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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비

배중진 2019. 2. 17. 07:24

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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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무제기(武帝紀)」
2권「문제기(文帝紀)」
3권「명제기(明帝紀)」
4권「삼소제기(三少帝紀)」
5권「후비전(后妃傳)」
6권「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7권「여포장홍전(呂布臧洪傳)」
8권「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9권「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10권「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11권「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12권「최모서하형포사마전(崔毛徐何邢鮑司馬傳)」
13권「종요화흠왕랑전(鍾繇華歆王朗傳)」
14권「정곽동류장류전(程郭董劉蔣劉傳)」
15권「유사마량장온가전(劉司馬梁張溫賈傳)」
16권「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17권「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18권「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19권「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20권「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21권「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23권「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24권「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25권「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27권「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29권「방기전(方技傳)」
30권「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조비
조위 건국
파일:Cao_Pi_Tang.jpg
세조(世祖) 또는 고조(高祖)[1]
문황제(文皇帝)
황초(黃初, 220년 10월 ~ 226년)
조(曹)
비(丕)
자환(子桓)[2]
생몰 기간
재위 기간
1. 개요2. 가족 관계3. 정사
3.1. 언플의 소년기3.2. 견씨를 아내로 삼다3.3. 청년 시절부터 보이는 막장의 기운3.4. 세자로 책봉되다3.5. 조조를 잇다3.6. 헌제의 선양을 받다3.7. 이릉대전3.8. 정치에 기울인 노력
3.8.1. 구품관인법에 대해서
3.9. 조비의 남방 정벌
3.9.1. 남방 정벌에 대해서
4. 인간성
4.1. 치졸함과 뒤끝4.2. 불효자4.3. 나쁜 형
4.3.1. 조비만의 문제인가?
4.4. 항장에겐 따뜻함?
5. 연의6. 기타7. 평가8.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이자 희대의 성격 파탄자. 시호는 문제(文帝), 묘호는 세조 혹은 고조.

조조가 세상을 떠났던 220년 무렵에 황제가 아니라 위왕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였다. 조비가 위왕에 오른 후 조조를 무왕(武王)으로 추존했다가, 헌제에게 선위를 받아 황제가 된 후에는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라는 존호를 올렸다.

선양을 통한 왕조 교체에 성공한 최초의 군주[3]이자, 남방 정벌을 통한 중국 통일에 실패한 북조 최초의 군주이기도 하다. 삼국지위진남북조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계기가 된 인물. 400년을 존속했던 한 황실이 조비의 선양을 통한 찬탈로 멸망하면서, 이후 350년간 혼란의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름 역사적으로 비중이 있다면 있는 셈.

인격적으로도 매우 많은 문제점들이 발견되지만, 구품관인법이나 둔전제 시행으로 위나라의 내정 안정을 도모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한 말과 삼국 시대의 문학을 정리하여 건안칠자로 묶어 유고 시집을 편찬하는 등 문화계에도 제법 중요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동시에 구품관인법과 비상시 황실의 우군이 되어줄 황족과 외척을 극단적으로 배제하는 정책으로[4][5] 위나라의 개국과 동시에 멸망의 시한폭탄을 설치한 암군으로도 평가받는 인물이다.

2. 가족 관계[편집]

조조의 3남으로, 무선황후(변씨)의 소생.[6] 본디 위로 조앙(曹昻)과 조삭이란 형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젊은 때 죽은 이후 조비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흔히 조비가 장자 또는 차남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문에서 그를 3남이라고 하는 이유는 조앙, 조삭과 조비의 나이 차이 때문이다. 조비를 차남으로 가정한다면 조비는 187년생이고 조앙은 197년에 조조와 함께 종군할 정도로 장성한 상태였다. 더구다나 조앙의 생모 유부인은 조앙, 조삭을 아들로 두었는데, 유부인이 일찍 죽어 유부인의 두 아들은 조조의 정실 정부인에게 입적되었다. 만약 조삭이 조비의 아우라면, 유부인이 요절했다는 말이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유부인이 일찍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조앙이 장남, 조삭이 차남, 조비가 삼남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아내로는 문소황후와 문덕황후(곽여왕)가 있다. 그리고 습유기에는 조비의 첩으로 설영운, 막경수(莫瓊樹), 단교소(段巧笑), 진상의(陳尙衣)가 기록되어있다.

참고로 조비는 헌제의 장녀와 차녀를 귀인으로 삼았다. 그 두 딸의 모친이 조조의 딸들이자 자신의 여동생들(조절, 조헌, 조화)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비의 몰년을 감안하면, 조비의 후궁이 된 헌제의 딸들이 조씨 자매들 중 누군가의 소생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조가 헌제에게 세 딸(장녀 조헌, 차녀 조절, 삼녀 조화)을 바친 것은 213년이고, 셋 다 나이가 어려 위국에서 나이가 차기를 기다리다가 214년에 귀인으로 승격되었다. 만일 세 사람 중에 하나가 입궁하자마자 회임해서 딸을 낳았다고 가정해도, 조비가 사망하는 226년에도 그 아이의 나이는 불과 12~13세. 따라서, 조비의 후궁이 된 헌제의 딸들은 조조의 딸들이 입궁하기 이전에 태어난, 다른 여성의 소생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조비의 자녀로는 문소황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조예동향공주, 구소의와의 사이에서 낳은 조림 등 여럿이 있다.

3. 정사[편집]

3.1. 언플의 소년기[편집]

조비가 태어나기 전인 176년에 황룡이 초현에 출현하자, 광록대부 교현이 태사령 단양에게 무슨 조짐인가 묻자 단양은 이 나라에서 천자가 나타날 것이며 50년이 지나기 전에 황룡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했고 내황(內黃) 은등은 말없이 듣고 이 말을 기억해 두었다.

조비는 후한 영제 중평 4년(187년) 겨울에 태어났다. 푸른색 구름의 기운이 둥근 모양으로 (황제가 타는) 수레 덮개처럼 걸쳐 있다가 하루 만에 없어져 버렸는데, 이것을 바라본 자들은 지극히 존귀한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창업-수성 군주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 그렇지만 나이 여덟에 이미 붓을 잡으면 그대로 훌륭한 시가 되었고, 각종 경전과 제자백가 서적을 모조리 꿰뚫었으며 궁마술과 검술에 정통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조비 자신이 직접 썼던(…) 자전에서의 묘사를 후대 사서들이 그대로 따른 것인데, 아 자전의 전반적인 내용 자체가 좀 중2병적인 느낌이 강해서 다 믿긴 그렇다. 별다른 활약 없이 태자가 되었던 조비의 자기 PR 정도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소년기의 기록은 많지 않으나 자전의 내용에 따르면 조조가 완의 장수를 정벌(197년)할 때 10살로 종군하여, 형 조앙과 사촌 조안민이 죽는 와중에도 말을 타고 살아남았다고 한다.[7]

3.2. 견씨를 아내로 삼다[편집]

204년, 조조가 원소의 아들 원상을 칠 때 조비도 종군했다. 조조는 업을 점령한 다음 병사들에게 일체 약탈을 금지하고 원소의 가족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이는 비록 적이지만 젊었을 적 친구였던 원소에 대한 그 나름의 예우였다. 그런데 조비는 원희의 처인 문소황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때 조비의 나이 18세.

정사 삼국지 문소견황후전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황후(견씨)가 두려워하여 머리를 시어머니(유부인) 무릎 위에 묻고 있었고 원소의 부인은 양 손을 스스로 포박하고 있었다. 문제(조비)가 이르기를 '유부인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하십니까? 명하셔서 신부께 머리를 들라고 하십시오.' 하니 시어머니가 이내 받들어서 황후에게 명하여 우러러보게 하니, 문제가 들여다보고 그 안색이 평범하지 않음을 보자 그녀를 칭찬하며 감탄했다. - 위략
삼국지연의에서 조비가 문소황후를 보쌈하는 장면은 《위략》의 묘사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후한서》 〈공융열전〉에서는 "조조가 업성을 도륙할 때 원씨의 부녀자들이 강간당하는 일이 많았는데, 조조의 아들 조비는 사사로이 원희의 처 견씨를 맞아들였다"고 되어 있다.[8]

아예 전리품 취급 당하던 다른 원씨 일족의 여성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남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도 웃기기는 마찬가지라 조조는 이 행위가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을 염려했고 실제로 여론이 그랬다.

한편 공융은 이를 두둔해주는 척 하면서 조조를 경전도 제대로 모르는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등 이중으로 굴욕주며 조롱하기도 했는데, 《세설신어》에서 조조가 업을 점령한 이후 견씨를 품으려 했으나 이미 조비가 데려갔다는 말에 "이번에 전쟁을 벌인 것은 그 계집 때문이었는데 자식놈한테 빼앗겼다."고 분노하는 답없는 호색한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런 분위기에서 기인한 것.

《세설신어》의 내용에 대해서, 정사에 근거해 조조는 원가의 부녀자에게 손 대지 말라고 했으니 이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오로지 정사만을 맹신한 결과이다. 《후한서》에 따르면 원가의 여자들은 강간당하는 일이 잦았다. 만약에 정사의 말대로 조조가 정말로 저런 명령을 내렸다면 조조는 누군가조비가 견씨를 손댈까 두려워서 저런 명령을 내린 것이고 다른 여자들은 강간당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오히려 견씨를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세설신어의 내용이 더 설득력 있어지는 것이다. 후한서의 내용은 날조이고 오직 조비만이 자신의 명령을 위반하고 견씨와 결혼하고 싶어하자 아들이라 할 수 없이 허락했다는 복잡한 전제를 달아야만 정사를 근거로 세설신어를 반박할 수 있다. 따라서 조조가 정말 저런 명령을 내리기는 한 것인지, 정말 조조가 이 약탈혼과 무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원씨 일족의 여성들에 대한 처우와 《후한서》에 남겨진 내용이 마냥 모순되기에 어느 한쪽만 타당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하북의 패자였던 원소는 당대 최강자로 거의 왕이나 황제급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고, 그에 걸맞게(...)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정사 삼국지의 내용대로 원소의 적실이었던 유씨를 비롯한 직계 일족 여성들은 보호받았고 나머지 여성들은 전리품 취급받았다고 절충해서 볼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에 망국의 군주였던 촉한의 유선 같은 경우도 일족의 여성들은 철저히 보호받았지만 후궁들 같은 경우는 촉한 정벌군에 종군한 장수들에게 분배되었다. 또 손오의 손호 같은 케이스 역시 일족은 보호받았지만 그가 거느렸던 오천 궁녀는 모조리 사마염 몫(...)으로 귀속됐다.

