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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

배중진 2019. 2. 17. 07:40

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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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전적 의미
1.1. 造詣1.2. 早刈1.3. 鑿枘
2.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제
2.1. 개요2.2. 생애
2.2.1. 어머니와 관련된 개인사
2.2.1.1. 원희의 자식?
2.2.2. 명군의 면모
2.2.2.1. 초기 업적2.2.2.2. 제갈량의 북벌을 훌륭히 막아내다
2.2.3. 말년의 사치2.2.4. 말년의 혼란상
2.2.4.1. 황권 약화에 관한 실책
2.2.5. 죽음2.2.6. 평가
2.3. 가족 관계2.4. 기타2.5. 미디어 믹스
3. 후한 말의 장수
3.1. 미디어 믹스

1. 사전적 의미[편집]

1.1. 造詣[편집]

어떤 분야의 지식이나 경험이 깊은 경지에 이르는 것. 주로 "그 사람은 ~에 조예가 깊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전문가 정도의 수준이라고 보면 간단하다.

교수, 박사 같이 해당 분야의 전문 직함이나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쓰는 일은 없으며 어색한 표현이다.
OO 의사는 치과 분야에 조예가 깊다. [X]
OO 의사는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다. [O]

1.2. 早刈[편집]

곡식을 일찍 벤다는 의미를 가진 명사로 조예하다란 동사로 사용이 가능하며 해당 단어의 사용례는 아래와 같다.
1태풍이 자신의 논들을 휩쓸고 지나가자 김아무개는 구술피 울며 물에 잠기거나 쓰러진 벼들을 조예했다.
2그해 곡식 가격이 터무니 없이 폭락하자 농부들은 추수를 기다리던 곡식을 갈아엎거나 조예하며 자신의 한해 농사가 망했다고 한탄한다.

1.3. 鑿枘[편집]

모난 자루와 둥근 구멍이란 뜻으로 두개의 사물이 서로 맞지 않음을 뜻하는 명사로 유의어로 원조방예(圓鑿方枘)가있다.
출처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조예04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조예(삼국지) 문서의 r564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2.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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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무제기(武帝紀)」
2권「문제기(文帝紀)」
3권「명제기(明帝紀)」
4권「삼소제기(三少帝紀)」
5권「후비전(后妃傳)」
6권「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7권「여포장홍전(呂布臧洪傳)」
8권「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9권「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10권「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11권「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12권「최모서하형포사마전(崔毛徐何邢鮑司馬傳)」
13권「종요화흠왕랑전(鍾繇華歆王朗傳)」
14권「정곽동류장류전(程郭董劉蔣劉傳)」
15권「유사마량장온가전(劉司馬梁張溫賈傳)」
16권「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17권「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18권「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19권「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20권「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21권「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23권「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24권「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25권「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27권「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29권「방기전(方技傳)」
30권「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파일:위명제 초상회.jpg
열조(烈祖)
명황제(明皇帝)
태화(太和, 227년 ~ 233년 1월)
청룡(靑龍, 233년 2월 ~ 237년 2월)
경초(景初, 237년 3월 ~ 239년)
조(曹)
예(叡)
원중(元仲)
생몰 기간
205년? ~ 239년 1월 22일
재위 기간
226년 ~ 239년 1월 22일

2.1. 개요[편집]

조조의 손자이자 조비의 장남. (字)는 원중(元仲).

삼국시대 위나라의 2대 황제. 묘호는 열조(烈祖), 시호는 명제(明帝). 나라를 세우지 않았는데도 조(祖)자의 묘호를 최초로 받은[1] 황제이기도 하다.

초기의 업적과 말년의 실정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군주.

재위 초에는 어린 나이에 황제로 등극하였음에도 강력한 왕권으로 정국을 안정화시키고, 촉한오나라의 공격을 수차례 막아내어 위나라가 자리를 잡는 데 공을 세웠다.

반면 말년의 실정은 위나라 멸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사마씨 가문에 병권과 재정권을 몰아주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힘을 제공했고, 누구 아들인지도 모르는 조방을 후계자로 지명하고는 친위세력조차 무능한 자들로 채워서 정치가 갈수록 혼란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비가 위나라 멸망의 시한폭탄을 준비했다면 조예는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 꼴.

그래도 재위 기간 내내 촉한과 오나라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국의 우위를 끝내 지켜냈으니, 묘호에 종이 아닌 조가 붙은 듯하다.[2]

2.2. 생애[편집]

2.2.1. 어머니와 관련된 개인사[편집]

아버지인 조비보다 할아버지인 조조를 더 닮았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들었다. 조예가 태어나자 조조는 조예를 매우 사랑했으며 항상 자신의 곁에 있도록 명령했다. 조예는 태어난 지 5, 6년 후부터 수려한 풍모를 지니고 있어서 조조는 “나의 기반은 너에 이르러 3대째가 된다.”고 하면서 연회가 열릴때마다 동행하였고, 조예를 시중(侍中)ㆍ측근(近臣)들과 함께 있게 할 정도였다. 조예는 학문을 좋아하고 박식하였으며, 법리에 남다른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예는 열다섯 살 때 무덕후에 봉해졌고, 221년에는 제공, 222년에는 평원왕이 되었다.

정사 삼국지에 의하면 조예의 어머니 문소황후는 221년 조비가 곽여왕 및 다른 여인들을 총애하자 이를 원망하였다는 이유로 조비에게 사사되었다.

한편 당대 위나라 사서인 위략은 이 부분을 정사 삼국지와 다르게 서술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제(조예)가 즉위하고 나서 문소황후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음을 추모하고 슬퍼하자 태후(곽여왕)는 우려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문소황후가 죽을 때, 조예를 이부인에게 맡겼다. 곽여왕이 죽자, 이부인은 처음으로 문소황후가 참소(거짓으로 모함하는 말)에 의한 화를 만났고, 시신을 관에 넣는 의식인 대렴을 받지 못했으며,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음을 설명하니 조예는 슬퍼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곽여왕의 빈장을 모두 문소황후의 고사와 똑같이 하라고 명령했다. -위략

즉 위략에 따르면 문소황후는 곽여왕의 참소로 인해 죽은 것이다. 하지만 자세한 정황은 함구되었기 때문에 조예는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완벽히는 알지 못했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죄를 지어서 죽게 되었다고 혼자 생각하며 지내다가 곽여왕이 죽은 후에야 처음으로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정사와 위략 중 어떤 것이 진실을 말하는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자치통감은 위략의 기록을 채택해 곽여왕이 문소황후를 참소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위략의 내용을 그대로 적은 것은 아니고 조예가 곽여왕에게 문소황후가 죽을 때의 상황을 물으니 곽여왕은 우려하다가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부분은 자치통감이 한진춘추의 유사한 내용의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애초에, 문소황후가 주살된 건, 곽여왕이 총애 받아서였고, 초빈할 때는,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덮고, 쌀겨로 입을 막게 하고는, 마침내 곽여왕을 황후로 세워, 명제를 기르게 했다. 황제가 이를 알고는, 속으로 항상 원한을 품고, 자주 울며 문소황후가 죽을 때의 상황을 물었다. 곽여왕이 말하길 “선제께서 친히 죽이신 건데, 어찌하여 나에게 책문하는 것이냐? 또한 너는 사람의 자식이 되어, 죽은 부친을 원수로 삼고 추궁하며, 전 모친을 위해 그 뒤의 모친을 능멸하고 죽일 수 있느냐?” 명제가 노하여, 마침내 그녀를 핍박하여 죽이고는, 칙서로 초빈을 문소황후의 고사처럼 치르게 하였다. -한진춘추

즉 위략의 내용은 조예가 곽여왕 사후에야 진실을 알았기 때문에 빈장을 간소화하는 것으로 복수를 마무리 지었다는 것이고, 한진춘추의 내용은 곽여왕이 죽기 이전에 조예가 이미 진실을 알고 곽여왕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빈장까지 간소화했다는 것이다. 자치통감은 두 기록을 섞어서 조예가 곽여왕이 죽기 이전에 진실을 알고 곽여왕에게 상황을 물으니 곽여왕은 우려하다가 죽었다고 기록했다. 자치통감에는 빈장 관련 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다.

