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최근 수정 시각: 2023-03-18 00:04:13
박문수
朴文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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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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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헌(忠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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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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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朴文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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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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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成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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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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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은(耆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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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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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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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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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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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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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문책을 당하는 것은 작은 문제이나, 백성을 구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조선의 문관이자 마지막 2등 공신(분무공신). 술자리에서 시니컬한 조크를 잘 날린다는 평만큼이나 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하는 성격이었다. 그가 칭송받는 점은 양반도 군포를 내라고 주장하는 등 백성의 편에서 입바른 말을 잘했었기에 어사직을 단기간 수행하면서도 암행어사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온갖 특권을 누리는 2등 분무공신이면서도 붕당으로는 소론으로 정적들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정승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1] 군정(軍政)에 밝아 이인좌의 난 때 도순무사 오명항의 종사관으로서 난을 조기에 진압했고 세정(稅政) 등 경륜도 인정받았으며 저서는 《탁지정례(度支定例)》, 《국혼정례(國婚定例)》가 있고 글씨는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에 있는 기념비인《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가 남아 있다.
2. 생애[편집]
박항한(朴恒漢, 1666~1698)의 아들로 증조부는 현종 대에 이조판서를 지낸 박장원(朴長遠, 1612~1671)이며 당고모가 경종의 장모인 영원부부인 박씨(靈原府夫人 朴氏, 1668~1735)이다. 박문수의 초취는 명성왕후의 종손녀인 김도협의 딸 청풍 김씨이고 재취는 인평대군의 현손녀이다.[2]
어려서 전염병으로 어머니 경주 이씨를 여의고 6살 때부터 아버지께 글을 배웠으나 아버지도 여읜 뒤로 외가 쪽에 의지하여 자랐다. 외숙인 이태좌(李台佐)[3]는 소론의 중심인물로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태좌의 재종형 이광좌(李光佐)는 소론의 영수로서 영의정을 4번 지냈고,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李宗城) 또한 영의정을 지내는 등, 박문수의 외가는 대표적인 소론의 명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태좌의 집에서 이종성[4]과 함께 글을 배운 박문수 또한 그 영향을 받아 전반적인 정치 노선이 소론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1723년(경종 3년) 33세에 증광 문과[5] 병과(丙科) 16위로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었다. 전체 합격자 41명 중에서는 26위이다. 관직 생활 초반기인 이 때 박문수는 당시 왕세제 연잉군(후일의 영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집권한 소론과 연잉군은 서로 긴장 관계에 있었다. 소론은 경종이 세자였던 시절부터 경종을 지지하였고, 그에 비해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였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자 노론은 지속적으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봉하고 대리청정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나, 소론 강경파가 이를 역모라 비판하여 노론이 실각하고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성격이 온유한 경종만이 동생 연잉군을 보호하려 하였으나, 정치적 지지기반이 없는 연잉군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이러한 때에 소론계 박문수가 1724년(경종 4년)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의 관원[6]으로 임명되어 왕세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를 계기로 영조가 가장 총애했던 신하로 성장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소론에 속하나 정확히는 탕평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7] 1724년(경종 4년)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가 노론(老論)이 집권하자 삭직당했다.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득세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8] 영남 어사로 나가 부정 관리들을 적발했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 때는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해 반란군 진압에 전공을 세웠고[9] 난을 진압한 후에도 홀로 마을에 남아서 민심을 수습하는데 앞장섰다. 그 공으로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어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영조 6년) 호서어사(湖西御史)로 기민(飢民)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영조 10년) 진주부사(陳奏副使)[10]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의 먼치킨스러운 면을 볼 수 있는데 과거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과거 급제 후 현재의 국방부 장관급인 병조판서에 오를 때까지 걸린 시간은 단 15년이었다.[11]