3.3. 청년 시절부터 보이는 막장의 기운[편집]

이후 조조가 고간의 난을 진압하러 나간 사이에 업에서 사냥과 음주가무에 열중하는 것을 들어 아버지 위세가 강해지는 것만 믿고 사치향락에 빠졌던 원소의 자식들과 똑같다고 최염한테 까인 적이 있다. 조비는 당장 이를 시정했다고 하나 이런 행보는 황제 시절에도 계속되었기에 일시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수의 최후에도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장수는 207년 조조가 오환에게로 도주한 원상을 추격해 유성을 공격할 때 같이 종군했지만 유성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장수전〉 본전에서는 그냥 오환을 정벌하러 유성으로 갔으나 이르기 전에 '죽었다'고만 나와서[9] 내막을 알기 어렵지만 《위략》의 주석에 따르면 조비가 형을 죽였다고 하도 갈궈댔기 때문에 불안감에 휩싸여 자살했다는 것.

적게나마 남아 있는 소년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아버지의 위세만 믿고 방약무인해 아버지인 조조의 정치적 입장을 다분히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충동적인 성향이 강한데, 이후 후계 구도에서 동생들에게 위협을 받은 것은 이런 성품의 문제가 크다는 견해가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근본적인 성격이 변하지는 않았다.

3.4. 세자로 책봉되다[편집]

건안 16년(211년) 한수마초의 난에 종군했고 이후 이 공으로 오관중랑장이자 부승상이 되었다.

211년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었을 때 손님 30여 명을 불러서 연회를 열었는데 조비는 주건평에게 자신의 수명과 빈객들의 수명을 묻는다. 주건평은 하후위, 융거, 조표죽을 때를 예견했다. 그러면서 조비에게는 "장군의 수명은 여든인데 마흔 살에 작은 재난이 있으니 조심하여 보호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알다시피 조비는 장수하지 못하고 딱 마흔에 죽었는데, 죽으면서 낮과 밤 따로 따로 이틀 쳐서 여든이란 거구나!라고 하고는 죽었다고 한다(…).

공을 세웠어도 조비는 후계 경쟁에서는 아직 확고하지 못했다 이에 가후에게 대책을 물으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인덕과 관용을 발휘하고 숭상하며, 평범한 선비의 업을 행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하며, 아들의 도리를 그르치지 않으면 됩니다."
언뜻 별거 없는 것 같지만, 말 그대로 괜히 조급해하다 눈 밖에 나지 말고 가만히 바른 모습만 보이라는 것. 결국 216년에 조조가 위왕에 오른 뒤, 가후가 조조를 설득하여[10] 다음 해 세자의 자리가 확고해졌다.

조비는 의외로(?) 행동이 가볍고 감정 표현을 자제하지 못하는 일면도 있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위왕의 뒤를 이을 세자로 낙점되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옆에 있던 신비의 목을 끌어 안고(…) 기뻐했다고 한다. 신비가 집에 돌아가 총명하기로 유명했던 딸 신헌영에게 이 일을 말해주니, 그녀가 평하길 왕이 되어 국사를 짊어진다는 게 고된 일인데도 그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니 위의 앞날이 오래갈지 걱정된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11]

흥미롭게도 야사집인 《위략》에 따르면 조비는 이 당시 조조가 자신을 세자로 세운 것이 급하다 생각하여 의아해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관상을 잘 보는 고원려(高元呂)라는 사람이 있어 불러서 물어보자, 고원려는 "그 고귀함은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수명을 묻자 "그의 수명은 마흔살 때 작은 고통이 있겠지만, 이때를 지나면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조비가 마흔에 돌연 죽은 것이 뒷 사람들의 떡밥거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3.5. 조조를 잇다[편집]

220년 2월 아버지 조조가 죽자 승상과 위왕에 올랐고, 가후를 태위, 화흠을 상국, 왕랑을 어사대부에 삼았다.

조비가 아버지의 뒤를 이은 220년 3월에 황룡이 출현했다고 한다. 176년, 단양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내황 은등이 그로부터 44년 뒤에도 살아있어서 "50년이 못되어 황룡이 나온다더니 맞네."하고 인증했다.

220년 3월에 하후돈대장군에 봉했으나 하후돈은 4월에 세상을 떠났다. 하후돈이 죽을 때 조비는 예법을 어기면서까지 곡을 하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220년 6월 열병하고 남방 정벌을 떠났으나, 실제적으로 개입은 하지 않았고 무력 시위 겸 명분 다지기[12]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8월에 봉황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또 나왔고(…), 조비는 초현, 곡려 정도에서 노닐다가 손권이 헌상하고 맹달이 투항하는 정도의 성과에 그쳤다. 그런데 사냥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비의 과시욕은 유별난 수준이었는데, 위왕 시절 남방 종군에 순욱(荀勗)이 칭찬했을 때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자랑을 할 정도로(…) 문무에 능하다는 자부심 혹은 자뻑이 강했다.

3.6. 헌제의 선양을 받다[편집]

조비의 여동생이 3명(조절, 조헌, 조화)이나 헌제의 아내였는데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강요할 때 사람을 보내 옥새를 내어달라고 하자, 조절은 몇 번이고 옥새를 내주지 않았으나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자에게 옥새를 내던지면서 통곡했다.

결국 헌제에게 220년 10월 28일 선양을 받았다. 연호를 황초로 삼고, 헌제를 산양공으로 삼고 상서에서 신(臣)이라고 쓰지 않게 했다.

이를 가리켜 무혈 선양이라느니 모범적 선양이라느니 하는 건 조조의 행각을 쏙 빼놓고 보는 눈가림일 뿐이다. 이미 조조가 동승, 복황후 등을 숙청하고 헌제의 아들까지 살해했으며 경기, 위황의 거병을 진압한 후 한의 관료들을 대학살 하면서 피를 다 뒤집어썼기에 조비는 더 이상 피 흘릴 일도 없이 무난하게 선양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조비는 수도를 허창[13]에서 낙양으로 옮겨서 새롭게 궁을 지었다.

조비는 조강지처 문소황후를 내팽겨쳤는데, 결국 곽여왕의 모함에 221년 6월 28일에 사약을 내려 죽여버렸다.

221년 6월 29일, 일식이 나타나자 담당 관리가 태위(가후)를 면직시켜야 한다고 상주했다. 조비는 재해나 이변이 출현하는 것은 우두머리를 견책하는 것이지 신하들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거절한다.

3.7. 이릉대전[편집]

유엽전에 따르면 이릉대전을 앞두고 유엽은 촉을 도와 오를 멸망시키고 촉을 없애면 천하 통일이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촉이나 오나 둘 다 위에 비하면 약하지만 촉은 진공해서 들어가기가 힘들기 때문. 하지만 조비는 이 말을 전혀 듣지 않았으며 결국 이릉대전 이후 촉과 오가 다시 연합하고 삼국 시대가 시작된다.

221년 11월, 손권을 오왕으로 봉했다. 오주전 주석에 의하면 손권이 신하들과 의논하니, 차라리 상장군(上將軍) 구주백(九州伯)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칭하고, 위나라에서 주는 왕위를 받지 말라고 했다. 이에 손권이 대답했다. "구주백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이다. 예전에 유방도 한때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이라는 칭호도 받았는데 그것은 다 시세에 따른 것이오. 왜 받지 말라는 것이오?" 하고는 왕위를 받았다. 하지만 역시 오주전에 의하면 222년 3월 당초, 손권은 겉으로는 위나라를 의탁하고 섬겼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의지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손권이 조비가 주는 작위를 받은 것은 진실된 항복이 아니라 그저 이릉대전을 앞둔 시세에 따라 조비를 농락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주구장창 남방 정벌에서 깨질 조비이지만 조비의 군사적 감각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이릉대전의 승패를 예측하기도 했다. 《연의》에도 나온 것으로 유명한 일화로 222년 윤달 5월 유비의 군대가 동쪽으로 내려와 손권과 교전하면서 7백여 리에 이르는 나무 울타리(樹冊)를 세워 진영을 이었다는 말을 듣고, 유비가 깨질 것을 예측하고 이것은 7일 만에 유비를 깨뜨렸다는 손권의 소식이 오는 것으로 증명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군략은 꽤 잘 평가하는데 정작 자신의 군략은 자뻑 기질 때문인지 경이로울 정도로 무능한 전략으로 일삼았다.

222년 9월 3일에는 외척을 배제하겠다는 조칙을 내린다.
부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혼란의 근본이 된다. 지금부터 모든 신하들은 태후에게 일을 상주하지 마라. 황후의 일족은 정치를 보좌하는 임무를 할 수 없고, 또 이유 없이 영토를 갖지 못하며 작위를 받을 수 없다. 이 조칙을 후세에 전하라. 만일 이 조칙을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천하가 함께 그 자를 주살할 것이다. - 문제기
이에 대해서 외척의 발호를 억제한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세설신어》 관련 떡밥을 생각하면 좀 이상한 추측이 들게 된다. 6일 후 곽여왕을 기어이 황후로 삼으니 그녀가 문덕황후다.

3.8. 정치에 기울인 노력[편집]

선양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조비는 재위 기간 내내 제도의 확립과 민심의 안정 그리고 유학의 부흥에 힘쓰는 등 난세를 끝내고 태평성대를 이끄는 통일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이고자 했다. 제도적인 면에선 행정 구역을 재확립하고 인사 제도를 정비해 구품관인법을 실행한다. 한편으론 관료간의 상사 탄핵에 제약을 가했는데, 이는 고위 관료와의 타협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어떤 측면에서 관료기구 내의 질서를 확립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

구휼책이나 사면령을 종종 내려 민심의 이반을 제지하고자 했다. 심지어 연•예주 일부 지역 한정으로 세금 면제책도 시행하기도 했다.