자치통감에는 두 사서의 기록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두 가지 기록에서 더 믿을 만한 부분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자치통감이 두 사서 모두에 있는 빈장 관련 이야기를 왜 덜어냈는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 이야기를 거짓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정사에는 조예가 곽여왕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 없는데 위략에 따르면 조비는 새로 황후로 삼은 곽여왕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조예를 그녀의 아들로 삼아 양육하도록 했다. 조예는 어머니인 문소황후 견씨가 온 정성을 다해 자신을 양육했기 때문에 내심 불편했지만 할 수 없이 곽여왕을 섬기고 곽여왕 또한 자식이 없었으니 조예를 자애롭게 보살폈다. 결국 위략에 따르면 곽여왕은 문소황후를 참소해서 죽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비가 조예를 키우도록 명령하니 조예를 자애롭게 보살피며 연기를 했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조예는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곽여왕과 오랜 기간 잘 지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자신이 섬겨온 새어머니가 사실은 자신의 친어머니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조예가 받았을 정신적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조예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처음으로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기록에서도 추측 가능하다. 명제기에 의하면 235년 3월 곽여왕을 장사지내고 이때 조예는 낙양궁을 크게 고치고 소양전 등을 새로 지으며 심시티에 몰두하기 시작한 기록이 나온다. 궁궐 수축 이외에도 여러 역사서에서 확인되는 조예의 기행들은 이 시점 직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궁궐을 크게 고친 것이 조예의 말년의 사치의 시작점이었고 조예의 심중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다.[3]

정사 삼국지에 의하면 조예의 생모 문소황후 견씨가 부친 조비에게 주살 당했으므로 뒤를 이을 황태자로 세워지지 않았다. 조비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전혀 설명되어 있지 않는데, 이 부분 역시 주석을 참고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주석인 위략에 따르면 조비는 처음에는 조예를 싫어해서 다른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주석인 위말전에 의하면 조비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다음 일화 때문이다. 조비와 조예가 함께 사냥을 나갔는데 어미 사슴과 아기 사슴이 함께 있는 것을 봤다. 조비가 어미 사슴을 활로 쏴 죽이고 조예에겐 아기 사슴을 쏴 죽이게 했다. 그런데 조예가 울면서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의 사정에 비유하여 "폐하께선 이미 어미를 쏘셨습니다. 저는 차마 그 새끼까지는 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조비는 즉시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조예를 기특하게 여겨 태자로 세우기로 결심했다.

226년 5월, 조비는 병세가 위중하자, 조예를 황태자로 삼고 진군, 조진, 조휴, 사마의에게 정사를 보좌하도록 한다. 조비가 죽자 조예가 황제로 즉위한다.
2.2.1.1. 원희의 자식?[편집]
조예가 조비가 아닌 문소황후 견씨의 첫 남편이었던 원희의 자식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김운회 등은 "삼국지 해제"에서 이 "원가의 복수설"을 정설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정사 삼국지 명제기에 따르면 조예는 239년에 죽었고 이때 나이는 36세였다. 이를 바탕으로 역산을 해보면 조예는 204년생이 된다. 조조가 업성을 무너뜨린 것이 204년 8월의 일이었기 때문에 조비가 업에 있던 원희의 처 문소황후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문소황후가 이때 바로 조비의 아들을 임신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가 204년에 출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조예가 204년생이 맞는다면 조예는 절대로 조비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이에 대해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조예가 205년생이라는 의견을 적었다. 배송지는 조비와 문소황후가 업성이 함락된 204년 8월에 바로 결혼했기 때문에 조예가 205년생이고 36세는 잘못된 계산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명제기의 다른 기록을 보면 조예는 15세에 무덕후가 되었다. 그리고 문제기에 따르면 조예가 무덕후가 된 것은 220년이다. 따라서 이것을 바탕으로 역산을 해보면 조예는 205년생이 아니라 206년생이 된다.

노필이 지은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자료가 있는데 220년 이전에 조예가 이미 무덕후가 되었다는 자료 또한 존재한다. 어떤 자료가 맞는지 알 방법이 없으므로 조예가 정확히 몇 년 생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노필은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가 조예의 나이를 36세로 왜곡한 이유는 조예가 원희의 자식임을 몰래 알리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4] 그 증거로 조비가 조예의 어머니인 문소황후를 살해한 점, 그리고 조비가 조예를 싫어하여 오랫동안 태자로 세우지 않은 점을 들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우선 조조가 조예를 예뻐해 주었다는 것이 있다. 조예가 원희의 아들이 맞고 조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조조 또한 조예가 조비의 아들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조가 그 아이를 예뻐하고 항상 자신 곁에 두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에 대한 재반론으로 조조는 원소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으며, 문학적 감수성 또한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원소의 손자를 자신의 손자처럼 대한 것이라 주장하는 의견도 있지만 설득력이 높지는 않다. 게다가 재반론을 받아들인다 쳐도 또 다른 반론도 존재한다. 조예가 원희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부정하는 또 다른 논리는 그 당시는 혈통을 중시했기 때문에 원희의 아들은 절대로 조비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조비가 조예가 자신의 친자가 아님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면 그 아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낮다. 따라서 조예가 원희의 아들일 가능성도 낮다.

그렇다면 조예의 나이를 왜곡한 진수의 진짜 의도는 무엇인지가 문제되는데, 진수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조예의 나이를 가지고 장난질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최소한 그 당시에 조예가 조비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 정도는 있었기 때문에 조예의 나이를 36세로 왜곡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측이 맞는다면, 진수가 조예의 나이를 왜곡한 이유는 노필의 말대로 조예가 원희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에 조예가 조비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소문을 조비도 알고 있었다고 본다면, 조비가 문소황후를 죽이고 조예를 오랫동안 태자로 세우지 않은 이유는 조예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2.2.2. 명군의 면모[편집]

우여곡절 끝에 겨우 황제에 올랐지만 조예는 전반적으로 명군의 면모를 많이 보여주었으며 상당히 자질이 있는 군주였다.
2.2.2.1. 초기 업적[편집]
조예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주살당하자 스스로도 위협을 느꼈는지 조정 대신들과 교류하지 않고 오로지 책읽기에만 몰두하였다. 조비 역시 처음에는 조예를 싫어하여 죽기 직전에야 그를 태자로 세웠기 때문에 대신들도 조예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즉위한 후에는 유엽만이 조예를 알현하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신들이 궁금해하자 유엽은 '진시황한무제의 범주이지만 자질은 미약하여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오.' 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제갈근전에 따르면 조비의 뒤를 이어 새로 즉위한 조예가 선정을 펼친 덕에 위나라가 더욱 안정되어 조조 때보다도 더 정벌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육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은 손권이 제갈근에게 편지를 보내 "조비가 대업을 계승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많은 상태였으며 .. (중략) .. 지금 조예는 유약하여 사람들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있소. .. (중략) .. 아래있는 자들은 이익을 다투게 될 것이고, 나이 어린 군주는 제어할 수 없을 것이오." 라고 말했다. 할아버지 조조와 천하를 다툰 손권의 입장에서 어린 조예는 햇병아리에 불과했을 것이며 조비처럼 억센 신하들을 휘어잡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5] 위에서 말했듯이 위나라 신하들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몰랐는데 오나라의 손권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지만 조예는 황제가 되자 손권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조비가 죽은 지 불과 3달 후, 손권은 조예를 우습게 보고 군대를 이끌고 강하군을 공격했다. 신하들은 모두 놀라며 군대를 보내자고 건의하였지만 조예는 “손권은 수전에 익숙한데, 감히 배에서 내려 뭍에서 공격하는 까닭은 (우리가) 대비하지 못한 것을 엄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오. 지금은 문빙과 서로 대치하고 있으며, 공격이란 수비하는 세력보다 두 배는 있어야 하므로, 끝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라고 말했다. 이보다 앞서 치서시어사 순우를 보내 변방(병사들)을 위로하고 있었는데, 순우가 도착하여 강하군에서 지나가는 현마다 징발한 군사 및 따르는 보병과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산에 올라 횃불을 들자(병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는 것) 손권은 물러나 달아났다.

228년 봄 정월, 촉나라를 배신하고 위나라로 귀순한 맹달은 자신을 총애하던 조비가 죽자 다시 제갈량과 내통하여 위나라를 배신하려 했다. 배신자를 우대한 조비의 안목 이에 사마의가 신성으로 출진하여 8일 만에 도착하고 포위한 지 16일 만에 속도전으로 결착을 보았다. 위략에 따르면 사마의가 맹달의 대장 이보와 맹달의 조카 등현을 유인하자, 등현 등은 성문을 열고 군대를 맞아들였다. 맹달을 참수하여 수급을 보내오니 낙양의 번화한 길에서 머리를 불태워 버렸다.[6]

이후 조예는 먼저 조비가 조예의 옆에서 정사를 보좌하도록 한 4명의 대신 중 진군을 제외하고 조휴는 회남으로, 조진을 관중으로, 사마의를 완성으로 각각 보내 한 지방의 임무를 맡기고 정치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조비 시대 구품관인법으로 문벌중시 경향이 생기면서 성행하기 시작한 우아한 말투와 고상한 자태를 뽐내는 실속 없는 무리들을 모두 면직시키고[7] 다시는 등용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으며 청담론을 멀리 하고 경전을 학습하게 하였다.

또 가혹한 형벌을 느슨하게 하여 사형에 관한 법령 조문을 검토하고 많은 부분을 삭제하였으며, "항상 재판이란 천하의 생명에 관한 일이오" 라고 말하며 큰 재판이 있을 때마다 방청할 만큼 법리에 관심이 많았다. 229년에는 사공 진군과 산기상시 유소 등에게 한대의 법률을 정비하여 신법률을 제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적전 의식을 행하여 농업을 권장하고 적전에서 스스로 밭을 갈았으며 관의 창고를 열어 자립할 수 없는 자들을 구제하였고 233년에는 자립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해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여러 번 순시를 하며 과부, 고아, 아들 없는 노인을 위문하고 곡물과 흰비단을 하사했으며 조비 시대의 부세와 부역을 줄였다.