1738년(영조 14년)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앞서 안동 서원(安東書院)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12]부사(豊德府使)로 좌천되었다. 1741년(영조 17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이어 함경도 진휼사(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가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건 사실 불법이었는데 사전 보고없이 경상도의 곡식을 함경도로 운반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문책을 받을 상황이었다. 박문수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던건지 내가 처벌 받는 것은 작은 일이나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큰 일에 속한다라고 했다고 한다.[13] 그 후 다시 병조판서를 지내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14] 1749년(영조 25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良役)의 폐해를 논하다가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좌천되었다. 박문수가 호조판서로 있을 때 한 번은 어영대장(노론이었다)에게 어영청에서 꿔간 군량미를 갚으라고 독촉한 적이 있었는데 어영대장이 나름의 논리로 반박하며 임금의 탑전에서조차 첨예하게 싸웠다. 이 때도 영조는 박문수의 편을 들어줬다.[15] 그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 등을 거쳐 세손사부(世孫師傅)[16]를 지내고 1752년(영조 28년) 왕세손(王世孫:琔)이 죽자 약방제조(藥房提調)로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濟州)에 안치되었다가 1753년(영조 29년) 풀려나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어려서 전염병으로 어머니 경주 이씨를 여의고 6살 때부터 아버지께 글을 배웠으나 아버지도 여읜 뒤로 외가 쪽에 의지하여 자랐다. 외숙인 이태좌(李台佐)[3]는 소론의 중심인물로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태좌의 재종형 이광좌(李光佐)는 소론의 영수로서 영의정을 4번 지냈고,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李宗城) 또한 영의정을 지내는 등, 박문수의 외가는 대표적인 소론의 명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태좌의 집에서 이종성[4]과 함께 글을 배운 박문수 또한 그 영향을 받아 전반적인 정치 노선이 소론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1723년(경종 3년) 33세에 증광 문과[5] 병과(丙科) 16위로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었다. 전체 합격자 41명 중에서는 26위이다. 관직 생활 초반기인 이 때 박문수는 당시 왕세제 연잉군(후일의 영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집권한 소론과 연잉군은 서로 긴장 관계에 있었다. 소론은 경종이 세자였던 시절부터 경종을 지지하였고, 그에 비해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였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자 노론은 지속적으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봉하고 대리청정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나, 소론 강경파가 이를 역모라 비판하여 노론이 실각하고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성격이 온유한 경종만이 동생 연잉군을 보호하려 하였으나, 정치적 지지기반이 없는 연잉군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이러한 때에 소론계 박문수가 1724년(경종 4년)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의 관원[6]으로 임명되어 왕세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를 계기로 영조가 가장 총애했던 신하로 성장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소론에 속하나 정확히는 탕평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7] 1724년(경종 4년)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가 노론(老論)이 집권하자 삭직당했다.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득세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8] 영남 어사로 나가 부정 관리들을 적발했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 때는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해 반란군 진압에 전공을 세웠고[9] 난을 진압한 후에도 홀로 마을에 남아서 민심을 수습하는데 앞장섰다. 그 공으로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어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영조 6년) 호서어사(湖西御史)로 기민(飢民)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영조 10년) 진주부사(陳奏副使)[10]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의 먼치킨스러운 면을 볼 수 있는데 과거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과거 급제 후 현재의 국방부 장관급인 병조판서에 오를 때까지 걸린 시간은 단 15년이었다.[11]
1738년(영조 14년)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앞서 안동 서원(安東書院)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12]부사(豊德府使)로 좌천되었다. 1741년(영조 17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이어 함경도 진휼사(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가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건 사실 불법이었는데 사전 보고없이 경상도의 곡식을 함경도로 운반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문책을 받을 상황이었다. 박문수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던건지 내가 처벌 받는 것은 작은 일이나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큰 일에 속한다라고 했다고 한다.[13] 그 후 다시 병조판서를 지내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14] 1749년(영조 25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良役)의 폐해를 논하다가 다시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좌천되었다. 박문수가 호조판서로 있을 때 한 번은 어영대장(노론이었다)에게 어영청에서 꿔간 군량미를 갚으라고 독촉한 적이 있었는데 어영대장이 나름의 논리로 반박하며 임금의 탑전에서조차 첨예하게 싸웠다. 이 때도 영조는 박문수의 편을 들어줬다.[15] 그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 등을 거쳐 세손사부(世孫師傅)[16]를 지내고 1752년(영조 28년) 왕세손(王世孫:琔)이 죽자 약방제조(藥房提調)로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濟州)에 안치되었다가 1753년(영조 29년) 풀려나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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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박문수 초상. 일본 텐리(天理)대학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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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굴곡이 심한 관직 인생을 살았다. 그러다가 1755년(영조 31년) 소론이 주도한 나주 괘서 사건에 휘말려 그와 관련한 옥사에 연루되었는데 영조는 직접 박문수를 불러 안심시키고 여전한 신임을 보여주었으나 이후 스스로 죄인을 자처한 다음 세수도 빗질도 않으며 집에 틀어박혀 살다가 이듬해인 1756년(영조 32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적이 많은 박문수를 많이 감싸는 편이었는데 오죽하면 경연 자리에서 상례에 과하게 벗어나는 까칠한 농담을 날려대도 "박문수가 아니면 누가 저렇게 바른 말 하겠냐", "원래 쟤 성격이 저런 걸 새삼스럽게 고치겠냐" 따위의 말로 덮어버렸다. 드나들 때 문 닫는걸 깜빡한 것만으로도 잘못이 되어 추고를, 요즘으로 치면 시말서 처분을 당하는 추상같은 경연 자리에서 "임금은 부모고 백성은 아들이라면서요. 아들이 아버지 얼굴 좀 본다고 세상 뒤집어집니까. 코 처박고 아부떠는 것보다 우리 얼굴 좀 보고 이야기하시죠?"(영조 9년 1월 25일 <승정원일기>) 등의 직격탄을 마구 날려대는걸 다 받아준 것. 박문수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가 정승이 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해서 세상을 떠난 그 날로 바로 박문수에게 영의정을 추증했으며 그에 대해 이런 말로 안타까움을 표했다.[17] 하기사 행정을 잘하고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신하를 함부로 숙청하는 것은 역대 제왕들도 하지 않았다.
