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8·26 ~ 10·7·2015

석굴암

배중진 2015. 9. 18. 03:33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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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북위 35° 47′ 42.2″ 동경 129° 20′ 58.7″ / 북위 35.795056° 동경 129.349639° / 35.795056; 129.349639

석굴암과 불국사*
Welterbe.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Korea-Gyeongju-Seokguram-12.jpg
석굴암 입구
영어명*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프랑스어명* Grotte de Seokguram
et temple Bulguksa
등록 구분 문화유산
기준 Ⅰ, Ⅳ
지정번호 736
지역** 아시아·태평양
지정 역사
1995년  (19차 정부간위원회)
웹사이트 석굴암 공식 홈페이지

* 세계유산목록에 따른 정식명칭.
** 유네스코에 의해 구분된 지역.

경주 석굴암 석굴
(慶州 石窟庵 石窟)
대한민국국보
Seokguram Buddha.JPG
지정번호 국보 제24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873-243
(진현동 999)
제작시기 통일신라시대(남북국시대)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있는 석굴(石窟)로서 국보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석굴이며,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조립·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역사[편집]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서[1]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하여 석불사가 현재의 석굴암으로 여겨지고 있다. 석불사에는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한다. 그 뒤로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 중수하거나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고, 정선은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보수공사[편집]

일제강점기, 1912~1915년에 걸쳐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공사가 있었다. 첫 번째 수복때 석굴암은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 천장이 새서 불상에 직접 비를 맞고, 주변의 불상의 배치도 불분명했으며 전체의 반이상이 흙에 파묻혀 있었다. 최초의 보수후에 비가 새는 것이 발견됐고, 그 후의 보수에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복원공사는 석굴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건축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덮어버렸기 때문에 외면상 수리는 되었지만, 석굴암을 복원불가능한 형태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본존불 아래, 석굴내 지하수가 모여 밖으로 배출되는 수로장치는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장치로, 일본인들이 이것을 막아버렸기때문에 지하수로 차가워진 돌에 수분이 맺히는 현상이 발생했다.

해방이후 보수공사[편집]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방치되어 오다가, 1961-1963년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일제가 바른 시멘트로 인해 습도와 온도 유지가 어려워지고, 석굴내에 맺힌 물이 시멘트를 녹여 결과적으로 화강암으로 된 조각상들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의 시멘트 구조물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그 위에 돔을 덧씌웠다.

그리고 이때 외부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 유리로 봉인하고, 습기제거장치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렇게 밀폐된 공간 속에 관람객들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와 이물질이 갇혀 화강암을 손상시키는 점이 지적되었다.

1961년에 목조에 기와를 덮은 전실이 설치되었다. 이것 또한 석굴암의 통풍을 막는 요소라고 지적되고 있다.

2011년 현재, 입구는 유리로 봉해져 실내의 습도가 항상 조절되고 있지만, 일반 방문자는 석굴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

구조[편집]

삼매에 든 고타마 붓다 (석굴암)

방형 전실(前室)을 지나 통로를 지나면 원형 굴이 나타난다. 천장은 돔형으로 밖에서 보면 그 위에 흙을 덮은 모양이다. 너비는 좌우 약 6.7미터, 전후 약 6.6미터, 입구의 넓이 3.35미터로, 치밀한 건축적 계산 하에 설계되어 만들어졌다.

본존불[편집]

석굴암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흰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높이 약 3.4미터의 거대한 불상이다. 석굴 중앙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부좌(趺坐)하였고,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莊重雄麗)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을 하였고,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 이라고 한다.

십일면관음보살상[편집]

본존불 바로 뒤의 벽 한가운데에 반육각(半六刻)한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이 있다. 이 상은 다른 조각품보다 유난히 입체감이 강조되어 있다. 약간 웃음을 띤 표정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천의, 섬세한 손가락과 발가락, 우아하게 높이 설치된 연화좌가 특징이다.