참고로 문제기를 통틀어 딱 한 번 나오는 홀아비, 과부, 고아 등을 구제했다는 구절을 가지고 조비가 홀아비, 과부, 고아 같이 힘든 사람들을 위한 복지 정책을 편 명군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명제기에는 똑같은 정책이 두 번 언급된다. 적어도 그런 주장에 의하면 조예는 조비보다 두 배는 명군이었던 셈. 이런 구휼책은 기본적으로 임금이라면 당연히 시행하는 것이지 조비나 조예만의 작품도 아니다.
2.2.2.2. 제갈량의 북벌을 훌륭히 막아내다[편집]
초기 업적에서 보듯이 조예는 내치에서도 굉장히 뛰어났다. 하지만 조예의 진정한 가치는 그의 군사적 업적에서 드러난다. 조예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진시황과 한무제에 비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릉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유엽은 멀리 있는 촉을 쳐봐야 유비는 군대를 돌리면 그만이니 먼저 가까이 있는 오를 촉과 함께 멸망시키면 혼자 남은 촉 또한 쉽게 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촉과 함께 오를 치자고 권했으나 조예의 아버지 조비는 손권이 보물을 바치며 거짓으로 항복하자 이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 이후 이릉대전을 승리한 손권이 태도를 바꾸자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여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심지어 이때는 유엽도 반대했다) 전쟁에 승리하여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오나라를 공격하는 상식 밖의 전략을 보여주고 이기지도 못하였다. 조비는 이릉대전 때 스스로 유비가 병법을 모른다고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자신이 오나라를 침공했을 때 서성이 급하게 만든 가짜성에 속아 후퇴했을 정도였다. 이는 조비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할 시기와 하지 말아야 할 시기를 구분하는 식견도 부족하고 막상 전쟁에 임하고 나서 이를 수행할 전략도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조비가 일관되게 오나라만 침공함으로써 촉나라도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었고 오나라도 위나라의 적이 되었는데, 조비는 곧 죽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그 뒤를 이은 어린 황제 조예가 이 두 나라의 침공을 홀로 막아내야 했다는 것이다. 위나라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하지만 조예는 군사적 재능에서 조비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고 그것은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조비가 오나라를 치는데 국력과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촉나라는 충실히 내실을 다져 이릉대전에서의 패배를 극복하고 국력을 회복했고 위나라를 선제공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228년 제갈량의 1차 북벌이 시작되었다. 촉나라의 대장 제갈량이 국경을 침입하자 천수, 남안, 안정 삼군의 관리와 민중이 위나라에 모반하고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이렇게 되자 조정의 신하들은 당황해서 무슨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몰랐는데, 조예가 먼저 신하들을 안심시키며 말하기를 "제갈량은 산을 거점으로 굳게 지키다가 지금은 스스로 왔으니, 이는 병서에서 말하듯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술과 합치되오. 하물며 제갈량은 삼군(三郡 : 천수, 남안, 안성)을 탐하여 전진할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니, 이제 이 때를 이용한다면 그를 쳐부수는 것은 필연적이오.” 라고 했다. 그래서 병마를 정비하고,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동원하여 제갈량을 막아냈다. 조예는 대장군 조진을 파견하여 관우(關右 : 관중 지역)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일제히 군대를 진격하도록 했으며, 우장군 장합을 가정으로 파견하였고 또한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몸소 장안으로 진주하여 가정에서 제갈량을 크게 격파시켰다. 제갈량이 패배하여 도주하자, 삼군이 평정을 되찾았다.

놀라운 부분은 이때 위나라 조정 내에도 조예의 적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위략에 따르면 이 당시 조예가 죽었다는 참언이 돌았고 그 소문을 들은 군신들은 놀라서 옹구왕 조식을 영접하려고 했다. 수도에서는 할머니 변 태후(무선황후)와 여러 공들이 모두 두려워했고 계모는 두려워하지 않은 듯? 조예가 돌아오자 얼굴을 살폈다. 무선황후는 조예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발설자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이에 조예가 말하기를, “세상의 말이 모두 이러하거늘 어찌하여 찾으려고 하시오?”라고 하며 그만두게 했다. 이 당시 위나라는 국가적 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소문을 내며 나라를 뒤흔드는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안팎으로 적들이 날뛰는 불안한 상황에서도 조예는 뛰어난 능력으로 이를 극복해 냈다.

1차 북벌도 훌륭히 막아 내었지만 촉과 오의 동시 북벌이었던 234년 제갈량의 5차 북벌 때[8] 그 역량은 빛을 발했다.

234년 오장원 전투 때 촉나라와 오나라의 양면 공격이 시작되었다. 손권은 촉과 위나라가 접전을 벌이고 있으므로 조예는 정신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자신은 손쉽게 공격하여 많은 수확을 얻고자 했다. 정동장군 만총이 군대를 인솔하여 나아가 이들을 방어했다. 만총은 신성의 수비를 철거하고 적군을 수춘까지 유인하려 했는데, 조예는 허락하지 않았다. 조예는 촉나라가 지형상 식량 보급이 불리함을 이용하여 사마의에게 절대로 싸우지 말고 무조건 지키키만 할 것을 명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한 광무제는 군대를 파견하여 멀리 약양을 점거하고 끝내는 외효를 격파하였으며, 선제는 동쪽에 합비를 두고 남쪽에 양양을 지키게 하고 서쪽에는 기산을 지키게 하였는데, 적군이 이 세 성 아래에서 격파된 원인은 이 세 성 모두가 반드시 다투는 요새이기 때문이오. 설령 손권이 신성으로 공격해 온다고 하더라도 함락시킬 수 없을 것이오.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니 수비를 굳게 하면 내가 장차 직접 가서 그들을 정벌할 것이지만, 내가 도착할 때면 손권은 아마도 도주했을 것이오." 그리고 조예는 위나라 대다수의 군대를 사마의에게 주고 자신은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직접 용주를 타고 동쪽으로 정벌하러 가는 배짱을 보여주고, 조예가 도착하기도 전에 손권은 도주하였다. [9] 손쉽게 이득만 챙기려 했던 손권의 의중을 조예는 완전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때 만총의 의견대로 신성을 버렸다면 위나라는 이를 다시 되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장군들의 계책보다 젊은 황제의 계책이 더 뛰어났던 것이다.링크

한편 이 때 대신들은 대장군 사마의가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 군사와 대치하고 있어 승리가 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조예에게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장안으로 가서 사마의를 후원해 줄 것을 건의하자, 조예는 “손권이 도주했다면 제갈량은 담(膽)을 이미 격파했을 것이고, 대장군은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근심할 필요가 없소." 라고 장담했다. 그 말대로 제갈량이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지만, 사마의는 조예로부터 지원 받은 많은 병력을 바탕으로 성채를 굳게 지키기만 하고 대응하지 않았다. 때마침 제갈량이 질병으로 죽자, 촉나라 군대는 후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조예는 병법을 모르는데 조예 따위를 걱정하겠느냐 '라고 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조예는 사마의에게 싸움에 응해주지 말고 시간을 질질 끌라고 명해 제갈량은 장기전에 돌입했고 장기전 끝에 그가 병에 걸려 사망하자 북벌은 종료 되었다. 이것을 지시한 사람은 조예인데 어처구니 없게도 모든 것이 사마의의 공으로만 알려져 있다. 조예는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었고 군사작전을 친히 통솔하였으며 그의 지략을 신하들이 존경하고 탄복했다. 단순히 위나라가 강국이라서 북벌을 막아 낸 것이 아니라 조예의 식견과 결단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제갈량의 북벌을 훌륭히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사망한 후에는 적극적인 대외 정벌에 나서서 가비능을 암살하고 선비족을 축출하며, 서쪽으로는 다시 삭방군을 설치하고 동쪽으로는 사마의의 공손씨 정벌로 요동까지 직접적인 통치하에 두게 된다. 요동 정벌 이전에 조예는 대신들과 상의하여 사마의에게 병사 4만 명을 내주려고 했는데, 의론에 참여한 대신들은 모두 4만 명을 보내는 것은 너무 많으며 싸움에 소용되는 비용을 제공해주기가 어렵다고 주장하자, 조예는 이렇게 말했다. “4천 리 멀리 적군을 토벌하러 가는데, 비록 뛰어난 계책을 사용한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야 마땅하니 전쟁 비용을 계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는 4만 명을 출정시켰다.사마의가 요동에 도착할 무렵, 폭우가 계속 쏟아져 즉시 공격할 수 없었으므로, 대신 가운데에는 사마의가 공손연을 빨리 격파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명령을 내려 사마의를 귀환시키도록 하자는 자가 있었으나, 조예는 듣지않고 말했다. “사마의는 위기를 만나면 변화에 대응하여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이니, 공손연을 사로잡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마의는 곧 공손연을 격파하니 이런 것들이 결국은 조예의 예측과 같았다. 즉 이러한 조위의 성공적인 팽창은 엄연히 조예의 뛰어난 전략적 식견과 내치에 힘입은 결과였다.[10]

2.2.3. 말년의 사치[편집]