" 영성(靈城 : 박문수)[18]이 춘방(春坊 : 세자궁)에 있을 때부터 나를 섬긴 것이 이제 이미 33년이다. 자고로 군신(君臣) 중에 비록 제우(際遇)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나의 영성과 같음이 있으랴?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이며,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그가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깊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32년(1756년) 4월 24일.
3. 설화[편집]
조선시대 인물 중 구전 설화가 가장 많은 인물이 바로 박문수다. 한국 구비 문학 대계[19]에서 박문수가 등장하는 설화가 97건이나 되는데 이는 이항복, 이이 등이 20건 ~ 30건으로 2위를 기록한 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2000년대 초반에 능인출판사에서 출판한 만화 박문수전과 맹꽁이 서당에서 기록한 박문수에 대한 야사들이 가장 유명하다.[20] 현실적으로 모두가 실화는 아닐 것이나, 당시 민중들의 히어로로서 박문수가 얼마나 사랑과 존경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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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느 영험한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불 붙은 장작 위에서도 순간이동으로 위기를 빠져나오며 그 법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쳐준다고 했다. 이에 박문수는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어 그 스님이 불 속에서도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는 무대로 가서 관중들 틈에 끼어 지켜보기로 하는데 그 날은 법력이 모자랐는지 갑자기 몸에 불이 붙어 뜨거움을 호소하다가 결국 극락 세계로 가게 되었다. 그러자 박문수가 "이 스님은 사기꾼입니다"라고 폭로하고 왜 멀쩡했는지 밝혀냈다. 그 수법인즉슨 장작더미 밑에 암자 뒤로 통하는 굴을 파 놓고 장작더미에 불이 붙으면 그 굴로 들어가는 거였는데 누군가 입구를 막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 지금으로 치면 마술사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걸 갖고 병을 고치네 마네 하며 약장수 비슷한 짓을 했던 것이다. 그 뒤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밝혀냈고 관속들 몰래 함께 빠져나가고 왜 살해했는지 물어봤더니 그 범인도 사실 사기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범인은 이 지방에서 꽤 잘사는 좌수 정도의 위치에 있는 지방 유지인 사람으로 자식이라고는 데리고 왔던 딸 하나 뿐인데 그 딸은 어릴 때부터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으나 오늘 죽은 문제의 승려를 만나 병이 나았다고 한다.[21]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그 뒤로부터 승려는 이를 빌미삼아 재물을 요구하고 그때마다 재산을 바쳤지만 하필이면 최근 명문가에 준하는 가문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게 되자 재산의 반을 내놓으라 강요하고 안 내놓으면 그 딸의 병력을 폭로하겠다 계속해서 협박[22]하는 바람에 참다 못해 승려가 술법을 쓰기 시작할 때 트릭을 위해 파 놓은 굴의 입구를 막아 승려를 태워 죽여버린 것이고 굴에 들어갈 때 입은 흙 묻고 그을린 옷은 딸이 가져온 여분의 옷으로 갈아입었다.[23] 범인은 닷새 뒤가 딸의 결혼식이니 딸의 혼례식 이후에 벌을 내려달라고 하지만 사기꾼 승려의 사악한 본모습과 사건의 원인이 된 범인의 사연을 들은 박문수는 그의 사정을 알고 범인을 용서하는 선처를 내린 뒤 이튿날 다시 여정을 떠난다.[24][25] 와이파이 한국인 박문수 편에서 이 에피가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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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주 구천동에서의 설화도 유명하다. 한번은 길을 가던 중 밤중에 덕유산에서 헤매다가 어느 마을에 당도하였는데 다들 불을 끄고 잠이 든 가운데 유독 어느 한 집만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괴이하게 여긴 박문수가 몰래 들어가서 문틈으로 엿보았더니 젊은이가 아버지로 보이는 늙은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고 그 늙은이가 울면서 칼로 젊은이를 살해하려 하는 것이었는데 곁에는 며느리로 보이는 여성을 시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칼로 찌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급히 말리고는 사연을 들어 보았는데, 노인의 말에 따르면 이 마을에 사는 어느 힘 깨나 쓰는 포악한 천씨 부자[26]가 느닷없이 달려와 이유없이 누명을 씌우고는[27] 그 부자의 아내와 며느리를 같은 날 같은 시각 자신과 자신의 아들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결혼식을 강제로 하려고 했다는 것. 천씨 부자 중 천씨 노인은 자기 며느리가 달아났으면 아들만 새로 결혼시키면 되는데 자기까지 새로 결혼하려고 한 이유를 보면 홀아비처럼 보이지만 본처가 있었다. 본처가 있음에도 자기가 괴롭히는 부자 중에서 아버지 쪽의 아내를 노리는 이유는 그 부인이 미인이었기 때문이며 며느리도 그 아들의 아내에게서 빼앗아서 아들을 새장가 보내려고 한 것도 며느리도 미인이었기 때문에 자기 아들도 그 집의 며느리를 탐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천씨 부자가 다른 성을 쓴다는 이유로 죄도없는 다른 부자를 집요하게 괴롭힌 것도 그 집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미모가 탁월해서 빼앗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동반 자살을 시도했던 것인데 자식이 차마 부모를 죽일수가 없어 아들과 며느리가 각각 시부모에게 죽여달라고 울며 청한 것이었다.
