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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

배중진 2013. 1. 17. 23:37

 

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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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
찰스 1세의 초상화
찰스 1세의 초상화
잉글랜드의 왕
스코틀랜드의 왕
재위 1625년 ~ 1649년
왕비 프랑스의 헨리에타 마리아
이전 왕 제임스 1세
다음 왕 공석
(사실상 올리버 크롬웰)

찰스 1세(1600년 11월 19일~1649년 1월 30일)는 1625년 3월 27일부터, 1649년사형 당할 때까지 영국을 통치하던 이다.

스코틀랜드 던펌린에서 출생한 그는 의회와의 권력 다툼으로 유명하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지지했고, 절대 권력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많은 영국인들은 그를 두려워 했고, 그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특히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강했다.

찰스 1세의 통치 기간은 기독교적 갈등으로 가득했다. 의회와 여론의 반대에도 그는 영국 종교개혁이후 탄압받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자인 헨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했다. 찰스는 더 나아가 영국 성공회 성직자리처드 몬타규, 윌리엄 로드 대주교와 유대를 강화했다. 찰스는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했다. 로드 대주교는 성공회에서 감사성찬례성사집전에 사용하는 성공회 기도서를 개정하였다. 찰스의 많은 신하들은 개정된 기도서 내용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 너무 비슷하다고 느꼈다. 찰스는 이후 장로교를 믿는 스코틀랜드사람들에게 영국국교인 영국 성공회를 강요하는 종교 개정을 단행했는데,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 전쟁은 영국을 약화시켰고 그의 몰락에 결정타였다.

그의 통치 말년은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으로 얼룩졌다. 그는 의회파(그의 권력에 도전), 청교도(그의 로마 가톨릭우대 정책에 반대)와 맞섰다. 제1차 영국 내전(1642년~1645년)은 찰스의 패배로 끝났고 의회파는 그가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이길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제2차 영국 내전(1648년~1649년)을 일으켰다. 결국 재판에서 그는 대역죄사형을 받았다. 향년 49세.

이후 영국은 왕정을 폐지하고, 잉글랜드 연방으로 불린 공화정을 세웠다. 1660년 왕정 복고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다음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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