잘하다가 말년에는 갑자기 정신줄을 천국에 고이 모셔놓고 왔는지, 지름신심시티만 남아 사치를 좋아하는 결점이 두드러졌다. 명제기에 따르면 235년 3월 문덕곽황후를 장사지내고 이때 조예는 낙양궁을 크게 고치고 소양전 등을 새로 지었다. 간언하는 신하들이 이를 시정해줄 것을 요구했고 비록 조예가 그 간언을 듣지는 않았지만 항상 신하들에게 너그러웠다. 대신들에게는 너그러웠지만 조예는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켜 궁전을 크게 짓고 후궁들을 많이 거느렸다.[11] 조예 후반기 치세의 문제는 황후가 죽고 장마가 들어 기주에선 사람과 재물이 떠내려가는 물난리가 나자 보다 못한 고당륭이 올린 상소에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전략)...지금 천하는 빈곤하고 황폐하며, 백성들은 1석도 비축한 것이 없고, 나라에는 1년을 버틸 만큼 비축한 것이 없건만, 밖으로는 강한 적이 있어 폐하의 군대가 국경에서 싸우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토목 공사가 한창이라 주와 군에 이르기까지 온통 소란하오니, 이러다 적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신하와 백성들이 명을 받들어 맞서 싸우지 못할까 두렵사옵니다. 또한 지금 장수와 병사들의 봉록이 눈에 띄게 깎이어 예전과 비교하면 5분의 1에 지나지 않으며...(후략)

이때 일화 하나를 들자면 도교에 심취해 이슬을 받아 먹겠다고 구리로 된 크고 아름다운 신선 모양의 동상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다가 이게 자빠지는 바람에 부역하던 사람이 엄청나게 죽었다고 한다. 결국 부숴가며 옮긴 뒤에 동인을 두 개나 만들었다고 한다. 동상이 들고 있던 승로반이라는 쟁반에 맺히는 이슬에 옥가루를 태워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이슬 받아 먹어봤자 남는 건 체내 중금속일 뿐이었지 않은가.

잔잠, 고당륭, 노육, 진군, 양부 등 신하들이 조예의 사치에 대해 상소문을 많이 올렸는데, 그걸 일일이 다 읽으면서 약간은 받아들이기도 하고, 설사 따르지는 않더라도 좋은 충고를 잘 들었다고 제대로 답장을 했다고 한다. 면전에서 심한 간언을 해도 참아넘기고 오히려 따르기까지 했으며 한 달에 수천 개의 상소를 읽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실천하지는 않으니 아무 효용이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 사후 조예를 묘사할 때 양부를 포함한 신하들이 조예의 사치를 말리려고 하다가 파면당하거나 목이 달아나는 묘사가 나오는데, 정사에서 이 사람들은 딱히 처벌을 당하지도 않고 주변에서 처벌하자고 했으나 조예가 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간언한 고위 대신들을 죽이지 않았을 뿐이어서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예는 성질이 대단히 급하여 궁궐 짓는 기한이 늦어지면 곧바로 담당자를 불렀는데 담당자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바로 죽여버렸다고 한다.

2.2.4. 말년의 혼란상[편집]

조예의 죽음을 전후한 상황은 꽤나 혼란스럽다. 여러 사서들을 종합해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은 그려볼 수 있지만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 배송지주에 인용된 사서마다 제각기 입장이 다르고, 이런저런 상황도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많다, 사실 이건 본질적으로 조예의 후계구도가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후계구도를 둘러싼 조씨 가문의 잡음은 아버지 조조 때부터 있었던 일로 조비의 후계자 공인도 조조 사망 몇년 전에야 이뤄져 조비가 호족들에게 상당부분 양보를 해야했고, 조예의 태자 책봉도 조비가 지나치게 늦춘 탓에 사망 직전에나 이뤄져 조예는 정통성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조예의 후계구도는 그래도 장성한 아들이라도 있었던 조조, 조비의 후계구도보다 훨씬 더, 실로 끔찍하리만큼 엉망진창이다.

원래 조예는 자식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딸 하나를 제외하면 다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조예는 원래 아내가 있었는데 황제가 될 때 버리고 다른 이를 황후로 삼았고, 이후 그녀마저 죽이고 또다시 황후를 갈아치운다. 이 사건이 꽤나 엽기적인데 후궁 및 궁녀들과 함께 놀면서 ‘이걸 황후에게 말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다음날 황후가 ‘어제 재미있게 놀았나 보죠?’ 하고 갈구자, 조예는 측근이 비밀을 누설했다고 여겨 측근 십여 명을 죽인다. 그리고 황후에게는 자살을 명령했다.조예가 아버지에 비해 인간성이 좋다고 하신 분 어디 계심?[12]

하지만 조예는 고작 삼십대에 지나지 않았으니 충분히 자식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뜬금없이 아이를, 어린이도 아니고 젖먹이 둘을 어디선가 데리고 와서는 선언한다. “얘들은 이제부터 내 양아들이오.”

물론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들이는 건 정말로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예의 나이는 아직 한창. 양자를 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일렀다. 더 큰 문제는 얘들이 대체 어디서 굴러들어온 아이들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조씨가 맞기는 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조예는 이 둘의 출생을 비밀에 붙인다.

그 두 아이의 이름은 조방과 조순. 이후로도 조예는 결국 아이를 갖지 못했기에 조예의 후계자는 이 둘밖에 없었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고작 일고여덟 살 된 꼬마 둘뿐이었다. 심지어 그 둘 중에서도 조예는 나이가 더 어린 조방을 후계자로 점찍는다.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인지...

이런 상황에서 238년 12월 8일. 조예는 갑작스러운 중병으로 앓아눕는다. 그리고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이 시작된다.

12월 24일. 조예는 아끼던 후궁 곽씨를 황후로 세운다. 이전의 황후 모씨가 위에서 언급한 엽기적인 사건으로 사망한 후 1년이 넘도록 비어 있었던 황후 자리를 다시 채워 넣은 것이다. 그런데 곽씨는 본래 위세 있는 집안의 여식이었지만 고향에서 반란이 일어난 탓에 노비가 되어 궁으로 들어온 처지였다. 즉 오직 조예의 총애에 의해서만 집안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렇기에 곽씨 가문은 조예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설령 조예가 죽더라도 그 후계자에게 잘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젓. 그야말로 황실의 보위세력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을터다. 자신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조예가 갑작스레 곽씨를 황후로 세운 것은 그러한 의도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동시에 조예는 연왕 조우를 대장군에 임명한다. 또 앞서 언급한 하후헌, 조상, 조조(조휴 아들), 진랑 등 젊은 친족들에게 그를 돕도록 한다. 지금까지 조예가 안배해 온 황실 보호 체제가 마침내 빛을 발할 때였다. 비록 후계자의 정통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이렇게 친족들을 전진배치하고 특히 조우를 대장군이자 탁고대신으로 삼음으로써 그런 문제점을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다만 이런 체제 하에서 가장 큰 위협은 지금 요동에서 돌아오고 있는 사마의였다. 군사 사만 명을 거느린, 위나라에서 제일가는 군사 지휘관인 바로 그 사마의 말이다. 그렇기에 조우는 사마의에게 황제의 명령을 보내, ‘수도로 돌아오지 말고’ 바로 관중(장안 일대)으로 가라고 지시한다. 사마의가 수도로 돌아와 한바탕 뒤엎어버릴까 두려웠겠다. 이를 보면 사마의는 자신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이, 당대에 이미 조씨 황실의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흘 후에 뜻밖의 일이 발생한다. 12월 27일. 조예는 대장군 조우의 관직을 빼앗는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예의 측근인 유방과 손자가 이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들은 본래 조우를 필두로 한 황족 세력과 워낙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조우가 탁고대신이 되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리라 우려했다는 것. 그런데 그중에서도 조상과는 또 사이가 괜찮았던 모양으로, 그래서 유방과 손자는 조예의 귀에 대고 연왕 조우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조우가 황위를 탐낸다는 말을 들은 조예는 분노한다.

그런데 조우의 본심이 어찌 되었든 간에 이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조우는 바로 조조의 아들이다. 정통성이 충분하다. 반면 조예의 후계자인 조상과 조순 형제는 출신성분도 알 수 없는 꼬꼬마들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조예가 조우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면 위나라는 오래도록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예는 이미 조방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한 상황이다.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조예는 조우의 관직을 박탈하라 한다. 유방과 손자는 조상과 사마의에게 탁고하라고 조언한다. 조예는 그 의견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조휴의 아들 조조(조휴 아들)가 눈물로 호소한다. 조예는 조우의 관직 박탈을 취소한다. 또다시 유방과 손자가 호소한다. 조예는 또다시 조우의 관직 박탈 취소를 취소한다.개판 아주. 심지어 조예가 스스로 칙서를 쓸 힘조차 없다고 하자 유방은 조예의 손에 붓을 쥐어준 후 그 손을 잡고 스스로 글씨를 써서는 자기가 옥새를 찍고 황명을 내린다. 결국 조우, 조조(조휴 아들), 진랑, 하후헌은 모두 벼슬을 박탈당한 후 울면서 집으로 가게 되었다.

조예의 목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조방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었다. 만일 조예가 이십 년쯤 더 살고 제 수명에 죽었더라면, 그래서 조방이 그 기간 동안 후계자로서 공인받으며 성인이 되었다면 정통성 부족도 어느 정도는 극복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안 조우를 위시한 여러 황족과 친족들을 통해 실질적인 보위 세력도 구축해 줄 수 있었을 테고.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조예 자신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고 조방의 나이 고작 여덟 살이었다.