끔찍한 사연을 듣게 된 박문수는 자신이 해결할테니 걱정 말라며 두 부자를 안심시키고 바로 무주 고을로 가서 광대들을 소집하고는 그 중 힘 좋고 재주 잘 넘는 젊은 광대들을 골라 뽑아 오방색 깃발과 장군복을 준비해서 같이 그 장소로 다시 갔다.[28] 마침 날이 밝아서 과연 그 천씨 부자가 결혼식장을 차려놓고 결혼 준비를 자신들이 괴롭히는 두 부자의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강제로 치장시켜 놓았고 어느새 구경꾼들이 운집해 있었다. 예의 그 부자와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지나가던 나그네의 말을 듣지 말고 자결할 걸 그랬다며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경꾼들이 두 무리로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박문수가 황색 깃발을 든 황룡 신장(神將) 복장을 하면서 다가와 차려져 있던 혼례상을 벼락같이 내리치고는 큰 소리로 4명의 사신 신장을 차례로"동방 청룡, 서방 백호, 남방 주작, 북방 현무 대장군 나오너랏!"이라 부르니 또 사방에서 신장 복장을 한 광대 4명이 1명씩 벼락같이 날아와 황청백주현(황룡,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오방신장이 한 자리에 십자 모양으로 선 형상이 되었다. 그러자 박문수가 다시 큰 소리로 이렇게 "나는 중앙 황룡대장군이다!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어 이 자리에 왔노라. 어느날 어느시에 무주 구천동에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른 사악한 신랑 두 놈을 잡아오라 하셨으니, 사방 신장은 협력하여 즉시 사모관대한 두 놈을 끌고 가도록 하라."라고 호령하니 이 말에 광대들이 2인 1조로 천씨 부자를 끌고 나갔고, 구천동 밖 삼십리쯤에 있는 어느 산골에 다다랐을 때 박문수는 그간 천씨 부자가 저지른 죄들을 낱낱이 논한 후 광대들을 시켜 천씨 부자를 그 자리에서 처형하고 그 시체를 묻고 광대들에게 사례한 후 구천동을 떠났다. 광대들이 천씨 부자를 처형할 수 있었던 것은 광대들은 신분이 천민인데 광대들은 처형장에서 망나니[29]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박문수가 대동한 광대들이 천씨 부자를 처형한 것은 고증에도 맞다.[30][31]
10년 후 다시 구천동에 갔더니 생전 처음 보는 큰 기왓집이 있었다. 10년 전 괴롭힘당하던 부자의 집이었다. 노인이 된 그 부자 중 아버지는 박문수를 알아보지 못했고, 박문수 역시 시치미를 뗀 채 그간의 일을 물어보자 그 일이 있은 뒤로 하늘이 그 덕을 아는 집이라 하여 구천동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가세가 번창하게 되었으며 구천동의 주민들도 그 부자의 집의 덕을 본받자며 선행을 하여 구천동이 존경을 받는 고을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박문수는 그저 웃으며 모두 하늘의 덕을 받았노라고 말하고 다시 구천동을 떠났다고 한다. 나중에 영조가 이 사실을 알고는 왜 자신이 한거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하니 박문수는 그러면 그 노인은 더이상 착하게 살지 않을 것이며 구천동 사람들은 다시 악행을 저지를 것이라고 했다. 영조는 박문수의 지혜에 감탄했다. 이 설화는 개화기에 쓰여진 소설이자 박문수의 암행어사 프레임을 최초로 확립한 소설 박문수전에 첫 번째로 실려있는 이야기이다.와이파이 한국인에선 초반 에피에 언급되어 어사때 천씨에게 마을 보상금을 요구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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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매파가 좌수 집안에 추파를 넣었다가 좌수의 분노를 사 괜히 망할 뻔 했던 같은 성씨[32]의 착한 총각의 이야기도 있다. 맹꽁이 서당에 나와있는 이 이야기는 박문수가 길을 가다가 길을 잃고 어느 낡은 집에 머물게 되었을 때 일이다. 홀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는 집주인 청년은 집에 있는 쌀[33]로 저녁을 대접한 뒤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한다. 남은 가족으로는 홀어머니 한 명 뿐으로 아버지는 이 산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두 형은 이인좌, 정희량의 반란 당시 억울하게 처형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이 되자 포졸들이 청년을 잡아가려고 하는 것을 본 박문수는 청년에게 아침상을 받으며 청년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데 청년은 예전에 매파가 좌수 집안의 외동딸과의 혼인을 주선한 일로 좌수가 노해서 청년에게 툭하면 곤장질을 일삼는 등 엄청나게 시달린다고 하소연한다.