유가 부흥책도 역시 사회의 안정과 전통적인 향촌 질서를 부활시키고자 한 정책으로 보인다. 유학의 부흥을 위하여 즉위 직후(221년 2월) 노군에 공자의 묘당을 다시 세우고 주변 일백호에 그를 관리하게 하는 한편 제사 규칙을 정하고, 더 나아가 장례 제도를 개선시킨다. 그리고 저술 사업을 시행해 유학 경전을 편찬 천여편에 달하는 '황람'을 출간한다. 뭔가 괴리감이 들겠지만 치세 내내 유가적 덕목의 권장에 힘써 왔다. 한나라 말엽의 당시 비관적, 회의주의적 경향의 사고가 지식인계 전반에 만연했다는 점에서 조비의 유가진흥에 기울인 노력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정통성 측면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조비의 밑에서는 법률의 가혹함으로 말이 많았다고 한다. 하염없이 백성을 이주시켜 민초 사이에서는 불평불만이 있었다. 먹고 살게는 해주지만 그렇다고 마음과 몸이 편하게는 못 해주기 때문에 조비 역시 민담 등에서 이미 악역이 된 듯하다. 국경 지대에 있는 농민들 강제 이주는 예사였으며, 민둔제의 경우는 징발된 농민으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시키는 것 역시 계속되었다. 백성의 딸이나 심지어 유부녀(!)까지 뺏아서 병사들의 아내로 던져주는 것은 덤. 원래 조조 때부터 있었던 제도이지만 조비 대에는 일반 여성을 강제로 다른 남자에게 결혼시키는 지방 관리들이 많아 백성들의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두기만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후에 조엄의 일로 이 사실을 안 조비조차 좌우의 신하들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고 한다.

3.8.1. 구품관인법에 대해서[편집]

한편 제도의 정비 측면에서는 많은 논란을 겪고 있는데, 1년에 10만 명당 효렴 한 명씩을 추천하게 했던 기존 후한의 향거리선과 달리 우수한 인재가 있다면 굳이 이런 제약을 두지 않았으며 또한 각 지역에 중정관이라는 심사관이 천거하고, 능력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나눈 구품중정제(=구품관인법)는 지역 사회 내에서의 여론과 인품에 따른 채용을 하는 향거리선제의 기본 틀을 되살리되 여론보다 다소 낮은 관품을 내린 뒤에 실력을 보고나서 그에 준하는 관품을 내리는 유재시거의 요소를 도입했다.

구품중정제가 시행 초에는 전란으로 흩어진 사족을 재규합하고 묻혀버린 인재들을 발굴하는 등 긍정적인 제도였으나 후대 사마씨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심사관들이 친 사마씨 투성이라 변질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에는 반박도 만만찮다. 중정에게 막강한 권한이 부여되는 해당 제도의 특성상 일부 가문들의 파벌 정치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훗날 하후현이 지적했듯 추천한 사람은 피추천자의 역량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인재 임용의 기준도 불명확한 등 구품중정제의 폐단에 대한 제도적인 안전장치가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 조비 본인은 죽기 직전까지 대규모 남정을 계획하고 있었으니 이에 대한 재고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조예는 비록 조비와 달리 상당한 전략안을 보이긴 했지만 문제는 후계자로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황제가 되는 등 권력 기반이 불안했다는 점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고명 대신의 권위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사 제도의 대대적인 개편은커녕 사마씨의 문벌화에 박차를 가했다. 조예 사후 조방 대에 들어서야 하후현, 하안을 중심으로 하는 조상 내각이 개혁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미 이 시기에 들어와선 최소한의 안전 장치라도 마련하자는 주장마저 사마의에게 거부당할 정도로 문벌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어 있었으며, 조상 내각은 미숙한 국정 운영으로 난항을 겪다가 사마씨의 정변(고평릉 사변)으로 역관광을 타면서 위나라 자체가 멸망한다.

물론 구품중정제로 세력을 키워 찬탈에 성공한 사마씨의 진 왕조도 구품중정제의 폐단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이후 중국 역사는 남북조시대라는 혼란 속에서도 구품중정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후 통일 왕조를 건국하면서 강력한 중앙 정부를 완성한 수나라 문제 때에 과거 제도를 도입했지만, 그 또한 반발에 부딪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송나라 들어서야 겨우 안착되었다. 이렇듯 구품중정제 자체를 비판하는 주장에 따르면 구품중정제가 첫 시작부터 잘못되었으며, 개선할 기회를 수백 년간 얻지 못하고 폐단만 늘리다가 수 문제 대에 이르러서 간신히 폐기된 제도라고 보기 때문에 조비의 구품중정제 도입에 대해서도 크게 비판한다.

3.9. 조비의 남방 정벌[편집]

손권이 모반을 일으켜서 공격했지만 이 모반이란 게 결국 아들(세자 손등)을 볼모로 보내라는(임자) 것을 거절한 것이다. 손권은 이미 이전부터 사실상 독립 세력이었고, 조비에게 신종을 한 것도 촉한의 공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오나라가 단독으로 이릉대전에서 촉한을 물리쳤으니 조비는 거의 도움이 안 됐다. 이런 상황에서 볼모를 보내라니 거절할 만도 하다.

손권은 조비군이 남하하자 으레 그렇듯 "스스로 잘못을 고치게 해달라. 사면되지 않는다면 땅을 바치고 교주로 돌아가겠다."라고 엄살을 폈고, 조비는 또 "삼공이 그대의 과실을 보고했는데, 모두 근거가 있었다."며 살살 달래고 대신들에게 탓을 넘기면서도 손등을 볼모로 보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침에 손등을 직접 수도에 도착하도록 하라. 그러면 저녁에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오도록 할 것이다. 이 말의 진실은 드넓은 장강(大江)과 같도다!"

물론 손권이 그 말을 또 들을 리가 없다. 손권은 아예 스스로 연호까지 정하며 사실상 독립 선포를 한 다음 대치 상황을 계속했다. 이때 조휴 등이 여범을 상대로는 호투를 했으나 계속된 대치를 뚫지 못하고[14] 강릉에서 주연이 분투하고 유수구에서 대장군 조인이 주환에게 깨지고 하제 등의 원군이 도착하자 결국 실패하고 만다. (222년)

다음해 정월에는 조비군이 강릉의 모래톱을 점거했으나, 손권이 강하산에 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상조와 조태(조인의 아들)는 주환에게 격파되었다. 결국 3월 8일 조비는 완성에서 궁으로 돌아왔다. 그 달 19일, (작년 11월에 대사마로 승진한) 조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달 역병이 크게 유행했다는 기사를 보아 역시 장강의 전염병을 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남정에서는 자기 자신의 용주도 폭우에 휘말리며 거의 전복당할 뻔하고 수많은 설레발 끝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퇴각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조비가 224년 9월에 "저 같은 인물이 있으므로 도모할 수 없겠나."라고 한 걸 보면 〈연의〉의 묘사처럼 크게 깨지진 않았으나 여하간 원정에 실패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225년에는 포훈의 말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원정을 했다가 결국 제대로 된 싸움도 못하고 퇴각한다. 퇴각하는 루트에 있던 강도 수량 때문에 제대로 된 퇴각도 못하고 가는 길에 손소한테 얻어터지는 등 생고생을 했다.

위왕 승계 직후의 열병까지 생각하면 거의 매년마다 원정에 실패했던 것이다. 기주의 기근 등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진행했던 마지막 원정에서도 실패하여 돌아온 조비는 226년 정월 허창에 도착하려 할 때 허창성의 남문이 이유없이 무너지자 불길하게 여기고 낙양으로 들어갔다.

여름 5월 16일, 위독하여 낙양 가복전에서 붕어하니 향년 40세였다. 유조는 진군 대장군 진군, 정동 대장군 조휴, 무군 대장군 사마의에게 내려졌다.

3.9.1. 남방 정벌에 대해서[편집]

조비는 즉위 이래 5년간 일관되게 남방 정벌 사업을 벌였으나 되려 성과는 없었다. 진공 루트는 일관되게 오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릉의 패전과 유비 사후 촉은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 상태였고, 촉으로 들어가기는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문제기〉를 보면 초반의 내정 수습책을 제외하고는 계속 남방 정벌 이야기만 나오는데, 세세한 기록이 없을 뿐이지 한마디로 패전의 연속이다.

어떻게 보면 성격적 문제에 비해 가장 알려지지 않은 조비의 실패점이다. 이는 대부분의 기전체 사서가 그렇다 시피 기록이 세세하게 분할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리기가 쉽지 않고, 영토를 주고받지 않다보니 세력 판도에도 큰 변화가 없었던 데다가 적벽대전, 이릉대전처럼 한 번에 왕창 말아먹은게 아니라 몇년에 걸쳐서 꾸준히 말아먹었기 때문에 '대참패'라는 이미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의 매년 전쟁하러 나갔다가 지고 돌아왔으니 패배의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비의 무리한 원정은 '손권 좋은 일'만 시켜줬다고 볼 수 있다. 소위 '위나라 황제'라는 조비가 '자칭 오왕'이었던 손권을 몇번이나 공격하고도 제대로 이기지도 못하고 매년 패배만 거듭했으니, 후한의 정통성을 이었던 위 황제의 위엄이 떨어지는 결과는 당연하고, 오나라에서는 지역의 군사적 수호자로서 손권의 정치적 입지는 급상승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게다가 손권은 이전부터 조비가 사치하고 부도덕 하다고 비판하고 자신의 도덕적 명성을 올리는 프로파간다 작업을 하고 있었다. 결국 조비 사후 몇년 뒤에는 손권이 마침내 황제에 등극했으니, 조비의 무리한 원정이 떡밥처럼 작용해서 '손권의 명성'만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이 남방 정벌은 큰 나비효과가 되는데 조비가 오를 치느라 국력을 낭비하는 사이 촉한은 익주지방의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금세 예전의 국력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외부 원정까지 할 정도로 급성장 한 것이다. 조비가 죽은 후 아들인 조예는 아버지의 뻘짓으로 인해 고생을 해야했다. 국력을 회복한 촉한이 제갈량의 지휘 아래 계속해서 위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침공을 받은 오 역시 빡쳐서 촉한과 연합해 위의 국경을 침입했다. 이 때문에 조예는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오나라와 촉한의 침공을 막는데에 써야했다.

4. 인간성[편집]

여러모로 인간성에 문제가 많았다. 당장에 이 항목에 인간성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 무척 많다. 여러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조조가 조식을 오랫동안 후계자로 고려한 것은 이 인간성 문제도 있었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의 우려대로 이 인간성으로 인해 방계종친인 하후상을 죽음으로 내모는 최악의 선택을 저지르고, 아들의 인생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어 초반부터 위나라 멸망의 씨앗을 제대로 뿌리게 된다.