전실의 팔부신장상과 인왕상[편집]

전실을 들어서면 양쪽 벽에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있으나 내부의 것에 비해 그 수법의 정교함이 덜하다.

금강역사상[편집]

통로 입구 양 옆에는 인왕(仁王) 혹은 금강역사 한 쌍이 석굴 입구를 지키고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하여 금강역사라 칭했다.

통로의 사천왕상[편집]

입구 통로, 즉 비도(扉道)의 좌우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각 2개씩 반육각되어있다.

천부상 (대범천과 제석천)[편집]

범천(梵天)·제석천(帝釋天)이 반육각되어 있다.

보살상[편집]

범천과 제석천 옆으로 각각 경권을 든 문수보살과 잔을 든 보현보살 부조가 있다.

10대제자상[편집]

석굴 벽면에 십나한(十羅漢)상이 있다.

감실제상[편집]

10대제자상 위로 벽의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속에 작은 부조상을 하나씩 안치하였다. 그 중에는 1체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7체의 보살상이 있다. 두 개는 지금 비어 있는데, 대한제국 때 일본 사람이 반출하였다고 전한다.

천장 및 기타[편집]

천장은 돔형으로 되었고 중심에는 연판(蓮瓣)을 새긴 둥근 돌로 눌러놓았는데, 그 교묘한 구조와 우아한 조각은 놀랄 만하다. 그리고 이 석굴암 옆에 보면 굴이 있는데, 이 굴에서 문무왕릉과 연결되는 길이 있다. 보존을 위해 내부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어있다.

설화[편집]

석불(石佛)을 장차 조각하고자 큰 돌을 다듬어 감개(龕蓋)를 만들 때 갑자기 돌이 세 조각으로 갈라져서 분통이 터져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천신(天神)이 내려와 만들어놓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이며, 실제로 원형 연화 광배는 세 부분으로 갈라져있다.

평가[편집]

석굴암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인도 간다라 미술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굴암은 그 구조가 기묘할 뿐만 아니라 본존 및 벽면 조상의 비범한 기술로 보아 신라 시대 예술을 대표할 만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산을 파내어 만든 석굴은 있으나 석굴암과 같은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서울대학교 이주형 교수는 석굴암이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 석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바미얀 석굴과 석굴암은 공통적으로 원형평면 위에 배치가 되어있고 형 천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네모반듯한 전실과, 안쪽 벽에 부조로 새겨진 상, 그리고 위쪽으로 감실이 있고 그 안에 보살상이 있는 점 등이 똑같다. 그리고 이 교수는 바미얀 석불의 원류가 돔 형태의 로마 판테온이라고 주장했다.[2]

논란[편집]

원형이 훼손되기 전의 석굴암

문화재로서의 원형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 본래의 모습에 대한 논란이 있다.[3]

  • 광창 - 석굴암 본존불 앞쪽 천장에 조명을 위한 구멍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 비어 있는 감실 - 비어 있는 2개의 감실에도 불상이 있었는데 반출되었다는 주장이다.
  • 목조건물 - 석굴암 굴 앞에 목조건물이 세워져 있었다는 주장이다.
  • 채색 - 석불에 채색을 했었다는 주장이다.

본존불의 존명에 대한 논의들이 있다.[4]

  • 석가모니불
  • 아미타불
  • 아촉불
  • 비로자나불
  • 대일여래

갤러리[편집]

참고 자료[편집]

  • 《조선보물고적도록》, 조선총독부, 1938년
  • 배경수, 《吐含山 石窟庵에 對한 小考》, 동아대학교, 1977년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이동 일연, 〈大城孝二世父母神文王代〉, 《삼국유사》 권5.
  2. 이동 이주형, 중앙아시아연구 11호 "인도·중앙아시아의 원형당과 석굴암"
  3. 이동 배경수, 《吐含山 石窟庵에 對한 小考》, 동아대학교, 1977
  4. 이동 김리나, <석굴암 불상군의 명칭과 양식에 관하여>, 《한국고대불교조각사연구》,

참고 자료[편집]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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