알고 보니 근처 남원 고을의 좌수인 이성오란 사람은 고을 이방으로 꽤 자산가이다보니 무척 오만한 성격이라고 한다. 게다가 몇가지 죄도 있었던 모양. 다만 딸은 아버지와는 달리 얌전하고 정숙한 규수로 유명한 듯 했다.[34] 이에 박문수는 착한 청년을 도와주기로 했으며, 자신이 삼촌을 자처하여 암행어사 마패를 들이밀고 좌수의 딸과 혼인시키고, 재산의 절반을 총각에게 넘겨주게 해서 서로 잘 살았다는 일화가 있다. 거꾸로 혼기 지난 처녀들의 짝을 찾아주었다는 내용도 실록에 있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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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번은 친척집에 잔치가 있어 밤을 새었다가 다음날 일어나서 세수를 하는데, 바로 앞서 세수를 하던 친척이 베로 된 수건 하나를 저 혼자 쓸 것처럼 마구 쓰는 것을 보고 뒷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 여겼다. 이 친척이 나중에 평양 감사로 임명받았다고 하자, 임금에게 찾아가서 일전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고, 임금도 배려 없는 그 친척에게 평양 감사를 맡기기가 좀 씁쓸했는지 취소시켰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와이파이 한국인 박문수편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고, 본인이 증언한 것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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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루는 그가 고개를 넘다가 그만 배고픔에 지쳐 쓰러져버렸다. 그 때 어느 한 여인이 쓰러진 박문수를 발견했는데, 주위에 먹을 것도 없던 터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가슴을 내밀고 박문수에게 모유를 먹였다. 모유를 먹일 수 있었던 것은 이 여인이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아 아이에게 줄 젖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진게 없는차에 죽어가던 박문수를 보고 경황없이 자신의 모유라도 먹여 구하고자 한 것. 이 때 그 광경을 본 나물 캐는 아낙네들은 경악했으며, 그 사실을 그 여인 남편에게 일러바쳤다. 화가 난 남편은 박문수와 아내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박문수가 마패를 내밀었다. 그러자 남편은 얼굴이 사색으로 변하면서 박문수에게 용서를 빌었다. 박문수는 그 남편에게 따끔하게 호령[36]을 한 다음 다시 갈 길을 갔다. 그 뒤 남편은 나라에서 파견한 어사를 폭행했으니 무사하지 못했을 터, 결국 관아에서 원님의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일 때 박문수가 남편을 용서하고 자신을 살려준 아내에게 상을 내려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어사에게서 논밭 50마지기를 상으로 받았으며, 그 후 마패를 가진 사람들이 가서는 안 될 고개라는 뜻인 금패령(禁牌嶺)의 유래가 되었다. 박문수가 상을 내릴 때 논밭 50마지기를 남편이 아닌 자신을 구한 아내의 재산으로 상을 내렸는데 이는 그 남편이 아내를 핍박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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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루는 박문수가 박좌수[38]라는 부자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 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조카가 그 유명한 박문수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서 밤에 몰래 마패를 보이고 박좌수를 추궁하자 자신의 정체를 밝히길 그 박좌수는 원래 백정 출신이었다. 당연히 백정은 조선 시대에 사람 취급도 안했는데 좌수 증명서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박문수가 물어보니 그는 원래 백정 일로 많은 돈을 벌긴 했지만 백정이다보니 길가는 어린 아이에게도 천시를 당해야 했고 이 억울함을 알고 지내던 그 고을 이방에게 호소했는데[39] 이 이방이 꾀를 내어 마침 새로 온 수령에게 박씨를 좌수로 추천했다. 물론 그 동네 양반들이 당연히 들고 일어나서 좌수 자리는 취소되었지만 좌수 직첩[40] 자체는 뺏기지 않고 갖고 있게 되었고, 이 직첩을 가지고 다른 곳에 이사해서 살면서 좌수를 지냈던 양반 행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일반 양반들이 의심을 하기 시작하자 유명한 박문수를 자기 조카라고 속인 것이었다.[41]
이 이야기를 들은 박문수가 박좌수를 더이상 추궁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주는 것도 모자라 마을에 머무는 동안 일부러 출두까지 해서 신분을 밝히고 진짜 조카 노릇을 해주자 그 고을의 양반들도 박좌수가 박문수의 숙부라고 믿어 그동안 의심한 것에 설설 기며 용서를 빌었고 박좌수도 이를 고마워해서 나중에 박문수 몰래 그의 집을 새로 지어주었다고 한다.[42] 이 사실을 안 박문수의 동생이 박좌수의 존재를 알고 감히 백정 따위가 양반을 농락한다며 그의 집으로 가서 큰소리를 쳤지만 오히려 박좌수 집 하인들에게 매를 맞고 "이놈이 제 조카인데 미친 병에 걸려서 헛소리를 내뱉는답니다."라는 말을 듣고 쫒겨나 버렸다.[43] 이후 박문수의 동생이 박문수에게 이 일을 호소하자 박문수는 껄껄 웃으면서 박좌수가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인데 너같이 어린 녀석이 함부로 상대할 인물이 아니라며 오히려 동생에게 한소리 했다고 한다. 와이파이 한국인 박문수 편에서 언급된다.