이렇게 되니 본래는 황실의 보위세력으로 삼으려 했던 조우가 오히려 조방의 황권에 가장 큰 위협이 된다. 조상이나 조조(조휴 아들) 등과는 달리 지나치게 가까운 황족으로 엄연히 황위계승권이 있었으니까. 그러면 조우를 배제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된다. 그렇다면 조방을 위해 조우를 대체할 누군가를 붙여주어야 했다. 조예의 결정은 조상과 사마의였다. 하지만 조상 혼자서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지나치게 젊었고, 딱히 실적을 쌓은 것도 없었고, 지위도 부족했고, 군사력도 없었다. 그래서 조상은 사마의를 끌어들인다. 그에게 없는 것들을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는 인물을. 동시에 조예의 입장에서도 그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그렇게 사마의는 조상과 탁고를 받아 위나라의 보정대신으로서 전권을 발휘할수 있게된다.
2.2.4.1. 황권 약화에 관한 실책[편집]
조예의 정치적 실책은 황권과 호족 세력의 세력 균형이 조예 대부터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본래 조위 정권은 조조라는 군벌이 무력을 바탕으로 영천, 여남을 필두로 한 지방 호족 세력을 포섭해 일으킨 정권이었다. 이들 호족 세력은 후한 말 청류를 자처하며 환관, 외척으로 이뤄진 탁류에 대립한 이들이었다. 당연히 이들을 영입해 정권을 굳힌 조씨는 통치 과정에서 환관과 외척을 배제했다. 문제는 환관과 외척은 그 폐단이 크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황실과의 관계성을 통해서만 통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집단이기에[13][14] 권력은 탐할지언정 제위를 가로챌 생각은 않는 데 반해 호족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원소 산하의 군벌에서 시작해서 실력으로 호족들을 아우르며 위왕(魏王)이 된 조조는 창업 군주로서 가지는 군사적 실적 덕분에 호족들을 누를 권위가 있었으나 은수저 물고 태어난 도련님에다 호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찬탈에 성공한 조비는 그 정도의 권위가 없었다. 조조의 후계자로 선정되는데 조비 자신의 능력보다는 장남으로서의 '정통성'이 중시되어 조조의 지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장남이라는 유교적 명분으로 호족들의 지지를 모으는 과정이 필요했다. 형주공방전과 이릉대전으로 이어지는 촉오간 분쟁으로 양측이 약해져 있을때 군공이라도 크게 세웠다면 어느정도 반전이 가능했겠지만 조비는 그 쉬운 이지선다에서 오답만 고르며 스스로 권위를 떨어뜨렸다.

이런 연유로 호족들에게 상당 부분 양보를 해야했고 구품관인법 같은 호족들을 위한 정책이 조비 대에 시행된다.[15] 게다가 조비는 뛰어난 형제들을 경계한다는 이유로 조조의 직계 황족들까지 통치 구도에서 축출해버리면서 유사시 조씨 사직을 지킬 방패는 더욱 얇아졌다. 조비의 형제인 조조 직계 친족은 빈객들과 사적인 대화를 하는 것도 금지되고, 수도에 상경하는 것도 금지되어 철저하게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이 정책은 조예 시대에도 답습되었다.

조비라고 이 문제점을 모르진 않았던 터라 최소한의 안전 장치들을 설치했다. 하나는 군권만은 조씨[16][17] 또는 하후씨가 철저히 장악하는 것이었고 하나는 황제를 보좌하고 정책 입안과 결정을 맡은 내조를 장악하는 것이었다.[18] 그래서 조비 시기 군부 일인자는 대사마 조인이었고 조인 사후에는 조휴와 조진이 대사마, 대장군이 되어 동서 전선을 담당했다. 내조의 경우 호족 출신이지만 유주와 병주라는 변방 출신이라 황제라는 끈이 없으면 출세하기 힘들었을 유방손자에게 맡겨 황실의 보위에만 충실하게 했다.[19]

그러나 조예는 유능하다하여 대호족인 사마씨 출신 사마의에게 군권을 넘겨줌[20]은 물론 그 동생인 사마부는 재정부 장관격인 도지상서에 제수해 사마 형제에게 군사와 재정을 몽땅 넘겨주었다. 이미 구품관인법 덕에 호족들이 관직 독점과 유력 호족을 중심으로 하는 '관맥 형성'이 시작된 상황에서 실질적인 권력까지 넘겨줘버린 것이다.

게다가 조예는 혈통의 문제로 정통성이 약한 조방을 후계자로 삼아놓고도 주색을 즐기며 본인 건강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죽기 전엔 유방과 손자의 이간에 넘어가 숙부 조우와 황실 친인척들을 차기 조정의 실세로 삼으려는 계획을 파기하고 조상과 사마의의 연립 정권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조방 대에 이르면 힘으로 역성을 이뤄낸지 겨우 십수년 된 시점+어리고 정통성이 약한 황제+부실하고 무능한 친황세력+실권을 거머 쥔 유능한 호족이라는 조위에겐 최악의 조합이 완성된다. 촉오에 맞서 위를 지켜낸 것도 조예지만 멸망의 트리거를 당긴 것도 조예인 것이다. 결국 조위의 위엄을 갖춘 황제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딱 조예까지로, 그 다음 황제인 조방 때 이전까지 충실한 신하인 척 했던 사마의의 꼭두각시 황제 정도로 전락해버린다. 조조가 군사적으로는 무능했던 하후돈을 대장군으로 기용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다만 처음에 조휴와 조진이 동서 전선을 담당한 것은 조예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조예가 이들을 무시하고 사마의에게 군권을 넘겨준 것이 아니다. 조휴와 조진이 모두 사망한 상황에서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야 하는데 조씨 중에서는 쓸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인 사마의에게 군권을 준 것이다. 당장 외부의 침입을 막아야 하는데 원칙을 지키겠다고 무능한 사람에게 군권을 주는 것 역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21] 조씨 중에서 쓸만한 사람을 없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조씨들을 핍박하여 내쫓는 정책을 편 조비에게 있다. 뿐만 아니라 하후씨 중에서도 하후상이라는 군재가 뛰어난 인물이 있었지만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그 하후상을 어처구니 없이 죽게 만들어 조예가 쓸 수 없게 만든 사람이 바로 조비이며 조위사우인 사마의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게 된 시기도 조비 시대였다. 즉 조예 시대에 이르러 종친 중에서는 유능한 사람이 부족했기에 사마의가 군권을 잡게 되는 것은, 이미 조비 시대에 그 바탕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비가 군권을 조씨 이외에게 넘겨주지 않는 원칙을 지킨것도 사실이고 조예 때 그 원칙이 깨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2.2.5. 죽음[편집]

235년, 위략에 따르면 조예가 문소황후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음을 슬퍼하자 곽여왕은 우려하다 갑자기 죽었다. 문소황후가 죽으며 조예를 이부인에게 맡겼다. 곽여왕이 죽자 이부인은 처음으로 문소황후가 참소라는 화를 만났으며 시신을 관에 넣는 의식인 대렴도 받지 못했으며 풀어헤친 머리가 얼굴을 덮었다고 했다. 조예는 슬퍼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곽여왕의 장례식을 문소황후의 장례식과 똑같이 치르도록 명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예가 새어머니인 곽여왕을 죽인다. 조예는 곽여왕에게 항상 원한을 품고, 자주 울며 생모 견씨가 죽을 때의 상황을 물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곽여왕이 말하길 "선제(조비)께서 친히 죽이신 건데, 어찌하여 나에게 책문하는 것이냐? 또한 너는 사람의 자식이 되어, 죽은 부친을 원수로 삼고 추궁하며, 전 모친을 위해 그 뒤의 모친을 능멸하고 죽일 수 있느냐?" 분노한 조예는 곽여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그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게 하였고 그 입에 엄청난 양의 쌀겨를 들이부은 다음 땅에 묻었다고 한다.[22]

237년 조예는 자신의 황후인 명도황후를 자결시키고 병세가 위독해지자 명원황후를 두 번째 황후로 삼는다.

238년 12월 조예는 예상치 못한 병으로 병상에 있었고 239년 1월에 36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하지만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조예가 36세라면 조비의 아들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배송지의 주장에 의하면 조예는 205년생이며 죽을 때는 34세였지만 35세도 가능하다. 이는 이 당시 역법 개정으로 전년 12월을 다음 해 1월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배송지는 이 시점을 238년 12월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34세이지만 239년으로 보면 35세도 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즉 205년 생이 맞고 239년에 죽은 것으로 보면 35세가 맞는다.

조예가 죽을 때, 조예는 연왕 조우, 하후헌, 조조(조휴의 아들), 진랑, 조상과 함께 조방을 보정하게 하려고 했으나, 진랑 등과 사이가 나쁜 유방손자가 조우, 진랑, 조조를 헐뜯고 조상과 사마의를 추천했다. 결국 명제는 조우, 하후헌, 진랑, 조조를 면직하고 조상과 사마의에게 뒷일을 맡긴다.