4.1. 치졸함과 뒤끝[편집]

조비는 알기 쉬운 성격이었다. 흔히 사이코니 뭐니 하지만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라고 불리는 공감능력 결여된, 정신병리학적으로 문제있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랬다면 조조가 세자로 책봉했을 리 없다. 그저 인성 교육 잘못 받아 인격이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수저 재벌 2세 생각하면 간단한데 자의식이 강한 데다 귀하게만 자라 쓴소리 싫어 하고, 한번 찍힌 사람은 한참 뒤까지 기억했다 기어이 보복했고, 친한 사람에겐 지나칠 정도로 오지랖이 넓었는데 속좁고 유치해서 문제가 될 뿐 그렇게 행동하는 동기자체는 이해 가능한 것들이었다. 다만 워낙에 인성질을 많이 벌였기에 삼국지 관련 커뮤니티 사이에서 사이코란 별명이 붙었는데 이게 워낙 찰지다보니 널리 퍼지게 된 것.

아무튼 그래서 붙은 별명이 싸이코패스, 조막장 등등 좋은 별명은 없다.

몇몇 부분은 조비의 입장,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할 문제도 있기에 몇몇 인물에 대해서는 다른 시선도 서술해두었다.
  • 장수
    우선 형 조앙을 죽인 책임을 물어 장수를 몰아붙인 끝에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장수전〉에 주석으로 나온다.[15] 실제로 이때 참전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가 이복형인 조앙을 잘 따랐는데 이때 조앙의 죽음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겨서 사람이 비뚤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조조는 대국적인 국면을 보고 그를 받아주었지만 그건 원소와의 전쟁을 앞두고 기반이 원소에 비해 부족했던 조조의 입장이고 조비라고 해서 똑같이 그를 용서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조비는 조조와 같이 완성에 있으면서 형과 사촌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봐야 했고 장수에게 자신의 목숨마저 위협받았다. 이 가설대로면 연회 중에서도 계속 그를 쏘아붙이고 몰아댔던 것도 큰형에 대한 마음의 부채 문제로 보아야 할 지도 모른다. 조비 본인도 목숨의 위협을 받았으니 설령 장수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든 조비에게 제거되었을 것은 거의 확실하며 심지어 조조 본인도 조앙의 죽음에 대해 자책했던 만큼 언제까지나 그를 가만히 놔두었으라는 보장은 없다. 당장 장수의 아들도 조조가 위왕이 되었을 시절에 위풍의 난에 휘말려 죽지 않았던가.[16] 이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이 정도까지 조씨와 감정적으로 골이 났는데도 문제 없을 거라고 장수에게 투항을 권유한 가후가 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 (?)
    야사에 있는 이야기지만 그의 성품은 에게조차 자비롭지 못했다(…). 유명한 관상가 주건평은 앞서 주석에서처럼 조비의 수명도 예견했는데, 말의 관상도 잘 봤다고 한다. 한 번은 조비가 외출하려고 말을 밖에서 골라 들여보내도록 했는데 주건평이 "이 말의 상을 보니 오늘 죽을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 주건평의 말이 어찌됐든 조비는 말을 타려고 했는데, 말은 자기가 싫어하는 옷의 향기를 맡고 놀라서 조비의 무릎을 깨물었다. 조비는 크게 화가 나서 즉시 이 말을 죽였다. 사실은 주건평 체면을 살려주려고 죽인 거라 카더라
  • 하후상
    하후상은 조씨 일족의 여자와 결혼했는데, 조씨인 정부인을 놔두고 다른 애첩과 아주 가깝게 지내자 조비는 그 애첩을 죽여버리는 일까지 저지른다. 그래서 결국 하후상은 슬픔에 못 이겨 애첩의 무덤을 파 시체를 껴안는 등 정신 질환을 보이다 죽어버린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조비의 절친이었던 터라 그의 잔악한 성품과 복수심을 알고 있었기에 그 배신감과 공포심이 얼마나 컸을지 자명하다.(딴에는 찔렸는지 하후상을 면회하여 울었지만 애초에 하후상을 그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 조비라 사실상 능욕이나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이는 조비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라고 볼 수 있는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유사시 황실의 보호막 역할을 할 인물이 조진, 조휴 정도로 축소되는 결과가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들의 후손들이 유능했음 다행일텐데, 그 후손은 숙부아버지에 비하면 함량미달의 인물이었고 결국 그 후손의 일파가 사마의 일파에게 숙청당하자 위나라는 바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17] 결국 조비의 행동이 위나라의 멸망까지도 불러 온 셈이다.
  • 왕충
    왕충이 기아에 못 이겨 인육을 먹은 적이 있었다. 조비가 오관 중랑장이던 시절, 조조를 수행하는 왕충이 식인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조비는 광대를 시켜 무덤에서 해골 하나를 도굴한다. 그리고 그걸 왕충의 안장에 매달게 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
  • 우금
    가장 치졸한 장면은 이 부분이다. 아버지 때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명장 우금[18]이 관우에게 항복했다가 손권에 의해 석방되고, 항복 사절과 함께 돌아온 후, 오나라에 사자로 보내면서 가는 중에 조조의 묘에 들러서 참배토록 했는데 그곳에다 미리 관우방덕과 우금을 사로잡는 장면을 그려 두었다. 여기서 방덕은 떳떳한 모습이지만 우금은 비굴하게 항복하는 모습이었고, 이를 본 우금은 울화통이 터져 병을 앓고 죽게 된다. 게다가 사후에 준 시호는 여(厲)로, 시법의 해석에 따르면 "무고한 이들을 살육함(殺戮無辜曰厲)"을 뜻한다.
    우금의 항복에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에서는 우금 항목에 나온 것처럼 갑론을박이 치열하지만 조비가 우금을 죽게 만든 수작은 실로 비열하고 치졸했다는 부분은 전체적으로 의견을 같이한다. 우금의 투항이 괘씸하다면 공정히 처벌했어야 하는데 정신적으로 커다란 모욕을 줘서 홧병에 걸려 죽게 만든 건 일반인이 그랬어도 욕을 먹을 짓인데 나라를 이끄는 임금이 이런 짓을 하면 아랫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배울까. 사마광도 자치통감에서 조비가 우금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 수법의 비열함은 임금이 할 짓이 아니라고 직접 의견을 적었다. 수십 년 조조를 따라 종군하며 크고 작은 공훈을 세웠고, 완에서는 위기에 몰린 조조를 구하기도 했던 장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없는 짓이다.
  • 대릉
    220년 장수교위(長水校尉) 대릉이 문제가 사냥하러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러 차례 건의하자, 문제는 크게 노하여 대릉에게 사형죄를 내렸다가 이보다 한 단계 낮은 형벌로 경감시켰다. 이 사례처럼 조비는 수렵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황제가 수렵을 좋아했다는 것은 단순히 황제가 할 일 안 하고 농땡이 부리는 수준을 넘어 백성들에게 심각한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 한 번 사냥갈 때마다 몰이꾼에 호위병에 수천 명이 동원되는 건 예사라 적지 않은 예산이 소모되었고, 더 큰 문제는 사냥터는 대개 도읍 주변의 민가와 논밭을 밀어버리고 만들었다. 21세기에도 국책 사업에 피해입은 시민들이 제대로 보상 못 받는 일이 수두룩한데(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이 시절에 피해입은 백성들에게 제대로 보상이 되었을 것 같은가? 괜히 사서에서 왕이나 황제가 나 사냥갈래 하면 충신들이 일어나 아니되옵니다 외치는 게 아니다. 참고로 연산군이 백성들에게 가장 크게 끼친 민폐가 다른 게 아니고 사냥이었으며, 충혜왕도 사냥에 탐닉했다는 기록이 있다.
  • 소칙
    조비가 사냥을 나갔을 때 나무 울타리가 허술해 사슴이 울타리를 넘어 도망치자 분노한 조비가 칼을 뽑아서 감독하는 관리들을 전부 잡아들여 죽이려고 했다. 소칙이 머리를 조아리고 조비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언하자 조비는 소칙에게 그대는 충직한 신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얼마 후 소칙을 타지로 좌천시켜 버리고(!) 소칙은 임지로 가던 길에 사망한다.
  • 두기
    악사 두기(杜夔)가 주종공(鑄鐘工) 시옥을 벌받게 하자 시옥과 친했던 조비는 두기에게 나쁜 감정을 품었다. 또한 일찍이 두기에게 좌전 등과 빈객들 가운데서 생황을 불고 금술을 타도록 명한 적이 있었는데, 두기가 곤란한 기색을 하였었다. 그래서 조비는 두기에게 불만이 있었다. 이후 조비는 다른 일을 이유로 하여 두기를 체포하여 옥에 가뒀고 두기는 면직된 상태에서 죽었다.
  • 조홍
    상술한 우금과 함께 가장 치졸했던 부분이다. 어렸을 적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삼촌인 조홍을 미워했으며[19] 나중에 황제가 되자 사형시키려 했다. 어머니인 변씨가 조비를 질책하자 간신히 조홍의 면직으로 끝났다.(곽여왕에게는 만약 조홍이 처형당하면 넌 황후 자리 보존 못한다고 압박해 곽여왕이 조비에게 애걸복걸했다.) 조비는 처음에는 조홍을 석방한 대신 재산을 몰수했는데, 변씨가 다시 조비를 힐난하자 재산도 돌려줬다. 이 때문에 조홍이 재물에 인색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사실 조카가 자꾸 돈 달라고 하면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고, 조홍이 위의 태조인 조조를 구한 적이 있는 데다가 개국 공신 중 한 명인 걸 생각해보면 금전 관계로 개국 공신 겸 아버지의 구원자 겸 삼촌을 죽이려 한 조비의 인간성이 눈에 선하다. 이 일은 조조의 목숨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으며 이때 조홍이 없었으면 이때 4살이였던 조비는 하술한 것처럼 그가 "가짜 자식"이라고 비하한 그의 의붓 동생이자 매제인 하안 꼴 날 뻔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때는 하후돈도, 하후연도, 조인도 없는 상태에서 일가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가장 오랫동안 짬밥을 먹은 자가 조홍이다.(232년까지 살았으니 1세대 조씨 일가 및 친족 장수들 중 가장 오래 살았다.) 당장 중신들 대부분이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할 지경이니…거기다가 예전에 조홍이 조진에게 살쪘다고 놀린 적이 있었는데 하필 조진이 옆에 있을 때 조홍을 구금했고, 찔끔한 조진이 "폐하 이러면 제가 조홍을 모함한 줄 알 거 아닙니까?" 이라고 말렸지만 조비는 "내가 내 맘대로 처벌하는데 니가 뭔 상관?" 이라고 씹었다고 한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조비가 돈 빌리고 안 갚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20] 가까스로 풀려난 후에는 조비를 칭송하는 아부성 가득한 글을 써서 바쳤는데, 말년에 억울하게 감옥살이 및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았고, 조비 성깔을 잘 아니 무서워서가 아닌 더러워서 피한다는 심정으로 저런 글을 바쳤을 가능성이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조비는 조홍을 괴롭혔던 그해에 세상을 떠나고, 조홍은 6년 더 조비보다 장수하면서 세상을 떠나 나름대로 복수했다.
  • 포훈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조조를 초창기에 지지하고 지원해주었다. 조조는 승상이 된 후, 포신의 공을 기려 그의 아들 포소와 포훈을 후하게 대우했다. 그러나 포훈은 조비의 첩이었던 곽여왕의 동생이 도둑질을 하자 봐달라고 하는 조비의 부탁을 무시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서 사형시켰다. 조비가 조조의 상중에도 사냥을 다니자 이를 절제해달라고 표를 올렸으나 조비는 표를 직접 찢어버리고 사냥을 나섰다. 이후에도 간언을 많이 해서 조비에게 밉보였고 조비는 트집을 잡아 포훈을 잡아 들인다. 재판하는 관리가 징역이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조비는 자의적으로 법을 위반해서 사형시킨다. 대신들이 공동으로 표를 올려 선처를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 포훈이 죽고 그 집을 가보니 사사로이 모은 재물이 하나도 없었고 사람들은 그 억울한 죽음을 슬퍼했다. 보면 알겠지만 사냥 때문에 연루되어 죽은 신하만 해도 대릉, 소칙, 포훈 세 명이나 되는데 조비가 얼마나 사냥을 광적으로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자기 아버지는 인재 모으기에 혈안이 된 사람인데(정작 자기에게 필요없어지거나 거슬리면 가차없이 죽인 건 아들에게 유전시켰다) 정작 자식이라는 양반은 사냥 따위로 인재들의 목을 날리고 있으니...
  • 양준
    양준은 조조에게 자신과 조식을 칭찬하면서도 조식이 아름답다고 말한 이유로 한스럽게 여겼다가 완의 수레를 이끌고 갈 때 저자거리의 열기가 가득하지 않다는 죄목을 달아서 자살하게 만들었다.
  • 순운
    조식과는 친하면서 자신과 친한 하후상과는 사이가 나빴다는 이유로 미워했다고 한다. 허나 조비는 순운의 자식들을 총애했고 순운 자신도 조조의 부마였던 것을 생각하면 단순히 순운 본인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보인다.
  • 하안
    조비는 금향 공주의 남편 하안을 싫어해서 살아있는 동안 관직에 얼씬도 못하게 만들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조비가 하안이 얼굴에 분을 칠하고 다녀서 얼굴이 하얀 것이라고 여기며 망신을 주기 위해 여름철인데 뜨거운 국을 자리에 내오게 했다. 하안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건(혹은 옷소매)으로 얼굴을 닦았는데 얼굴이 더욱 희었다고 한다. 하안이 문제가 많고 사치스러웠으며 청담을 논했고 조상 일파였으니 탄압되어도 마땅하다고는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하안 문서에도 볼 수 있듯이 그가 무조건적으로 막장인 인물로만 볼 순 없고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다. 오히려 전반적으로 친지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심하게 보인 조비 본인의 성향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사리에 맞을 것이다.
  • 정의, 정이 형제
    조비는 오빠로서도 굉장히 나쁜 축에 들어간다. 정의가 원래 조조의 딸 청하공주와 결혼하기로 하던 걸 조비가 반대했는데 그 이유라는 게 한쪽 눈이 먼 정의는 너무 못생겨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곤 자기랑 친한 호색한에 인간성도 능력도 바닥인 하후무와 혼담을 넣어 청하공주와 결혼시켰고 조조는 뒤늦게 정의의 재주를 보고 "정의가 장님이라 할지라도 그를 사위로 삼았어야 했다, 조비가 내 결정을 망쳤다."며 후회했다. 물론 정의와 그의 동생 정이는 조식을 태자로 지지했고 조비는 즉위 후 하후상이 울면서 이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는데도 정의, 정이 형제를 잡아 가뒀다가 죽이고 정의, 정이 형제의 집안 남자들은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죽였다.(위에 하후상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조비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하후상을 아주 대놓고 엿을 먹인 것 뿐만 아니라, 이것 때문에 하후상을 죽게 했고, 이는 위나라 황실의 앞길까지 제대로 망치게 되는 최악의 결말로 귀결되게 된다.)
    물론 정씨 형제는 양수와 함께 조식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고 조조가 그를 태자로 세우려 할 때, 정의와 그의 동생 정이도 조식에 대해 좋게 말하여 조비에게 밉보이며 정의는 조비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최염모개를 탄핵해 실각시킨 장본인이었으므로 조비 입장에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대파를 숙청하는 부분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애시당초 최염과 모개는 조조의 찬탈에 걸림돌이 되어 죽은게 크고 조비가 이 혼담을 반대한 탓에 정의가 빡쳐서 조식파로 들아간 것이므로 선후 관계를 따지면 조비가 자신의 편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알아서 적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다. 거기에 그렇다고 하후무를 선택해서 짝지어준 것은 옳은 결정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하후무는 이후 첩을 늘려서 청하공주와 사이가 나빠지고 공주를 돕는 사람들의 참소로 죽을 뻔 한다. 정의가 얼마나 좋은 남편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저 행위로 인해 여러 사람 인생 망쳤다.
  • 문소황후
    조비가 첩을 늘리고 이들에게 총애를 쏟아 본처인 문소황후가 소외되자 실의에 빠진 문소황후는 조비에 대해 원망의 말을 말했다. 그러나 이 행동이 조비의 노여움을 사 조비는 문소황후에게 자결을 명령했다.[21] 그리고 이것 때문에 아들의 인생과 위나라 황실의 앞길까지 제대로 망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다.