이 이야기는 박문수 설화가 아닌 그냥 민담 버전으로도 있는데 여기에서는 초반부가 양반전의 내용과 결합된 듯한 이야기로 나온다. 한 양반이 환곡을 못 갚아 옥에 갇힐 처지가 되자 돈깨나 모았던 백정 한 명이 가엾게 여겨 대신 갚아주었고, 이후 백정살이에 한이 맺혀 먼 곳으로 이사해 양반 행세를 했다. 하지만 양반 행세에 익숙치 않아 그 동네 양반들이 의심하던 차에 자신이 전에 도와준 양반이 큰 벼슬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대감이 내 친척뻘 된다 큰소리를 쳤고, 별 문제없이 잘 살려나 싶던 때, 그 대감의 큰아들이 마침 그 지역 암행어사가 되어 내려온 것. 소문을 들으니 이 지역 아무개라는 양반이 아버지의 친척이라면 내 아저씨뻘인데, 난 그런 아저씨가 없는데 싶어 의아해진 어사는 은밀히 백정을 찾아가 어찌 된 것인가 묻는다. 백정은 여태까지 사연을 다 털어놓으며 죽을 죄를 지었다고 빌고, 이야기를 듣고 백정이 아버지의 은인임을 알게 된 어사는 안 그래도 아버지가 어르신 은혜를 갚고 싶어했다며 오히려 진심으로 조카 노릇을 해 주고[44] 서울로 돌아갔다. 돌아와 아버지인 대감에게 이 일을 고하자 아버지도 잘했다며 칭찬하는데, 동생이 우리가 천한 백정놈 조카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길길이 뛰고는 내려가 따졌지만 도리어 미친병 걸린 둘째조카 취급을 받고 된통 혼이 난다. 위의 박문수 설화처럼 호되게 얻어맞았다는 버전도 있지만, 붙잡힌 채 등에 쑥뜸 수십 개를 당하고 아픔에 "아이고 삼촌 잘못했습니다. 저 정신 돌아왔습니다"를 고래고래 외치고 풀려나 줄행랑을 놓았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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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사로 활동하던 도중 어느 지역에서 의적 얘기를 듣게 되었다. 부잣집도 간단히 털어버려서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어사의 신분상 이런 인물을 내버려두는 것도 좋은건 아니기에 당연히 잡아야 했다. 문제는 하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인물이라 잡기 어려웠다는 것인데 고민 끝에 자신을 한양에서 도적 잡으러 온 사람이라 속이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도적 쪽에 흘리기 위함이었는데 도적은 이를 알게 되자 박문수에게 편지를 보내 헛수고만 할 거라며 비웃었고 그게 허풍은 아니었는지 첫날에는 도적이 박문수의 봇짐을 털어 망신을 줬다. 하지만 두번째 날에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박문수에게 꼬리를 잡혔다. 문제는 도망치던 도중 막다른 길에 이르자 도적이 담을 넘어버려 놓치고 말았다는 것인데 담 너머에는 두 집이 있었고 두 집에 사는 사람은 각기 다른 특징이 있었다. 첫번째 집 사람은 장님이었고[45] 두번째 집 사람은 귀머거리였다는데, 박문수는 두 명 중에서 귀머거리가 (무엇인지는 설화별로 다르지만 대개) 귀를 촛농으로 막아놓은 것을 알고 잡았다. 와이파이 한국인 박문수 편에 이 에피소드가 언급된다. 의적 캐릭터는 장 발장 캐릭터로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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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박문수가 흔치 않게 굴욕을 겪은 일로 어사 활동을 하던 도중 산길에서 한 사람이 다급하게 다른 사람에게 살려달라며 애원하기에 숨겨주었고 잠시 후 또다른 사람이 나타나 칼을 들며 아까 전 숨겨준 사람이 어디 있는지 대라고 말했는데 겁먹은 박문수는 결국 위치를 알려주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멀어져 가는 칼 든 사람을 보며 박문수는 내 목숨 위태롭다고 남을 팔았다며 한탄했고 자신이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던 방법이 없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마을에 이르렀을 때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았는데 한 아이가 사또 역할을 하고 나머지 아이들이 사또 역할을 맡은 아이에게 무언가를 청하고 있었는데 내용인즉 키우던 새 두마리가 산으로 날아갔다며 찾아다 달라는 것. 넓은 산을 뒤져 새를 찾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곤란한 일이었지만 사또 역할을 맡은 아이는 새가 산으로 도망쳤다면 산을 끌고 오라며 산을 끌고 오면 내가 산을 추궁해 새를 되찾아주겠다고 말한다.