2.2.6. 평가[편집]

능력도 뛰어났지만 불행한 가정사 혹은 개인사 때문[23]에 선악의 피안에 놓인 난세의 간웅 할아버지 조조나 인성에 결함이 큰 아버지 조비보다 훨씬 더 애잔하고 인간적인 면모[24]가 두드러진 군주

위서를 쓴 왕침은 조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명제는 용모가 빼어나며 위엄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명제는 황태자의 신분이었을 때부터 조정의 신하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며, 정치 문제에도 무관심하고, 오직 생각을 깊이하고 서적에 몰두할 뿐이었다. 그러나 즉위하고 부터는 대신을 예우하고 공적을 세운 자나 유능한 자를 선발하며 진실과 허위를 바꾸지 않고, 경박함이나 참언의 시초를 끊으려고 노력하였다. 또 군대를 출동시키거나 논의를 통해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에는 지략이 있는 신하, 장군, 대신들이 모두 명제의 계략에 따랐다.

명제는 선천적으로 기억력이 탁월해 옆에서 모시는 신하들의 신상, 성격과 행위, 과거의 행동 또 그 부형자제의 성격 등에 이르기까지 한번 보고를 들으면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 특히 굴욕을 가슴에 담아 참아 내고, 직언을 잘 받아들이며, 신분이 낮은 관리나 백성들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한 달에 수천 봉서가 이르렀는데, 문장이 비루하더라도 끝까지 읽어 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정도이다.

다음은 정사삼국지 저자 진수의 평이다.
명제는 침착하고 굳세며 결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었으며, 마음에 임하여 행동하며, 백성들에게는 군주의 지극한 기개를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생활이 피폐하고 온 천하는 분열되었으나, 명제는 선조의 빛나는 대업을 먼저 생각하거나, 왕업의 기틀을 다지지 않고 진시황이나 한 무제를 급히 모방하여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관점으로서 헤아리면 이는 아마도 중대한 결함일 것인저!

다음은 역사가 손성의 평이다.
위 명제는 타고난 모습이 빼어났으며, 일어서면 머리카락이 땅에까지 늘어졌고, 말더듬이여서 말은 적게 하였지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강하였고, 결단 내리기를 좋아하였다. 처음에 여러 공들이 유조를 받아 보도하였는데, 황제는 이들 모두에게 한 지방의 임무를 주어서 이를 처리하게 하였으며, 정치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게 하였다. 예를 가지고 대신들을 우대하였으며,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곧은 소리를 좋게 생각하였다. 비록 면전에서 지극한 간언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꺾어버리거나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임금이 갖고 있는 도량이 이처럼 위대하였다. 그러나 덕을 세우고 기풍을 내려줄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유성(조씨들을 키우는것)의 기초를 굳게 세우지 아니하였으니, 결국 대권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기에 이르렀고, 사직을 지킬 수 없었으니 슬픈 일이다!

조예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은 보다시피 후한 편이다. 특히 손성이라는 인물은 모두까기 인형이라서 일단 까고 보는 인물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조예라고 잘한 점만 있지는 않고, 특히 말년의 인사 실책 같은 경우엔 위나라가 망국으로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다만 이러한 부분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평가할때 지적되는 단점들이고, 왕조시대 역사가들의 군주에 대한 평가는 이런 몇대에 걸쳐 결과가 나오는 거시적 관점의 평가보다는 그 군주의 재임 당시 군주가 보여준 인간성, 품행 도량 및 행보가 얼마나 고결한가 혹은 결단력 있는가 등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볼때 조예는 옛 역사가들에게 호평을 받을 군주긴 하다. 아버지인 조비는 인간성에는 특히 문제가 많았고 자신에게 간언하는 신하들을 마구 죽이거나 꺾어버리는 인물이었던 반면, 조예는 본인의 능력 및 결단력 등은 뛰어난 부분이 있고, 말년의 실정이 있긴 했어도 이 실정이 신하를 마구 죽이는 등의 행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에게 좋은 평을 받을 법 하다.

조예는 어지러운 시기에 탁월한 결단력과 리더쉽을 보여줄 수 있는 강한 군주였지만, 평화로운 시기에는 나태하고 사치스러운 군주였다. 확실히 능력은 뛰어난 부분이 있었으며 도량과 결단력 등은 영웅적인 면이 있었고 이게 외침이 빈번하던 시기에 두각을 드러냈지만, 자기 관리 면에서는 엄격함이 부족했고 방종한 부분이 있어 주된 외침이 대략적으로 마무리된 이후에는 이런 부분이 눈에 띠게 된다. 즉위 초기에는 내치 부분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면모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조예의 내치 능력이 그냥 무능하다기 보다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발생한 권력적 긴장과 외적의 침입으로 인한 개인적, 나라적 긴장 상태에서는 능력을 발휘하지만 외침도 성공적으로 막고 개인적 왕권과 위신도 어느 정도 반석에 오른 이후에는 긴장상태가 풀려서 방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보통 평화로운 시기에는 무난한 군주가 될법하지만 외적이 쳐들어오는 등의 불운한 시기를 맞아서 저평가 받는다는 불우한 군주들이 있다면, 조예는 반대로 어려운 시기에는 영웅적인 면을 보여줄 수 있지만 평화로운 시기에는 물음표가 나오는 정반대의 군주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조예의 사치스러운 면모는 대다수가 제갈량의 사망 이후 두드러지며 또 여러차례 북벌을 막아내면서 조예의 개인적 왕권이 반석에 올랐을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기 때문에 결국 외침의 종료 및 개인의 위신 상승이 조예의 나태한 면모를 부각시켰을 것이라는 관점에는 일견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위의 제갈량의 북벌을 훌륭히 막아내다 항목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조예는 제갈량 사후에도 선비족을 축출하고 요동의 공손연을 정벌하는 등 여전히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인다. 조예는 제갈량 사후에도 촉한의 공세 때 후방에서 호응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 위협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제갈량이 죽자 조예가 외부 침입이라는 요소에 대해 마음을 놓게 되었다면, 이러한 행위들은 어떤 이유에서 나온 것인지 설명할 수가 없다.

또 이 관점을 따르면 결국 조예의 초창기 성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발생한 권력적 긴장상태와 외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나온 것이지, 이런 요소들이 없었다면 초창기부터 조예는 사치스럽고 나태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는 조예가 초창기에 이룩한 것들을 폄하하는 논리가 될 수 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아버지의 지지를 받지 못해 불안한 입지로 어린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잘 이끌어낸 조예가 평화로운 시기에 조비의 사랑을 받으며 태자시절부터 단단한 입지를 다지고 더 많은 나이로 즉위했을 경우, 지금의 기록보다 더 나은 군주가 되었을지 처음부터 사치스럽고 나태했을 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만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어머니와 관련된 개인사 부분에서 언급되었듯이 조예의 말년의 사치는 무리한 궁궐 수축 행위로 대표되는데, 이러한 궁궐 수축행위는 제갈량의 사망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예가 제갈량이 죽자 궁궐을 지으며 사치를 벌이기 시작했다는 관점으로는 제갈량이 죽기 이전부터 궁궐을 짓기 시작한 조예의 행위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조예의 궁궐 수축행위를 단순한 사치로 봐야하는지, 혹은 그 사치라는 것이 외침의 종료라는 요인으로 인하여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에는 이견이 있다. 말년의 조예의 사치스러운 면모를 외부 요인에서 찾지 않고, 그의 불행한 개인사에서 찾는 의견이 그것이다.[25]

보통 유아청소년기에 외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부모를 잃은 이들은 무언가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증세를 보인다. 어릴 적의 심대한 불안함과 박탈감, 상실감을 견뎌내기 위한 심리적 기제로써 특정 집착 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집착의 대상은 사람이나 물건이 될 수도 있고, 복수나 사치 등의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부족한 기록만으로 조예의 심리 병증을 진단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추측이 맞는다고 본다면, 결국 조예가 사마의에게 집착하며 위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조비가 근본적 원인인 셈이다. 물론 이 조비의 성격이 비뚤어진 원인은 조조가 자식들에게 취한 태도에서 기인할 것이고. 조조-조비-조예의 삼대가 모두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라는 걸 고려하면 이러한 견해를 단지 막연히 원인과 책임을 선대에서 찾으려는 억지 논리로 폄하할 수도 없다. 현대의 아동 심리학이 발달하며 분명히 알 수 있는 점은, 이래서 가정 교육이 몹시 중요하다는 것이 이러한 의견의 논지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조예는 결단력과 식견이 뛰어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고 도량이 커서 간언하는 신하들을 죽이거나 꺾어버리지 아니하였다. 들뜨고 거짓된 실속없는 무리들을 싫어하여 이들을 기용하지 않고 유능한 자들을 기용하였고 예를 가지고 대신들과 공을 세운 자들을 우대하였다. 또한 백성 및 하급관리들에게 지극한 군주의 덕을 보여준 명군이었으나 결국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이겨 내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장점들을 잃어버렸다. 급히 진시황을 모방하여 궁전을 지어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고 조비 때부터 시작된 조씨들을 압박하는 정책을 답습하여 뛰어나지 않은 친황세력에게 정사를 맡기기에 이르렀고 사마의에게 깊게 의지하여 결국 나라를 넘겨주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팬덤에서는 초기에는 무난한 군주로 평가받던 조비에 대한 재평가로 조비를 비판함과 동시에, 외정에서 보여준 결단력 있는 면모로 조예의 평가가 급상승하여 명군으로 여겨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쉽게 눈에 띄는 개인적인 인간성 부분에서, 조비가 군주로서 평가를 뭘 어떻게 보더라도 인간적으로는 상종하기 싫은 모습을 보여준 반면에 조예는 너그러운 면모를 보여줬기에 그런 면도 있었다. 또한 그 당시는 전쟁이 빈번한 난세였기 때문에 외정이라는 부분에서 보여준 성과가 그 군주에 대한 평가에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데, 조비는 외정에서 보여준 성과가 처참한 반면 조예가 외정에서 보여준 유능함은 엄청났다. 다만 외정에서 보여준 조예의 능력만큼이나, 말년에 정치적 판단과 후계 문제에 대한 실패가 위나라 멸망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음을 생각하면 조예 역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군주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팬덤에서는 조비의 친족에 대한 심각한 견제 정책이 위나라 망국의 원인이 되었다는 식으로까지 비판 받는데, 조진 - 사마의로 이어지는 양대 구도로 최소한의 견제 장치라도 마련하여 조예에게 넘겨준 조비에 비해 사마씨 천하를 후대에 남겨준 조예는 이 부분에 대해선 더 할말이 없는 셈. 초기의 명과 그에 대비되는 말기의 암이 뚜렷한 군주라고 할 수 있다.