4.2. 불효자[편집]

한무제 이후 본격적인 유교질서의 장려로 당시 지배층 사이에서는 유교 도덕이 매우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었고 조비 자신도 통치 정당성을 얻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교 도덕과 장유유서의 질서를 강조했으나, 그에 걸맞은 행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버지 상중에 잔치하고, 사치품 모았으니 불효자라는 게 아니라 대국을 이끌어 가야할 정치가인데 자제력이 너무 부족해서 문제인 것이다. 국가이념 및 황권과 관련된 정책을 실행하려면 뚝심을 가지고 행동거지 하나하나 절제해서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게 중요한데 행적을 보면 기본적인 식욕과 물욕을 못 참았다.

세자로 낙점받은 뒤 체통도 잊고 신비를 끌어앉으며 기뻐했다는 일화, 맹달의 투항을 받은 뒤 신하들 모인 자리에서 촉에선 고기를 꿀에 절여 먹는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일화, 그리고 아래 일화들을 보면 조비는 나이먹고 황제가 되어서도 어린 아이 같은 면모가 남아있었고 그로 인해 기본적인 욕구들을 잘 참지 못했다.
  • 조조가 죽자 유비가 조의금 조로 예물을 보냈는데, 조비는 오히려 사신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반대로 유비가 보내준 선물을 받고 특히 허리띠가 훌륭하다는 편지를 보냈다는 얘기가 있다.
  • 220년 갑오일에 고향인 에 가서 관현은 물론 백성들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축제를 벌였다. 고향 땅에서 군주가 축제를 벌이는 일이야 뭐가 문제인가 싶지만 이때가 조조의 삼년상 중이었다. 그것도 바로 조조가 죽은 그 해. 당시에도 삼년상을 정석으로 치르는 일은 드물고, 또한 위정자이기 때문에 제대로 치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긴 했지만, 이럴 경우 삼년간 음주가무를 피하는 것이 기본이고 이미지를 위해서라면 간간이 효성으로 회자될 만한 쑈를 하든가, 하다못해 먹는 거라도 단출하게 하여 자신이 효자라는 이미지를 가꾸는 게 정치적으로 몹시 유리한 상황이었다.[22] 그런데 이미지 관리는커녕 축제를 즐기고 자빠진 것이다. 위진남북조시대 동진의 역사가인 손성이 "왕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오래 못 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깔 정도.
  • 다음 해인 221년에는 업에 있는 조조의 무덤에 가지 않고 낙양에 있는 건시전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민간의 제사와 동일하게 제사를 지냈다. 조조는 죽을 당시 위왕이었고 조비가 선위를 받아 황제로 오른 뒤에 태조 무황제로 추증까지 했으니 제왕의 격식에 맞는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귀찮다고 평민과 같은 방식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다.
  • 손권은 형주 침략 이후 조비와 화친을 맺은 뒤에 오왕으로 책봉받았다. 이에 신하인 조자를 보내 감사를 표시하고자 했는데 조비는 온갖 사치품을 요구했다. 문제는 이때가 조조의 3년상 기간 중이었다는 것. 이에 오나라의 신하들은 보내는 물품에 대한 규정에 있어 예법에 맞지 않으므로 거절해야 한다고 했지만, 손권은 격노한 유비를 막느라 위의 군주인 조비에게 의존해야하는 상황이라서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무례하고 굴욕적인 상황에서 손권은 아비의 복상 기간 중에 사치품을 구하려는 사람하고 어떻게 예법을 논하겠느냐고 말해서 조비의 체면을 팍 깎아내렸다. 또한 손권은 조비가 요구하는 사치품을 자신에게는 기왓조각이나 돌멩이와 같다고 평하여 자신에게 검소함과 도량을 드러내보였다.[23] 이로서 형식적으로는 손권이 조비에게 조공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손권이 언플을 펼쳐 조비를 "예의를 모르고 불효하며 사치스러워 상대하기도 귀찮은 놈"&"이까짓 거 나한텐 아무 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준다."로 만들어버려서 오히려 조비의 무례함이 손권의 도량과 대비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 정사가 아니라 《세설신어》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조조는 죽을 때 자신의 측실들로 하여금 바느질을 하며 스스로 먹고 살라며 약간의 재물을 주고 귀향시켰는데, 조비가 병에 걸려 생모인 무선황후 변씨가 조비의 침실로 문병을 갔더니 조조의 측실들이 있었다. 왜 이곳에 있냐고 물어보니 조조가 죽은 직후부터 조비가 그들을 불러 살게 했다는 것이다.(!) 경악한 변씨는 자신의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남긴 것은 개나 쥐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조비가 죽고 난 후에도 무덤에 가서 애도하지 않았다. 세설신어는 시대의 유명인사들에 대한 일종에 썰을 담아낸 이야기 모음집이라 역사정 신빙성은 낮은 편이지만 이 썰을 통해 얼마나 조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4.3. 나쁜 형[편집]