이에 박문수는 저 아이라면 혹시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던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다가갔는데 아이들은 송사를 진행하는 놀이를 하고 있던지라 사또 역할을 맡은 아이는 대체 누가 동헌에 함부로 오는 거냐며 놀이가 다 끝날 때까지 박문수를 묶어놓았다. 그러고 놀이가 다 끝난 다음에야 묶어놔서 죄송하다고 사과한다. 풀려난 후 박문수는 사또 역할을 맡았던 아이에게 아까 전 있었던 일을 말하며 이럴 때는 어떻게 했다면 좋았을 거냐고 물어보았는데 이에 아이는 장님 행세를 하는게 좋다며 아무리 그래도 장님에게 물어볼 사람은 없었을 거라고(앞을 못 보니까) 답한다. 이에 박문수는 아이의 지혜에 감탄하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속으로 탄식했다는 이야기. 와이파이 한국인 박문수편에서 이 에피가 언급된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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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박문수의 일화 중 옛날 이야기 시리즈에 수록된 박문수와 평민들의 이야기들이다. 그 첫번째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길을 가던 박문수는 과년한 두 딸을 시집보낸 한 남자의 하소연을 듣게 되는데, 남자의 말에 따르면 최근에 두 딸을 시집보내게 될 때 큰딸은 뼈대 있는 양반 가문에 보냈지만 문제는 시가(媤家)가 워낙 가난해서 앞치마도 제대로 못 마련해 밥보자기를 두를 정도였고 작은딸은 밥이나 먹고 사는 잘사는 집에 보냈지만 그 집은 평민의 집이라 양반들에게 재산이 있단 이유로 늘 볼기를 맞고 재산은 재산대로 빼앗기기 일쑤였다고 한다.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히 생각한 박문수는 작은딸이 시집간 그 집으로 가서 자신이 그 집의 친척으로 행세할 것이니 큰딸네 시가 식구들에게 재산을 반 정도 나눠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집은 박문수 말대로 했고 박문수가 그 집의 친척 행세를 하자 얼마 안가 마을 양반들이 설설 기는 정도가 되었으며 강제로 빼앗아간 재산도 알아서 다시 갖다바쳤다. 둘째네 시가에게 재산을 받은 큰댁도 얼마 안가 제법 융성해졌다. 두 번째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박문수가 어느 평민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 이야기이다. 자리를 짜는 평민에게 고마워하며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평민은 그저 볼기만 안 맞고 살면 괜찮다고 했다. 위의 이야기처럼 양반들의 토색질에 시달리는 평민들의 애환을 담긴 이야기다. 이에 박문수는 자신의 친척 행세만 하면 된다고 하고 그가 관아로 오게 되자 미리 짠 대로 그 평민을 조카처럼 대우했으며 양반들이 설설 길 정도가 되어 다시는 그 평민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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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번 이야기는 장승이나 돌미륵 같은 신령한 존재의 도움을 받으며 펼치는 이야기로 능인출판사와 옛이야기 시리즈에 수록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능인출판사 판본을 소개한다. 박문수가 길을 걷던 중 우연히 한 노인을 만나 같이 길을 가게 되었을 때 일이다. 마을에 들어서서 한 대감댁에 들르게 되었을 때 노인이 박문수가 대동한 하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는데 배도 고픈데 노인이 별짓을 하라 하니 화가 나 아무데나 던졌다. 노인이 어디로 떨어졌냐고 물으니 하인이 숲에 떨어졌다고 했는데 노인이 "수풀 림이라 그럼 임서방이라고 소리쳐보시오" 하자 하인은 배도 고프고 별 짓을 다 해야 하니 짜증도 날 대로 나서 화를 내며 대충 임서방 임서방 거리며 꽥꽥 소리지르자 그 대감댁 하인들이 "감히 우리 대감님을 서방이라 하다니?" 하며 화가 나 다들 박문수, 노인, 하인 모두 끌고 갔는데 알고 봤더니 왕년에 한양 부사였던 임자근이었다. 조선시대에 생판 남의 이름은 물론 성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큰 금기였기 때문에 임자근은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이 이야기를 듣고 보통 노인이 아니라며 경이로워했다. 임자근 대감은 이 노인이 예사 노인이 아니리고 여겨 신수를 봐달라고 했는데 노인은 대감이 오늘 밤 죽게 되었으나 피할 수도 있다는 점을 쳐주었다. 죽음을 피하는 방법은 활로 가장 아끼는 것을 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대감이 사랑하는 젊은 후처였다. 죽은 전처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어 후사를 잇기 위해 후처를 들인 임 대감이었기에 차마 사랑하는 아내를 쏠 수 없어 여러번 갈등했는데 활을 겨누다가 거두려는 임 대감의 팔을 노인이 툭 건드리자 결국 화살이 쏘아졌다. 운좋게도 부인이 바느질을 하다가 그 타이밍에 고개를 들었기에 화살이 살짝 빗나가 병풍을 맞추었다.
임 대감은 아내가 맞지 않았다는 점에 안심했으나 다시 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던 찰나,[47] 후처가 비명을 지르고 혼비백산 달려나오며 사람이 죽었다고 얘기하자 급히 방으로 들어가 병풍을 확인해보니 그 안에서 사람 시체가 나오는데 바로 자신의 집에 있던 하인이었다. 어안이벙벙한 임 대감이 노인에게 얘기하자 노인이 밝혀준 이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평소 대감의 젊은 후처를 남몰래 사모한 그 하인은 오늘처럼 대감과 후처가 각기 다른 방을 쓰고 있는 기회를 노려서[48] 대감댁 식구를 몰살하고 후처와 재산을 훔쳐 평생 호의호식하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건 현장에는 도끼와 기름이 있었는데, 바로 그 하인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고 준비해 둔 것이었다.
