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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廉東振
(1902년 2월 14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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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낙양군관학교 생도 시절 [1] |
1. 소개[편집]
염동진은 1902년생으로 평양 출생이다. 본명은 염응택(廉應澤)이다. 그리고 1933년 남경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제1기 입학한다. 이범석이 당시 생도 대표였다고 한다. 또한 눈이 멀었는데 이건 가족들이 공산당의 손에 죽고 고문에 의한 후유증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공산당을 혐오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2]
입교 자격 심사는 김구, 이청천, 김원봉이 했는데 신익희의 추천으로 입학한다. 신익희[3]와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나중에 중국 국민당이 임시정부를 해 생도들에게 11원씩 주었는데, 여기서 말썽이 생겨 폭동이 일어나자 염동진은 가담했다가 남경의 신익희에게 피신한다. 45년 조선으로 돌아온 염동진은 대동단을 결성하는데. 1919년 설립된 조선민족 대동단과는 다른 단체다.
백의사를 싫어하는 진보 쪽에서는 염동진이 친일 행적이 있다는 주장을 하지만 이것도 구체적인 증거가 없고, 대체로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4]
임시정부 요인 박찬익의 동생이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조선에 와서 스님이 된 박고봉은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 대항할 조직을 만들자고 해서 만들었다. 월남한 그는 신익희의 측근인 조중서를 만나 백의사의 방향을 정했다. 백의사는 대동단의 후신이라지만 그와 연계된 정치공작대의 중앙본부장은 신익희, 행동대장에 조중서, 사령에 염응택(염동진), 부사령 박경구, 총무부장 유진산, 청년부장 조용진이었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스스로 피난을 거부, 그대로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 의해 행방불명이 되었다.
2. 미디어 믹스[편집]
2.1. 야인시대[편집]
염동진(야인시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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