조조는 조식, 조창, 조비보다도 마음에 들어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조충이며 10대 초반에 일찍 병사했지만 굉장히 사려 깊고 지혜가 뛰어나 조조가 이미 후계자로 마음 두고 있었다 한다. 조비가 제위에 오른 후에 '만약 창서(조충의 자)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천하를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종종 얘기했을 정도. 조조는 조충이 죽자 남은 자식들에게 '조충이 어린 나이에 죽은 게 나에게는 불행이나 너희들에게는 행운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문무 양방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두루 보인 조조의 자식들 답게, 조비의 형제들은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위에서 보듯이 조비 역시 나름대로 능력을 타고 났으며, 무엇보다 조앙과 조삭의 사망으로 인한 것이긴 하나 장자의 자리를 타고 났으니 나름대로 행운아라고 할 만 하다. 그러나 동시에 유능한 아우들과 비교되어야 했던 불운아이기도 했다. 이 중 조비와 가장 갈등을 많이 빚은 형제들은 칠보시로 유명한 조식과 오환족을 토벌한 것으로 군사적 재능을 입증한 조창이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무선황후의 아들이었다.

결국 이런 견제 속에 왕(그리고 황제)이 되고 난 후에는 형으로서도 최악을 보여줬다. 조식과 조창 등의 형제들을 경계하여 각각 왕위를 줘서 지방 임지에 묶어두고 감시하면서 수도로는 올라오지도 못하게 했고, 벼슬이나 일도 맡지 못하게 했다.
  • 조웅(?)
    또 다른 동생인 조웅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연의의 각색이다. 조웅은 그냥 요절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것을 조비가 조조 사망 직후 겁박해서 목을 메어 자살했다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면서 소회왕 역시 조웅이 죽자 후회해서 내린 직위로 바뀌었다. 이때 연의에서는 조식을 죽이려는 와중에 어머니 변씨 역시 등장하여 "웅이가 죽더니 이젠 식이까지냐? 피눈물을 더 흘리지 않게 해다오"(…)라고 말했으며, 결국 죽이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화흠이 건의한 칠보시로 결정하는 것으로 나온다. 여하간 조비는 조웅을 겁박하진 않았다. 사실 이 부분은 조비에게 억울하다면 억울하겠지만 다른 아우들 거의 대부분에게 가혹했던 건 사실이기도 하다.
  • 조식
    후계자 쟁탈에서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조식에게 "일곱 걸음 안에 형제를 소재로 시를 지어라. 다만 그와 관련된 글자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라면서 칙명을 내리고는 짓지 못하면 칙명을 어긴 죄로 죽이겠다고 했다. 이때 지어진 칠보시는 21세기 현재까지 회자되는 명시로, 결국 조비는 조식을 죽이는 걸 포기하고 그를 추방하는 데에 그쳤다. 조식은 왕으로는 봉해졌지만 항상 봉지가 바뀌었다.(견성왕 - 옹구왕 - 준의왕 - 옹구왕 - 동아왕 - 진왕)[24]
  • 조창
    조창이 임지로 돌아가자, 연이어 해마다 식읍을 추가하고(220년), 공으로 봉하고(221년), 왕으로 봉하는(222년) 등 후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수도에 와서 조비를 알현한 뒤 갑자기 병에 걸려서 수도에 있던 관저에서 급서(의문사)했다. 《세설신어》에는 조비가 조창을 독살했다고 나온다.
  • 조간(?)
    레알 막내 동생인 조간에게는 그런대로 너그러웠던 듯하다. 조조가 죽기 전 "조간이는 이제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도 없으니 니가 잘 보살펴 줘라."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아무리 냉혹한 조비라도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조간은 너무 불쌍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조간이 너무 늦게 태어나 후계자 분쟁과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조조가 조간을 본 나이가 60대로 조조가 죽기 몇 년 전에 태어난 격. 조창, 조식, 조충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자신과 다투었지만 조간은 이미 조비가 후계자로 선정된 다음에 태어났다. 나이차 때문에 조간은 조비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하며, 그때마다 조비는 조간에게 "난 네 형이다."라고 고쳐줬다.[25]
  • 청하공주
    이쪽은 동생이 아니라 누나인 경우이지만, 조비는 자기 이복누나를 단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하후무와 혼례를 주선했다. 무능하고 호색한 인간에게 시집을 보내서 누나 인생을 제대로 망쳐놨다.
  • 헌목황후 조씨
    이복동생인 조절은 헌제의 황후였다. 선양을 받아내고 황제에 올라야하니 이복동생 눈치를 볼 여유도 이유도 없었지만 남편이자 황제가 제위와 나라를 빼앗기는 걸 눈앞에서 지켜보던 그녀는 이로 인해 비탄에 빠졌고, "하늘은 결코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다!"는 독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실제로 조비는 요절했고, 조절이 사망할 무렵 위나라 역시 사마 씨에게 집어삼켜지며 멸망한다.

4.3.1. 조비만의 문제인가?[편집]

물론, 친족에 대한 집요한 견제와 권력 약화 문제를 단순히 '조비의 인간성이 졸렬해서' 라고 볼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책적인 문제에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조식은 조비가 확실히 후계 자리를 다지기 전까지 양수 등의 뛰어난 인재들의 지원을 받아 후계 싸움을 벌였으니 고금 제일의 명문장가라는 것을 따지기 이전에 제위 등극 이후에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조창은 맹수와도 싸우는 무골에다 북방 정벌로 잔뼈가 굵은 장수이며 가규와의 대화만 봐도 제위에 욕심이 없는 인물로 볼 순 없기 때문에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런 피비린내 나는 후계자들끼리의 암투는 전 세계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이방원왕자의 난만 봐도 알 수 있다. 동복 형제들은 아니지만 이방원은 자신의 형제들을, 특히 청소년에 지나지 않던 동생 의안대군마저도 죽여버렸다. 그렇다고 태종이 한 행위가 세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악행을 벌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조비의 행적을 상향시킨 듯한 형제 숙청극을 벌인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있다.(그리고 왕조의 말로도 둘이 비슷하다. 사마씨나 호조 씨에게 훅 넘어갔으니) 직접적으로 반란들을 일으켰기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으나 오다 노부나가누르하치도 각각 동복 동생 노부유키나 슈르하치를 처형했으며, 명군으로 추앙받는 오스만 제국셀림 1세는 자신의 형제들을 몰살시켰다.[26]

당장 조조가 원소와 전쟁을 했을 때 승리한 결정적인 이유가 원소의 급사로 인한 원씨 가문의 분열이라는 것만 봐도, 조비의 조식과 조창 탄압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원담파와 원상파로 나뉘어 원씨 가문은 내전에 준한 상태가 되어버렸으며 결국 조조의 군대에 각개 격파당하고 말았다.

거기에 당시 삼국 시대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 곧 망했어요 테크를 탈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촉한과 동오는 당연히 위에 비해서는 작은 국가들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다는 이야기고 가장 국력이 약한 촉한도 몇 번이고 위로 쳐 들어 올 정도의 국력은 있었다. 무엇보다 이 두 국가는 조비가 황제가 되자 황제를 자칭할 만큼 강한 국가들이었고 혹시라도 위나라가 조창, 조식, 조비의 세 갈래로만 분열되어도 위나라는 큰 위기에 빠지는 셈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조비의 형제 탄압은 욕하기는 그렇다. 어차피 그게 전제 군주의 숙명인 것일 뿐. 그리고 조비는 이거 아니어도 인간성으로 깔려면 깔 거리가 수두룩하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는 비판은 유효하다. 조창과 조식은 매우 유능하고 후계자 물망에도 올랐던 전력이 있으므로 어느 정도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이 둘 이외의 동생들은 딱히 조비를 위협할 만한 위상이나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형제를 연금 상태에 놓고 지나치게 억눌렀다. 왕권 강화를 한 것은 좋은데 덕분에 위나라는 방계 황족들이 매우 약해져버렸고, 이는 사마씨에게 너무나 쉽게 나라를 내주는 결과를 불러왔다. 한 마디로 도가 지나쳤다.

실제로 사마씨의 서진은 조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방계 황족의 힘을 키워 줬는데 그것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 조비가 거국적인 선택을 잘못 했다기보다, 섬세한 강도 조절에서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정책적 문제란 것이 언제나 그렇지만... 정답과 오답이 있다기 보다는, 두 지향 사이에서 적당한 중도의 길을 섬세하게 찾아내는 것이 곧 정답이라고 봐야 한다. 황실 친족의 힘이 너무 강해지면 황권이 위협당하고, 반대로 너무 약해지면 유사시 황실을 지켜줄 세력이 없어지니까, 방계 황족의 힘이 너무 강해지지도, 너무 약해지지도 않고 황제 및 다른 귀족들의 힘과 적절한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바로 정답이라는 것. 요컨데, 조씨의 위와 사마씨의 서진이 내놓은 답은 둘 다 오답으로, 잘못된 거국적 선택이고, 정답은 두 극단적인 답안 사이 적절한 균형이 맞는 곳에 있다고 봐야 한다.

조위는 후한 말 내조를 장악한 환관, 외척과 대립했던 지방 호족들을 조조가 포섭해 성립한 정권이어서 권력 구도에서 환관, 외척은 철저히 배제했다. 그런데 거기에 황족들까지 배제해버리니 황권과 신권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황실을 수호할 세력이 미약했다.

그나마 조비는 군권과 내조에 조씨 일족과 세력 기반이 약한 호족들을 배치하며 균형을 꾀했고, 그 뒤를 이어 받은 조예는 최소한 자기 대에서 자기가 부리기엔 문제가 없는 정치 지형 속에서 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예 말 이 균형이 본격적으로 무너지면서[27]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나라를 내주게 된다.