2.3. 가족 관계[편집]

아버지는 조비, 어머니는 문소황후 견씨이며 친동생으로 동향공주가 있었다. 왕작 시절 첫번째 정실은 우씨였지만 황제 즉위 후 우씨를 버리고 명도황후를 첫번째 황후로 삼았다. 피는 못 속인다고 자신도 아버지처럼 처 명도황후 모씨를 죽이고 죽기 직전 부인 곽씨[26]를 두 번째 황후(명원황후)로 세웠다. 이 모습은 어떻게 보면 가정 폭력의 대물림과도 비슷하다.

조예에게는 친자식으로써 청하왕 조경(曹冏), 번양왕 조목(曹穆), 안평왕 조은(曹殷), 평원의공주 조숙,[27] 제장공주(齊長公主)까지 3남 2녀가 있었다. 그러나 조경은 226년, 조목은 229년, 조은과 평원 공주는 232년 모두 요절했다.[28] 조예의 친자식 중 장성한 것은 제장 공주뿐으로 이도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으나, 이도가 죄를 지어 죽음을 당하자[29] 임개에게 재가했다. 사실 조예가 조방이라는 출생이 불분명한 후계자를 지명하며, 제위 말년 사치에 빠져 암군 테크를 타게 된 것은 자신의 어릴 적 트라우마뿐만 아니라 자녀 들이 잇달아 요절한 것도 한몫 하였다.[30] 위에서 봤듯이 말년에 완전히 맛이 가기 이전인 232년에도 사랑하는 딸과 아들이 죽었을 때 이미 대규모 공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자식들의 죽음 또한 조예가 암군테크를 타는 데 밑바탕이 되었으며 이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까지 알게 되자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암군이 되었다는 점이 합리적 추측일 것이다.

친자들이 모두 사망하자 조예는 양자조방, 조순 형제를 어디선가 데려왔다. 친아들들이 모두 죽어 후계자가 없었던 조예는 결국 근본도 알 수 없는[31] 조방, 조순 형제를 양자로 삼았다.

조예는 그중 조방을 선택했고 후계자로 삼았지만, 나이도 어리고 황가와 정확한 연고도 알려지지 않은 조방은 정통성이 부족했다. 결국 이런 아이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정한 것은 조위를 망하게 한 최악의 선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아버지처럼 황족들을 구속하고 특히 조진, 조휴같이 믿을 수 있는 황실의 방계 인사들까지 죽으면서 사마의의 권력은 급부상했다. 결국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을 죽인 사마의가 어린 조방을 대신하여 권력을 손에 쥠으로써 조위는 멸망의 길로 가고 만다.

나이 어린 삼촌으로는 조간이 있었다. 조간은 조예의 할아버지 조조가 60대에 얻은 늦둥이다보니 조예가 조간보다 10살가량 더 많았음에도 조카와 삼촌 관계였다. 조조는 임종 전에 조비에게 조간을 특별히 돌봐달라고 부탁했으며, 조비 역시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조간을 괴롭힐 이유가 없었기에 잘 대해줬다고 한다. 조예 역시 조간을 대우해줬는지 조간이 손님을 초대하고 어울리는 것에 대해 감시를 파견해 경고를 했을 뿐 다른 제재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겨우 친목질 좀 하는 게 뭐가 어때서 싶을 수도 있지만, 황위 계승권을 가진 제후왕이 저러는 것은 역적 모의로 의심받을 위험성이 있었으며 실제로 당시에는 위법이었다.

2.4. 기타[편집]

세설신어에 의하면 긴 머리의 미소년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위나라에서는 긴 머리가 유행했다고 한다.[32] 패션 센스도 독특한 것을 추구했는지 꽃을 꽂은 모자와 소매가 짧은 비단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어찌 보면 삼국 시대의 패셔니스타였던 듯.

수신기에 나오는 일화가 있다. 화완포라는 생물은 남방이나 서역의 화산에 사는 불쥐로 그 털로 옷을 해 입으면 불에 타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위 문제 조비는 자신의 책 전론에 그런 동물은 없다고 논증했으나, 그 후 명제 조예 때 진짜 화완포가 진상 되자 전론을 새긴 비석에서 그 부분을 부랴부랴 깎아버려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타지 않는 직물인 화완포(火浣布)라는 것은 서양에서 일명 샐러맨더의 가죽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방견문록에도 등장하는데, 오늘날에는 석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담으로 고려의 공민왕과 비슷한 인물이다. 군주로서 권력을 제대로 행사했던 사실상의 마지막 인물이라는 점, 즉위기 초반에는 명군의 면모를 보였지만 말기로 갈수록 암군으로 퇴보했던 점, 그리고 암군 테크를 타게 한 결정적인 요인도 비슷한 점, [33] 들의 혈통이 불분명하고 만 하다가 에게 폐위되고 선양을 하거나 죽임을 당했다는 점, 공민왕과 조예 사후 데타가 일어났다는 점 등 너무 흡사한 포지션에 위치한 왕이다.

사실 어린 시절의 개인사를 생각해보면 안 미치고 초기에 업적이 많은 게 신기할 정도인데 생각해보면 초기에 업적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재위기간 대부분을 촉한과 오와의 전쟁으로 보냈다. 국경을 위협하는 선비족, 심심하면 쳐들어오는 촉한 그리고 위협적인 오나라까지. 이런 점 때문에 조예의 업적은 군사적 업적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예는 초기엔 내치에서도 업적이 많다. 또한 235년에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처음 알았다고 위략이 기록하고 있고 그 이후로 조예의 행보가 점점 이상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쟁이라는 위협요소가 없었다면 조예는 초창기부터 나태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2.5. 미디어 믹스[편집]

3. 후한 말의 장수[편집]

趙叡
(? ~ 200년)

후한 말의 인물로 원소 수하의 장수이다.

200년에 관도대전이 일어날 때 독장으로 순우경, 수원진, 한거자, 여위황 등과 함께 오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의 기습을 받아 패하면서 수원진, 한거자, 여위황과 함께 참수되었으며 순우경은 붙잡혀 코가 잘렸다가 참수되었다. 오소를 함께 지키던 사졸 1천여 명도 죽임을 당해 코가 잘리거나 식량으로 사용하던 소와 말도 입술과 혀가 잘렸으며 이것을 원소군에 보내자 장병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수원진과 함께 군량을 조달하다가 군량을 쌓은 곳에 불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급히 구원하러 달려왔다가 오소를 공격하던 조조군이 군사를 되돌려 싸우자 수원진과 함께 전사한다.

3.1. 미디어 믹스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335.jpg
삼국지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3에 등장하고 쭉 출연이 없다가 삼국지 13 PK에서 추가되었다. 능력치는 통솔력 57/무력 63/지력 56/정치력 47. 특기는 훈련 1, 순찰 1. 전수특기는 순찰이다. 한거자와 같이 특기와 전수특기가 똑같다. 그리고 전법은 한거자와는 달리 동요도발.

