고 난 후에도 황실이 소하의 후손을 찾아 작위를 잇게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소하가 이룩한 공훈은 다른 공신들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고 컸기 때문이었다.
위에 나온 일화들을 정리해보자. 그의 마스터플랜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유방을 조직의 수장으로 추대하고, 한신의 출중함을 알아보고 그를 대장군으로 추천하는 등 주요 인사관리는 모두 소하의 공적이다. 함양을 점령했을 때 승리에 도취된 유방의 무리들과 달리 오직 소하만이 지리와 인적 사항 등 정보를 수집했다. 파촉으로 몰려, 진의 장수들과 항우의 군대가 유방의 세력을 끝장낼 수 있는 위기 상황에서 모두가 결사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부르짖을 때도 역시 오직 소하만이 흥분한 조직을 평정하여 위기를 극복해냈다. 관중에 대기근이 들어 아무런 일이 없어도 나라가 휘청거릴 상황에서 항우라는 막강한 적까지 엄습하고 있음에도 소하는 언제나 병력을 채우고 병장기와 식량, 마초를 보급해냄과 동시에 한나라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냈으며, 이렇게 매번 깨지면서도 다시 싸우게 되는 유방의 군세에 결국 항우는 무너진다. 항우에게 결정타를 날린 것은 한신이었지만, 결국 항우를 이긴 것은 소하인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통일 이후 법령을 세우고 행정을 완비하는 등 국가 실무 기반 또한 소하의 공적이다. 한신의 죽음에 소하가 관여되었다는 것 또한 공신이 국가에 미치던 해악이 모든 역사에서 입증되었듯이 소하의 선견지명이라 볼 수 있다.
다만, 역설적으로 그런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초한지 같은 소설에서 소하의 활약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실제 사기나 한서 같은 정사의 기록에서도 소하는 한신같이 군대를 이끌고 추풍낙엽으로 적을 무찌르거나, 장량처럼 계책을 내 전략을 수립하지도 않아 기록도 이들보다 분량이 적다. 심지어 사기에서 조참보다도 기록의 분량이 적었다가 한서에서 파촉으로 쫓겨난 유방이 항우와 일전을 치르려는 걸 말리는 대목을 추가해 조참의 기록과 겨우 분량이 비슷해졌을 정도다. 그러나 소하는 그런 영웅들의 화려한 전설 뒷편에서, 그 영웅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묵묵히 마련해주었다. 삼진을 평정한 한신의 공에는 파와 촉에서 물자를 끌어올린 소하의 공훈이 있었다. 유방은 팽성의 싸움에서 유례없는 대패를 당했으나 소하의 보급에 힘입어 궤멸적인 패배를 극복했다. 유방과 항우 최후의 광무(廣武) 대치 당시에 이으러선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항우 측이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자고 반쯤 애원하는 것을 유방이 코웃음치며 비웃게 될 정도였다. 항우는 그 이전까지 유방을 수차례 격파했지만, 소하의 보급이 이어지면서 결코 유방에게 결정타를 먹이지 못했다.
천하가 통일된 후에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소하는 관중을 지키며 그 기반을 든든하게 했다. 또한 한신의 반란을 사전에 차단했고,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경거망동도 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다른 공신들이 주살되는 와중에서 몇 번을 의심받으면서도 천수를 누렸다. 서한삼걸 중 소하는 가장 튀지 않는 일생을 살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일생은 영광된 일생이었다.
사마천은 소하에 대해 이렇게 평론을 남겼다.
백성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여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제공했다. 한신(韓信), 경포(黥布) 등 한나라 창업공신의 대부분은 주살되었으나, 소하가 이룩한 공적만은 찬란히 빛나 그의 지위는 공신 중에서 제일 높았으며, 그 명성은 후세에까지 전해져 주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일으킨 굉요(宏夭)와 산의생(散宜生)[18] 등이 이룩한 공적과 비견될 만하다고 하겠다.