조비에 대한 비판이 주가 된 이후의 팬덤에서는 조비의 친족에 대한 견제 부분을 평가하며 조비가 위나라 망국의 근원을 만들었다 는 식으로까지 비판하는 경우도 잦은데, 최소한 조비 시절에는 대사마 조인이 이름 뿐인 태위 가후 대신 실질적 일인자 노릇을 했고 그의 사후에는 대사마 조휴와 대장군 조진이 군부 투 톱으로 대오, 대촉 전선을 책임졌다. 사마의는 명백히 그들보다 아래였다. 그러나 조예 시기 조휴, 조진이 사망하고 조예가 사마의를 전력으로 밀어주면서 무너지게 된다. 대촉 전선에 사마의의 능력이 필요했던 건 맞다. 하지만 조조가 왜 실적이 거의 없는 하후돈을 대장군직으로 삼았는지 생각해보자. 더구나 조예는 후계 구도도 불안정했다.

사실 처음에 조휴와 조진이 동서 전선을 담당한 것은 조예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예 때에도 조휴와 조진이 살아있을 때는 사마의가 이들보다 위를 차지한 적은 없다. 조휴와 조진이 사망한 상황에서 당장 외부의 침입을 막아야 하는데 원칙을 지키겠다고 무능한 사람에게 군권을 주는 것 역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28] 조씨 중에서 쓸만한 사람을 없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조씨들을 핍박하여 내쫓는 정책을 편 조비에게 있다. 뿐만 아니라 하후씨 중에서도 하후상이라는 군재가 뛰어난 인물이 있었지만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그 하후상을 어처구니 없이 죽게 만들어 조예가 쓸 수 없게 만든 사람이 바로 조비이며 조위사우인 사마의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게 된 시기도 조비 시대였다. 즉 조예 시대에 이르러 종친 중에서는 유능한 사람이 부족했기에 사마의가 군권을 잡게 되는 것은, 이미 조비 시대에 그 바탕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비의 친족 약화 정책 하나 때문에 조위가 망했다는 시각 역시 잘못되었지만 조비는 원칙을 잘 켰는데 조예가 사마의에게 군권을 준 것 때문에 조위가 망했다는 식의 시각 역시 결과론적인 해석이라 볼 수 있다.

4.4. 항장에겐 따뜻함?[편집]

  • 맹달
    조비는 촉에서 온 항장들은 아꼈는데, 관우의 죽음으로 처지가 곤란해진 맹달이 대표적이다. 사마의유엽 등이 맹달을 중히 쓰지 말라고 간언했으나 조비는 이를 묵살하고 상용태수로 두고 높은 관직에 앉혔다. 근데 그 이유가 좀 깬다. 이유는 재능도 뛰어나거니와, 무엇보다 맹달이 용모가 뛰어나서. 《정사 삼국지》 〈위서〉에는 맹달의 용모를 좋아했기 때문에 상용 태수 자리를 줬다고 명백히 적혀 있다. 결국 맹달은 조비가 죽자 제발저려서 제갈량과 내통하고 자멸해버린다. 특정 인물에 대해 그 사람의 인격과 능력 따윈 뒷전이고 오로지 외모만 보고 중용을 결정하는 병크를 터뜨렸다. 맹달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대목 역시 그래도 일국의 황제인데 지나치게 외모만 따지는 모습보다는 뭔가 살을 더 붙여주자는 논지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돌려 말한 것.
  • 황권
    이릉대전
    에서 포로로 잡아온 황권의 경우, 유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쌤통이라 여기며 잔치를 베풀면서 다들 크게 기뻐하는 와중에 황권 혼자만 서럽게 울자 이런 황권을 조비는 충의지사라며 총애했다.
  • 전예
    오래전의 항장인 전예에게 신경을 써주기도 한다. 황초 연간(220~226년) 전예가 호를 토벌했는데, 영호준이 전예가 지시를 조금 위반했다고 법으로 잡으려 했다. 조비는 분노해 영호우를 포박하고 벼슬을 파면해 죄를 묻고서 조서를 내렸다. 조비가 조서를 내리면서 영호준은 어찌 그리 멍청하냐고 했기에 우(愚)를 이름으로 삼았다.

사실 어느 왕조나 세력이든 적대 세력으로부터의 항장은 우대하는 것이 정상이다. 아버지 조조도 기본적으로는 쓸모가 있을 경우에 항장을 받아줬으며, 위의 오자양장 중 3명인 장료, 장합, 서황은 본래 항장 출신이고, 문신인 신비도 원소 밑에 있던 사람이다. 황권과 전예에 대한 대우는 딱히 문제될 것이 없고, 맹달에게는 너무 과하게 잘 해줬다.

5. 연의[편집]

연의에서는 오로 침공이 실패한 데다 오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남방 정벌을 감행한다. 촉을 먼저 치자는 중신들의 의견마저 무시하고 그럼 배라도 더 만들자는 사마의의 말에 조선 시설을 풀가동하여 배를 늘리고 바로 삼로로 밀고 내려갔으나 결과는 위에 적힌 대로 와장창.

삼국지연의》는 조비의 찌질함과 원정 실패를 극대화 시키는 등 조비를 까는 데 집중한 편이다. 아무래도 조비가 직접 후한을 멸망시키고 제위를 빼앗은 것과 여러 군주로서의 실책들까지 겸해 디스한 모양이다. 가장 대규모였던 조비의 첫 원정은 육손어복포에서 호되게 당한 뒤 미리 위의 침공을 경계해 바로 물리쳤으며,(육손은 조비의 간사함은 조조 못지 않다고 촉군 추격을 포기하고 위에 대비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2, 3차 원정은 용주를 끌고 장료를 대동하였으나 서성의 가짜 군세에 속아 크게 깨지고 서황의 분투로 도망했으며, 그 과정에서 장료마저 정봉의 활에 맞아 후유증으로 죽어버린 것으로 묘사된다.

6. 기타[편집]

문재가 뛰어나 아버지인 조조, 아우인 조식과 함께 삼조(三曹)라 일컬어졌다. 대표작으로 운문으론 연가행(燕歌行)을 포함한 가 40수. 건안칠자 등도 조비가 선정한 것이다.

저서로 열이기 3권과 문집 23권도 있었다 한다. 그 중 전론(典論)은 동양 사상 최초의 논문(論文)이라고 평해지며, 육조(六朝) 시대에 성행한 문학론의 선구가 된 책으로 원래 5권이었으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어 논문 1편만이 전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시와 논(論)을 읊었고, 자라서는 오경(五經), 사부(四部)를 모두 겪었으며, 《사기》, 《한서》, 제자백가의 말을 두루 아니 본 것이 없었다. - 전론, 배송지주.
보기처럼 자뻑 내용이 매우 심하다.

기록에 의하면 알까기와 비슷한 놀이인 탄기(彈碁)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탄기는 위대 궐내에서 화장품 상자를 사용한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문제(조비)는 특별히 이 놀이를 잘 했는데 수건 모서리로 바둑알을 튕기면 맞추지 못하는 게 없었다. (후략)

태평어람에 기록된 조비의 조서를 보면 조비는 포도를 매우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조비는 포도를 찬양하면서 달콤하고 말랑거리고 상큼하며 맛은 최고에 즙이 많으며 걱정을 없애고 지루함을 풀어 주며 술로 빚으면 취하기도 좋고 깨기도 쉽다고 길게 늘어놓았다. 전반적으로 단 것을 좋아했던듯 한데 예문유취와 태평어람에 그런 조비의 어록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남방의 귤은 시다고 싫어하고 촉의 요리를 언급함으로서 지금의 사천요리 매운 이미지와는 달리 1800년전 촉에서는 요리에 주로 달콤한 재료를 쓴다는 사실을 이로서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훗날 위나라의 실권을 찬탈하고 건국의 기반을 다진 사마의보다도 8살 이상 적다. 사마의가 오랫동안 산 편이긴 하지만[29] 죽은 나이로 따져도 조비의 사망 당시 나이는 사마의 사망 당시 나이의 절반에 불과했다.

아버지 조조와 마찬가지로 조비를 까는 야사들은 당대 혹은 가까운 후기인 육조시대에 이미 범람했다.

7. 평가[편집]

촉빠-위빠 논쟁의 새로운 핵. 어떻게 보면 조조보다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조조 같은 경우는 조조빠든 조조까든 최소한 후한말 미증유의 난세를 어느 정도 수습한 조조의 능력은 인정하는 편으로 의견이 수렴되는데 조비 같은 경우는 인격은 물론이고 능력마저도 심히 평가가 엇갈린다.

일단 인격적으론 소인배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는 인물. 별 이유도 없이 죄없는 신하들을 여럿 잡아서 거인이었던 아버지에 곧잘 비교되곤 한다.[30] 신하라면 모르겠으나 황제였던지라 조비 개인의 인격적 결점에서 오는 기행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났다. 물론 몇몇 사례에서 소인배라고만은 단정짓기 힘든 경우가 있어서 일부 옹호자는 소인배까진 아니고 그 시대의 사이코라고도 일컫는다. 아버지인 조조가 대량 학살을 저지른 것에 비해 신하들을 괴롭힌 수준이면 마일드해지긴 했다

대외 정책에서도 결정적인 삽질을 저질렀는데, 이릉 대전을 앞두고 촉과 오가 적대 관계로 돌아서면서 삼국 정립 이래 통일에는 다시 없을 최고의 호재를 맞았음에도 그 기회를 전혀 살리지 못했고, 선양을 받아 이미 통일 왕조의 황제가 된 것처럼 행세하며 위신 세우기에만 급급했다. 손권이 열심히 비위를 맞춰주며 칭신 의사를 밝히자 대범하게 개입을 포기한 것. 이릉 대전이 끝나고 손권이 더 이상 조비의 장단에 맞춰주지 않자 분노해 원정에 나섰지만 손권이 반성하겠다며 밀당을 걸어오자 원정에 나선 것을 대신들 탓으로 돌리며 손권을 달래는 등 시간만 잔뜩 허비하며 손권에게 농락당했으며, 결국 연이은 남정은 모조리 실패해 천하 통일의 기회를 날려버렸고 국력에 크나큰 손실을 가져왔다. 설상가상으로 그 후유증을 복구하기도 전에 본인이 일찍 죽어버렸다. 즉, 이릉 대전 이후에도 삼국지가 삼국지가 된 것은 조비에게도 일정 부분의 원인이 있다.[31]

조비는 개인적으론 소인배였고 대외적 행보에서도 삽질을 저질렀다는게 기본적 중론이다. 그럼 내치는 어떤가. 여기서도 찬반이 엇갈린다. 조비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조비가 정치, 인사, 행정 제도의 확립과 민심 안정에 힘을 기울여 성과도 보였다고 평가한다. 다만 후대의 삽질로 변질되었을 뿐이라고 보는 편. 반면 비판하는 쪽에선 남방 원정의 실패나 구품중정제의 무책임한 도입 등 대내외적으로 삽질만 거듭했지만, 조조가 유산으로 남긴 권력 기반과 재정 흑자가 워낙 건실했던 데다 이릉 대전이라는 뜻하지 않은 호재까지 누렸기 때문에 이런 삽질들에도 불구하고 당장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을 뿐이며 조위 말기의 폐단들은 조비가 방향성 측면에서 포석을 단단히 잘못 깔아뒀던 원인이 크다는 것. 조비 사후 수십년 뒤 벌어지는 고평릉 사변도 따지고본다면 조비가 도화선을 마련해뒀다고 봐도 과장이 아니다.