진위동 삼국지에서는 순우경[34]에게 낚여 하후돈에게 화살 세례를 받고 죽는다. 덤으로 자신의 상관인 순우경을 등신 취급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조예 문서의 r156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1] 종보다는 조가 더 격이 높게 느껴진다. 조선정조를 참고.[2] 사실 묘호가 모든 왕에게 붙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이후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 묘호를 받은 왕들은 최소한 나라를 잘 이끌었거나 덕이 많았던 왕을 말한다. 한경제만 보더라도 문경지치라는 희대의 태평성대를 만들었지만 묘호가 없었다.[3] 자치통감에 따르면 232년 아끼는 딸과 아들이 죽자 이를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고 이때도 허창궁을 고치며 경복전 등을 짓는 유사한 행위를 한다. 이것은 조예가 궁궐을 수축한 이유가 생모와 자식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잊기 위한 행위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문제는 232년에는 궁궐을 수축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235년 이후로는 다른 기행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이다.[4] 조예가 원희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직접 적을 수는 없으니 나이 계산을 통해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썼다는 것이다.[5] 조비는 조조가 죽기 이미 3년 전에 세자가 되어 있었고 나이도 많았으며 지지기반도 확실했지만, 조예는 나이도 어렸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살해당했으며 아버지가 자신을 태자로 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위에 올랐을 때 그 지위가 그다지 안정치 못했다[6] 이는 맹달이 내부에서 제갈량에게 호응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제갈량의 1차 북벌을 막아내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7] 여기서 걸린 게 필궤, 하안, 이승, 정밀, 환범 등등의 인사들. 이들은 조예가 죽은 후에야 조상의 도움으로 출세하는데, 결국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잡은 사마의의 손에 제거된다.[8] 2, 3, 4차 북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의 북벌 문서 참조.[9] 이때 조예가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친정한 이유는 손권을 고평가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손권이 자신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후퇴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10]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의 의미를 넘어, 촉한이 북벌을 할 때 공손씨가 후방에서 호응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 의미도 가진다.[11] 물론 눈에 띌 정도의 재정적 붕괴나, 세금이나 통화 체계의 혼란은 없었지만, 당시 위나라 사람들은 조조 이래로 3대에 걸쳐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던 건 분명하다.[12] 그러나 조비의 인간성이 낮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조비가 자신의 부인을 죽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인뿐만 아니라 간언하는 신하들이나 개국공신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죽이거나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조예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부인을 죽였음에도 역사가들이 그의 인간성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조비와는 달리 간언하는 신하들에게 관대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역사가들은 조예가 자신의 부인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성을 높게 평가해준 것이 아니라 조비와는 달리 간언하는 신하들을 죽이는 짓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인간성을 높이 평가해준 것인데, 조예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인을 죽였으니 조비보다 인간성이 나을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궤변이다.[13] 그래서 이들의 권력이 커질수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황권 강화 수단으로 이들을 이용했으니까.[14] 그러나 외척이 황위를 탈취한 사례는 의외로 많다. 전한과 후한 사이의 왕망이 외척 출신이고, 삼국지 이후인 남북조 시대에는 정말 널렸다. 수나라를 세운 양견도 외척 출신이다. 다만 환관의 사례는 없다. 근본적으로 명예도 실권도 자손도 없어서인 듯.[15] 구품관인법의 시행 이유는 호족의 포섭 외에도 다른 이유도 있지만, 가장 주요한 목적이 호족 복지임은 부정할 수 없다.[16] 단, 조비의 형제들처럼 제위에 도전할 수 있는 조조 직계가 아닌 위나라 개국 공신인 조조의 사촌 형제들의 후손인 방계.[17] 사실 방계라도 제위에 도전 못하는 것 아닌 것이, 방계는 또 사실상 남으로 생각해서 도전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남북조 시대 양 무제는 제나라 소씨의 방계 출신이었고, 서진 팔왕의 난도 방계들의 싸움이었다. 그래도 위나라는 관료제 내에서 제어가 가능했다. 서진이나 제나라처럼 감당 못 해서 사단난 게 아니다. 그 조상마저 조방을 몰아내고 자신이 황제가 될 생각은 않았으니[18] 내조의 강화는 전한 한 무제 시절부터 황제권 강화를 위한 꾸준히 추진되었다. 후한의 경우 광무제 시기 상서가 외조로 떨어져 나가면서 중서가 내조의 핵심이 되었다. 즉, 후한과 위는 상서령보다 중서령이 실세였다.[19] 다만 이들은 말년에는 자기 보신만 하다 사마의에 붙어서 조위 멸망의 방아쇠를 당긴다.[20] 조예는 군주의 입장에서 신하 사마의를 아끼고 신뢰하는 걸 넘어서 아예 인간적으로 집착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위서 명제기와 진서 선제기를 중심으로 조예와 사마의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는 기록들을 보면 사마의를 향한 조예의 감정은 단순 신뢰하는 신하를 대하는 군주의 태도로 보기엔 뭔가 석연치 않다. 특히 조예가 임종 무렵에 사마의에게 보이는 인간적인 집착(조예 曰 "뒷일을 맡기오. 죽으려는 것을 겨우 견뎠으니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것은 그대를 기다린 것인데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무 여한이 없소이다.")은 차마 눈물 없인 못 볼 지경... 병세가 위중해 다 죽어가는 마당에 차마 죽지 못하고 고통을 감내하며 공손연 토벌로 외정나간 사마의를 병적으로 찾았고 사마의가 귀환하자 비로소 안심하고 후사를 맡기고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방점을 뒤에 찍으면 뒷일을 부탁하는게 목적이 아니라 죽기전 마지막으로 꼭 한번 사마의 보고 싶었다는 애처로운 절규로 들릴지도... 이러한 조예의 이해 못할 사마의 의존증을 자신과 어머니 문소황후가 아버지 조비로부터 배척받은데 따른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아버지 콤플렉스'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확실히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제시되는 진서 선제기의 묘사는 꽤 의미심장하다. 공손연 토벌을 완수한 사마의의 꿈에 조예가 나타났는데, 마치 가부좌를 튼 아버지의 무릎에 파고 든 아이처럼 사마의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사마의를 향해 자신의 얼굴을 봐달라는 말을 하고 놀란 사마의는 꿈에서 깨어난다. 혹자는 이 대목에서 사마의를 일종의 대리부친으로 보는 조예의 애착 감정을 읽어낸다.[21] 조조가 군재가 뛰어나지 않은 하후돈을 대장군으로 임명한 것과는 애초에 비교할 바가 못 되는 것이, 조조 때에는 하후돈이 아니더라도 그를 보좌할 수 있는 뛰어난 종친들이 충분했다.[22] 이 방식은 문소황후가 죽을 때 받은 초빈으로 조예는 똑같은 형벌로 원수를 처형한 것이다.[23] 그래서 삼국지 팬덤 사이에선 조예가 성격에 하자가 있는 조비 슬하가 아니라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부모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도 종종 나온다. 그런데 하술하듯 조비의 잘못된 성격 형성에 있어서 조비를 그닥 탐탁치 않게 여긴 조조와 그 태도에서 기인한 잘난 형제들과의 치열한 후계자 쟁탈전 문제가 상당한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조예의 불우한 삶에 있어서 할아버지 조조가 나눠져야 할 원죄도 어느 정도 있는 셈이다. 조조 개인적으론 조예를 무척 총애했다곤 하나...[24] 뛰어난 자질을 타고 났으며, 실제로 제위 초중반까지는 명군 면모를 보여주나, 결국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멘붕에 빠져 암군에 가깝게 추락한 조예의 일대기는 드라마타이즈하기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가정폭력에 시달린 어머니와 자기 자신, 그러다 결국 제거된 어머니, 요절한 자식들, 본처를 저버린 아버지의 전철을 답습... 할아버지 조조의 후광이 워낙 뛰어나기도 하고, 삼국시대 후반기 인물들은 별로 조명되지 못하는 상례상, 그 동안 철저히 묻혀왔으나 최근 들어 이러한 조예의 불행과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고, 그것이 조위의 몰락에 단초를 제공했다는 시각을 집어넣은 2차 매체가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대군사 사마의이다. 그러나 조예의 인물상을 묘사하는 디테일에 있어서 실제 역사와 차이가 있기에 호불호가 갈린다.[25] 그 트라우마라는 것이 왜 말년에 갑자기 터졌는지는 어머니와 관련한 개인사 부분에 언급되어 있다. 위략의 기록을 따를 경우 자신을 키워준 계모가 자신의 생모를 모함해서 죽였다는 것을 모르고 그녀와 잘 지내다가 말년에 가서야 그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 정신적 충격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즉, 위략의 기록을 통째로 부정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러한 가설을 억지 논리로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26] 우연히도 조예의 계모인 곽여왕과 성씨가 같다. 하지만 성씨만 같지 두 집안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27] 의(懿)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역사상 공주 신분으로서 시호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다.[28] 4명 모두 3년을 넘기지도 못했다. 평원 공주의 경우 이때 문소황후 견씨의 일족인 견황(甄黃)도 죽었는데 둘을 합장하고 명혼식을 했다.[29] 이도의 아버지 이풍이 사마사를 제거하려고 모의한 것이 발각당해 관련자들이 죽음을 맞았고, 이도 역시 옥에 갇혔다가 사사당했다. 세 아들은 살아남았다고 한다.[30] 마치 공민왕이 자신의 부인인 노국대장공주에 힘입어 국정에 의욕적으로 매진하다가 결국 출산 도중에 죽자, 그 이후 정신줄을 놓고 사치와 예술에 빠져들어 암군 테크를 탄 행보와 흡사하다.[31] <위씨춘추>와 <세설신어>에서는 조창의 아들인 임성왕 조해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근거는 없다.[32]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위나라 사람들은 긴 머리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대의 유행이었던 듯 하다.[33] 조예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자식들의 죽음이 암군이 된 주된 요인이었고, 공민왕은 자기가 그토록 의지하던 노국대장공주가 출산 도중에 죽은 이후로 국정에 손을 놓고 사치와 예술에만 탐닉하였다.[34] 조조군의 포로가 되서 원소군을 속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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