7. 후손에 대한 한나라의 우대[편집]
혜제 2년 소하가 세상을 떠나자 적자 소록이 차후의 작위를 세습했다. 그러나 나중에 아들이 없어 소하의 직계 후손은 끊기고 서자의 후손인 방계 후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차후를 세습한 소하의 방계에 해당하는 후손이 죄를 지어 작위를 박탈당하고 5번이나 후사가 끊기면서 한나라 조정은 그때마다 소하의 후손을 찾아서 후로 봉하여 작위를 잇게 했다. 이러던 중 봉국이 패군의 차(酇) 땅에서 남양군의 찬(酇) 땅으로 바뀌어, 작위명도 차후에서 찬후로 바뀌었다.
서한 내내 이어진 찬후의 작위는 왕망이 집권하면서 소향후(蕭鄕侯)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폐지되었는데, 동한이 들어선 후 장제가 소하의 후손인 소웅에게 다시금 찬후의 작위를 봉하니 이는 유방의 공신들 중에서도 그 사례를 찾기 어려운 두터운 은전이었다. 당장 동한의 경우 서한시대에 왕으로 봉해진 유씨들도 동한 수립에 공이 없으면 예외없이 직위와 영토를 박탈하고 사실상 서인 취급했는데 유씨도 아닌 소씨를 일부러 찾아서 작위를 준 것 자체가 특혜다.
8. 관계가 있거나 말거나?[편집]
그의 24대손이라고 자처한 소도성은 남북조시대의 남조인 육조시대 제나라[19]를 건국했다. 또 소도성의 방계 친척으로 소도성의 족제 소순지의 아들로 친척 조카이자 양(육조)을 건국한 소연은 25대손을 칭했다. 즉, 소도성과 소연은 항렬상으로 삼촌과 조카 관계이기 때문이다.
뒷날 거란(요나라)제국의 시조인 야율아보기는 유방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황실의 성인 야율씨를 중국식 성인 유씨로 개성하면서 다른 부족의 성을 죄다 소씨로 바꿨다. 이 뜬금없는 개소리와 희한한 짓거리에 황실과 신하들은 당연히 크게 반발했고 이에 야율아보기는 황제의 성을 야율씨로 환원했지만 소씨는 끝까지 남겼는데 그 이유가 "난 유방은 아니지만 소하를 거느리고 싶다!"라는 이유였다.(…) 그래서 거란 8부족 중 황실 친족인 3부족은 야율씨를 썼고 나머지 5부족은 죄다 소씨가 되어 버렸다. 거란의 인물들(고려에도 쳐들어온 소배압, 소손녕 등)이 야율씨 아니면 소씨를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하는 죽은 후 졸지에 수많은 거란인 후손을 입양하게 되었다(…).
9. 대중문화 속의 소하[편집]
모토미야 히로시의 적룡왕에서도 전체적인 이미지는 비슷하다. 등장인물 소개에서는 유방의 소꿉친구라고 나온다. 번역 문제로 "게릴라"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장면은 유방이 함양에 입성했을 때 함양의 많은 재물과 미녀들을 보고 광분하자 "용서하십시오"라더니 유방에게 직접 수정펀치를 날린다! 그 후 바로 유방의 욕심에 대해 간언하고 함양에서의 약탈 등의 불상사를 막는다. 그리고 갑옷을 입고 있는 장면도 제법 나오며 한신의 삼진 제압전에서는 직접 칼을 들고 적을 베는 장면이 있다. 이 작품의 소하가 아마 미디어 속의 소하 중 제일 터프(…)하게 묘사된 소하일 듯. 어쨌든 중반까지는 제법 얼굴을 비추지만 수수에서 박살났다가 물자를 보충해 줄 때 즈음해서 공기화되고 만다. 안습. 후방보급담당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영화 초한지: 영웅의 부활에서 장량과 틀어지게 된 계기가 한신의 토사구팽으로 나온다. 끝까지 한신을 살려두고 공적을 기리려 했던 소하와 달리 장량은 살기위해 결국 여치에게 붙어서 토사구팽 작업을 도와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소하도 결국엔 여후에게 굴복하여 한신을 제거하는데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한신이 여후의 계락으로 죽자 시신을 안고 통곡한다.