팬덤에서는 조조 이상 가는 정치적 역량을 가져 위나라 최전성기를 이끈 유능한 성군이었다는 평가가 주였으나, 두 번 다시 없을 호재를 잔뜩 맞고서도 대내외적으로 거하게 삽질을 저지르면서 삼국 정립 구도를 고착화시켰으며 인간성조차 최악이었다는 점이 조명받으면서 까이는 트렌드가 되었다. 진수의 평가 또한 위 왕조를 정통으로 놓고 있는 이상 초대 황제를 대놓고 깔 수가 없으니 지식이나 기억력 등 개인적인 장점들을 열거한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물론, 아예 대놓고 최소 유선 이하의 암군 급으로 취급된 적도 있었다. 이는 유선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일었던 것도 한몫한다. 이런 비판에 대한 반발로 다시 최소한 내치 면에서는 유능한 군주였다고 조명 받기도 했는데, 이 또한 최훈삼국전투기에서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논란이 계속되었다. 지나친 빠가 까를 부르고, 까가 다시 빠를 불렀으며, 다시 빠가 까를 부른 사례로 봐야 할 것이다.

진수는 조비에 대해 "문제는 천부적으로 문학적 소질이 있었으니, 붓을 대면 문장이 되었고, 넓은 지식도 갖추고 있었고, 기억력이 탁월해 다방면으로 재능을 갖추었다. 만일 여기에 그의 도량이 약간만 더 크고 공평한 마음 씀씀이에 힘쓰며 도의의 존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덕망이 있는 마음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면 어찌 고대의 현군이 멀리 있었겠는가"라고 평했다. 참으로 뼈아픈 평가라고 하겠다. 바로 말하면 '조비가 천부적 재능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도량도 작고, 마음 씀씀이는 개판이며, 천자의 기본 덕목인 도의를 지키는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덕망도 없었으니, 역시 고대의 현군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고도의 돌려까기가 된다(...) 서진이 위나라의 선양을 받아 건국했으니 그나마 좀 챙겨주었을 뿐이다.[32]

8. 미디어 믹스[편집]

[1] 세조는 자치통감, 고조는 정사 삼국지[2] 조비 외에도 조창, 조식 및 조비의 사촌들 대부분도 자는 '자'자 돌림으로 쓴다. 조운 자룡(子龍)[3] 선양 자체의 선례는 예전에도 있었다. 예를들면 춘추 전국시대 연나라 자지의 경우도 선양까지는 성공했으나 왕조 교체에는 실패했다.[4] 다만 조비가 환관을 배제했던 것은 어느 정도의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조위 자체가 조조란 군벌이 탁류(환관, 외척)와 대립하던 청류 호족들을 규합해 구성한 정권이기 때문. 단순한 개인적 호불호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또한 친족을 견제하면서도 안전책을 유지한 조비와는 달리, 조예 말년은 완전히 사마씨에게 퍼주게 되었는데 이 문제를 비판하려면 조예는 조비 이상으로 비판 받아야 할 것이다.[5] 하지만 조비는 황실의 방패역할을 할 방계종친 중 하후상을 죽게 만들면서 이 정책도 온전히 실행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이게 최악의 수로 평가받는 것이 황실의 방패막이 역할을 할 방계종친을 조진조휴 정도로 축소시킨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는 조진과 조휴가 죽으면 이 역할을 할 인물이 전무하다는 것이었고, 결국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만다.[6] 조비, 조창, 조식, 조웅이 모두 변씨 소생이다.[7] 말이 종군이지 그냥 어린애가 아빠 따라왔다가 황천길 갈 뻔한 아찔한 상황이 된다. 조비가 싸이코같은 성격이 되버린 건, 이때의 일로 PTSD를 겪어서일지도 모른다.[8] 원문에는 "初, 曹操攻屠鄴城, 袁氏婦子多見侵略, 而操子丕私納袁熙妻甄氏."라고 되어 있다.[9] 순욱, 조모의 죽음에서도 드러나듯 진수는 정치적으로 민감할 법한 주제는 앞뒤 다 자르고 결과만 언급하는 식으로 통편집하는 성향이 있었다.[10] 조조가 후계 문제로 가후랑 이야기를 나누려 불렀는데,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냐고 하니 원본초유경승 생각을 했다고 답했다. 둘 다 첫째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가 망한 인물들로, 이에 조조는 그 뜻을 알아채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11] 물론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면 가혹한 결과가 기다릴 테니 기쁨을 드러내는 게 이상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12] 6월 ~ 10월 동안 군대를 운용했는데, 10월 4일 헌제가 한고제 유방의 릉에 제사 지내고 선양을 거론했다.[13] 자신이 직접 '허도'에서 '허창'으로 개명했다.[14] 조휴에 의해 장패가 서릉을 습격했으나, 전종, 서성은 윤로의 목을 베는 등 전황은 일진 일퇴했다.[15] 《위략》에서 형을 죽인 네가 뻔뻔하게 말을 거냐는 식으로 쏘아 붙였다고 한다.[16] 조조란 인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타고난 예술가 기질로 인한 감상적인 면인데 말년에는 이게 심해져서 주변인들의 죽음 혹은 위협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연주목 때부터 따랐던 측근 왕필이 경기, 위황의 난으로 죽었을 땐 거의 조숭 죽었을 때만큼이나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순 말도 안 되는 OX 문제를 낸 다음 한바탕 도살극을 벌였고 한중에서 하후연이 죽었을 때도 정신줄을 놓았으며 조인이 번성에서 위협에 빠지자 멘붕와서 대오전선 방위도 무시하고 합비의 장료까지 빼냈다.[17] 만약 하후상이 죽지 않았다면 조진과 조휴가 연달아 죽었어도 사마의에게 병권이 가고 이로 인해 사마씨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늘어날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 아들도 유능했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황제를 상대로 사마씨 일파가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을것이다.[18] 《촬요(撮要)》의 기록이다. 흥미롭게도 이 대목은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에서도 등장하는데, 영락제건문제를 두고 일으킨 정난의 변에 대한 당시 정황과 연관되어 있다. 항목 참조. 여기에 따르면 유엽은 손권이 훼이크치는 거라며 믿지 말라고 했는데 조비는 낚였다는 식이다.[19] 비단 100필을 달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20] 냉정하게 생각해서 아무리 부자라지만 조카가 계속 돈 빌려가면서 갚으려고 하지 않으면 어떤 삼촌이 돈을 빌려주고 싶을까. 또한 조비 성격상 푼돈이 아닌 거금을 매번 빌려가고 안 갚았을 가능성이 높다.[21] 다만 배송지는 이 기록에 관해서 숨겨서 쓰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라 평했고, 실제로도 자세한 정황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문소황후의 죽음에는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배경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것은 문소황후 항목 참고.[22] 원소는 삼년상을 두 번이나 묵묵히 하여 명성을 얻어냈다.[23] 실제로 손권은 세종대왕도 본받아야한다며 칭찬할만큼 검소했다. 그게 너무 과해서 궁색해보인다는 평도 있지만.[24] 다만 조비가 바꾼 것은 견성에서 옹구로 한 번이고 나머지는 조예가 바꾸었다.[25] 사실 이론적으로는 15세에 결혼해서 그해에 자식낳고 그 자식이 또 15세에 결혼해서 자식을 낳을수 있으니 30세에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게 영 불가능한건 아니다. 근데 이건 거의 불가능한거고 대체적으로는 적어도 40~50대쯤 되어서야 들을수 있다.[26] 오스만 제국은 예전부터 형제 숙청이 불문율이었기에 유달리 지독했던 면은 있다.[27] 조비 시절까진 경력이 별볼일 없었던 사마부에게 도지상서(재정부 장관)직을 하사하는 등 다방면으로 힘을 실어줬다. 군사, 재정이라는, 국가에서 가장 주요한 두 분야에서 강한 푸쉬를 받은 사마씨는 구품중정제로 완전히 특권 계층으로 자리잡은 호족들의 대변자가 되어 세를 착실히 불려간다.[28] 조조가 군재가 뛰어나지 않은 하후돈을 대장군으로 임명한 것과는 애초에 비교할 바가 못되는 것이, 조조 때에는 하후돈이 아니더라도 그를 보좌할 수 있는 뛰어난 종친들이 충분했다.[29] 오래산 편이긴 하지만 90대 중반에 사망한 동생 사마부같은 사람도 있고 위나라 중신중에 조조-조비-조예 3대에 걸쳐 활약한 사람이 워낙 많아서 특출나게 오래산 케이스는 아니다.[30] 정작 그 아버지 조조도 자기 비위에 거슬리거나 쓸모없어지면 구실거리를 만든 후 토사구팽 해버렸다는 비판점이 있다. 그나마 아무나 막 토사구팽을 한 건 아니기는 하다.[31] 조비가 이릉 대전 후에 대외 원정을 적극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것에는 종친들을 두려워했다는 견해도 있는데, 조비는 위왕 즉위 직후부터 종친들을 무력화시켰으므로 큰 설득력은 없다.[32] 기본적으로 정사가 조위정통론을 내세우고 있으며 정사가 나온 시기인 서진은 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주장했기에, 조위의 창업주라 할 수 있는 조조와 본격적인 선양으로 왕조를 개창한 조비를 띄워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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