(항유기의 소하)
코에이의 초한지 기반 게임인 항유기에서는 이 게임 자체가 내정이 간략화된 편이라서인지 크게 눈에 띄는 장수는 아니다. 특히 다른 한삼걸인 장량과 한신의 굇수같은 능력치에 비하면 소하는 90을 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지못미. 다만 통솔이 78이라서 저 정도면 내정에서 굴릴 정도는 된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등장. 먼치킨스러운 능력을 보였음에도 그보다 더 먼치킨스러운 관이오의 존재로 시리즈 내내 정치력 100을 마크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정치력이 우수하여 내정에서 뛰어난 면모를 발휘한다. 또 지력도 80대 중반이라서 계략을 써도 되는 내정가. 아무리 지력 80중반이고 정치력이 높지만 전투 능력치가 낮아서 거의 전투에서 볼수가 없고 지력이 90대가 아니라서 계략이 낮은 편이다. 그래도 좋은 내정가므로 잘 활용하자.
삼국지 9PS2판에서 신무장 이름을 숙아로 쳐야 나온다. 능력치는 58/21/86/98 지식모략이 1개이며 책략이 2개만 가지고 있다. 어째선지 후속작인 삼국지 10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9편에 등장하지 못한 팽월, 포숙이 추가되었다. 서한삼걸 중에서 소하는 10편에서 나오지 못했다.
삼국지 11에서 다시 등장했다. 능력치는 21/17/86/98/89의 순욱의 하위호환이다. 특기는 화려한 명성에 비해 수수한 느낌을 주는 둔전.
삼국지 12에서는 31/27/86/98 병종은 창병. 전법이 전군색적이지만, 군사 특기를 가지고 있어서 비책이 사용이 가능하다.
삼국지 13에서도 여지없이 등장. 보급계의 원조답계 셔틀 1위의 그분이시다. 능력치는 31/27/86/99 고대 무장들중에서는 두번째로 정치력 2위다. 특기도 9짜리가 무려 3개이고 쩔어주는 능력자이기는 하나 아쉽게도 중반 이후부터는 후방에 배치되어 농지와 시장 셔틀로 전락하고 만다. 전법은 군략지원에 중신특성도 원정보좌. 군략지원이라는 전법 자체는 나쁘지는 않고 의미상으로는 소하에게 걸맞지만, 소하의 능력치로는 전장에서 굴려먹기는 영 좋지 않아서 효용성이 나쁘다. 더욱이 같은 한삼걸인 장량이 통솔 70대에 전법까지도 군략지원의 상위호환인 왕좌를 가지고 있어서 더더욱 빛이 바래는 감도 있다. 정 전장에서 굴리겠다면 무력과 통솔이 높은 무장과 인연을 맺은 후 이들을 소하의 부장으로 편성해서 출전시키자. 특기는 농업9 / 상업9 / 설파9 / 문화5 / 교섭7 / 언변7 억지로 전장에서 굴리는 것보다는 특기도 특기거니와 중신특성도 내정관련이니 군주내정중신을 맡겨서 사용하는 쪽이 훨씬 낫다. 다만 저 화려한 내정특기조차 장량 또한 전부 가지고 있기에 서글프다.
샐러리맨 초한지에서는 천하그룹의 이사역할로 나온다. 그런데… 정말 이게 소하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슬프게 나온다. 나의 소하는 이렇지 않아!! 진시황한테 40년동안 짬쳐먹고 이거밖에 못하냐며 까이고 딱히 능력도 보여주는 면이 없어서 그냥 눈물만 나온다.
9.1. 초한전기[편집]
kbs 방영판 성우는 故오세홍
초반부터 유방과 친분이 있던 관리답게 서한삼걸중 제일 첫번째인 1화에 등장한다. 유방과 친분이 있기에 사고를 치면 뒷처리를 해주고 있었으며 유방이 여치와 혼례하는데도 도움을 주는 등 여러모로 유방에게 도움을 준다. 진나라의 무리한 부역을 어쩔 수 없이 행하게 하자 유방에게 미안해하고 유방도 자신이 죽거든 자기 가족의 뒷일을 부탁할 정도로 신분을 넘어서 친분이 깊게 나온다. 1화에 술을 먹고 돈을 때먹고 도망가서 유방과 그 동생들에게 붙잡혀서 두들겨 맞은 사람이 사실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였는데, 일단 술을 먹이고 달래서 보낸 것 까진 좋았는데 이 사람이 조참에게 죽었는데 사실 소하가 지시한 것이었다.[20] 이 때부터 소하는 유방의 뒤를 봐주면서 도와주던 것이었다.
유방 일행이 망탕산에 가서 어려움을 겪자 패현의 현령을 설득해 유방 일행을 다시 받아들이라고 조언하지만 실패하고 이를 좋지 않게 여긴 현령이 죽이려 하자 도망을 가 도망자 신세가 되고만다. 그리고 망탕산에 가서 유방과 같이 반란을 일으켜 패현을 점령, 자신을 그곳의 우두머리로 추대하려는 마을 원로들을 설득시켜 유방을 패공으로 추대하게 된다.[21] 이때부터 유방에게 존칭을 쓰며 장량과 한신이 없는 초반 유방군의 책사 역할을 하게 된다.
유방이 항우군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보급을 맡기 시작한걸로 보이며 장량이 들어오고 나서도 유방 곁에서 조언을 하고 있으며 진나라 수도인 함양을 점령하자 다른 장수들이나 주군인 유방이 정신 못차리고 놀고 있을때 진이 가지고 있던 모든 행정 문서를 챙기는 비범함을 보여줬다. 덕분에 항우가 유방을 한왕으로 봉해 벽지인 파촉 땅으로 내칠려고 할때도 번쾌를 비롯한 부하 장수들은 죄다 반대를 했지만 소하가 "내가 진나라의 행정문서를 살펴본 결과 파촉땅은 전란에서 벗어나 있고 산세가 험해 방어하기 딱 좋으니 우리에게 제격이다" 이런식으로 말하면서 모두를 할말없게 만들어버렸다.
전반적으로 소속과 입장을 초월해 움직이는 느낌을 주는 장량(일단 장량은 한왕의 소속으로 완전히 유방 소속은 아니다)에 비해, 이 쪽은 완전한 유방군의 2인자라는 느낌. 유방과 그 휘하 장수들간의 의견 조율에 힘쓰고, 충직하게 유방을 모시면서 역사 그대로 굳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성과를 내기에 유방도 그 휘하 장수들도 모두 그를 매우 신임하고 있다. 유방이 소하를 대할 때와 다른 장수들을 대할 때의 태도나 말투차이만 봐도, 유방군 안에서 그가 가진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 일단 내부에 불만이나 문제가 생기면 다들 소하부터 찾는다.
다만 '상황이 안 좋게 변함 → 유방 고민 → 휘하 장수들이 우우거리며 반발 → 소하가 장수들에게 '이러지 말라능, 좀 기다려 보라능'이라며 중재 → 장수들이 "뭐 소하횽이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야…"라며 진정하는 패턴'이 극중에서 자주 연출되기 때문에, 가운데 끼어서 전전긍긍하는 중간 관리직의 모습같다고 하는 목소리도 있다. 허나 이 또한 그만큼 소하의 높은 덕망과 위치를 보여주는 연출적 장치이다.
한동안 출연이 뜸하다 66화에서 함양 전투 이전 보급로가 끊어졌을 때, 군량 걱정을 하던 유방은 "군량은 소대인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에 모두가 수긍하며 등장하지 않아도 존재감을 나타내며 결국 같은 회 간만에 모습을 나타내는데, 이때 유방은 진평의 이간계를 위한 자금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국고에서 금자 4만냥을 빼냈었다. 소하는 "대왕께서 4만냥을 빼가셨는데…"하며 유방을 추궁하자 왕인 유방마저도 쩔쩔매는 모습으로 위엄을 보인다. 그거 모으느라 힘들었지만 어짜피 그 돈은 대왕의 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왕인 유방을 갈구는 모습은 역시 소하라며 탄복을 할 수 밖에 없는 장면.
마지막회에서는 한신을 죽이려는 여후를 도와 유인하고, 이 일로 제거당할까봐 조참에게 자신은 곧 체포될테니 그 때 횡령죄로 탄핵해달라고 한다. 결국 유방이 고향에서 조씨에게 "소하가 탐관이 됐다." "그래도 탐관이 낫다. 야심은 없으니까."라 하여 옥에 갇혀도 죽을 위기는 모면했지만, 여기까지만 나오기 때문에 이 드라마만 본 사람은 소하가 그렇게 물러난 것으로만 알지도 모른다.(…) 위키러들은 그러지말고 이 항목 상단의 실제 일생을 잘 읽어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