대감은 노인 덕에 목숨을 건졌기에 고마워하며 사례금으로 200냥을 준다. 원래 2,000냥을 주려고 했는데 노인이 200냥만을 운문산 송백골의 성덕수란 사람 집으로 보내달라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이후 며칠 잘 묵고 가면서 다른 마을에 도착하는데 마을 유지인 부잣집의 외아들이 퉁소를 불다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노인은 소년을 보고 바로 담뱃재를 탄 물을 아이에게 먹였다. 아이 아버지는 노인의 행동에 당황한 나머지 멱살을 잡았는데 아이는 잠시 고통스러워했지만 입에서 죽은 지네를 토해내고 바로 건강해졌다. 이 소동은 퉁소를 불던 아이가 잠시 낮잠을 자던 중 지네가 퉁소 속에 들어가 그걸 모르던 아이가 퉁소를 불 때 아이의 뱃속에 들어가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노인은 지네에겐 담배가 쥐약이란 걸 알고 아이에게 담뱃재물을 먹여 지네를 죽인 것이었다. 아이 아버지는 고마워하면서 사례금으로 천 냥을 주려 했으나 위와 마찬가지로 200냥을 성덕수에게 보내달라며 다시 길을 떠난다. 그 후 박문수가 노인과 함께 다시 길을 가는데 노인은 어느샌가 홀연히 사라져버렸고 노인과 헤어진 박문수는 다시 발길을 옮겼다. 가까운 마을로 가던 중 장승 앞에 기도하는 어떤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게 되는데 처녀는 도자장인 아버지 성덕수가 사또의 모략으로 죽게 되어서 아버지를 살리고자 장승에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노인이 성덕수에게 400냥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던 말을 들은 박문수가 의아해하며 처녀가 기도를 올리던 장승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얼굴은 자신과 동행하던 노인의 얼굴이었다.[49]
이 엽기적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도자장 성덕수에겐 아름다운 처녀인 딸이 있는데 평소에 아름다운 처녀를 눈독들이던 청도 군수인 탐관오리가 처녀의 아버지인 도자장에게 처녀를 첩으로 달라고 요구하지만 아내를 잃고 남겨진 하나뿐인 딸을 못된 탐관오리에게 주는 것을 원치 않았던 도자장은 단호하게 그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사또가 도자장에게 도자를 만들라 한 뒤 하인을 시켜서 그것을 훔쳐 누명을 씌우고서 기한 내로 도자값을 내지 않을 시[50] 처형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었다. 이 도자 값이 800냥인데 소녀가 집이며 전답이며 팔아 400냥을 마련했으나 나머지 400냥은 구하지 못했다. 앞에서 200냥씩을 성덕수에게 주라는 것은 도자장의 이름이 성덕수였기 때문이다. 즉 앞서 두 사람 합쳐서 400냥을 요구한 이유가 나머지 400냥 때문이다. 그러나 군수는 여기에서 두 번째로 외동아들을 구해준 부잣집에서 보내오는 200냥을 가로채기까지 하면서[51] 아예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돈만 챙긴 뒤 성덕수를 사형시킬 생각이었다고 한다.
능인출판사 판본에는 여기에 관련한 이야기가 하나 또 있는데, 성덕수가 처형되기로 한 날 시보가 울리면 처형을 시작한다는 걸 알고 딸이 시보가 울리기 전 필사적으로 고을 종각까지 달려가 종 치는 부분에 매달려 있었다.[52] 그리고 얼마 후 장님 종지기가 시보를 울리기 위해 종각에 들어가서 종을 치려고 하는데 성덕수의 딸이 몸으로 종을 막고 있던 터라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장님 종지기가 귀까지 어두웠던 탓에대체 왜 그런 사람에게 종지기 일을 시키는지 의문이다[53]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다가 곧 울렸는데 듣지 못했나보다 하고 생각하고 그냥 종대로 정해진 횟수만큼 성덕수의 딸의 몸만 때리고 가 버렸다. 성덕수의 딸이 자신의 몸까지 던져가며 시보를 방해한 덕분에 시간을 벌었고 결과적으로 처형을 막을 수 있었다. 사또는 정오가 된 것 같은데 종이 안 울리자 이상하게 여기다가 종이 울릴 때까지 기다렸으나 한참이 지나도 종이 울리지 않자 그냥 사형을 집행하려 했다. 이때 동헌으로 성덕수의 딸이 오고 뒤이어 박문수의 하인이 와서 실은 사백냥 중 이백냥을 도둑맞아 이백냥밖에 없지만 내일까지 이백냥은 물론 늦은 죄로 이백냥을 더 가져오기로 했으니 내일까지만 기다려달라며 만일 안 오면 자신을 죽이라고 허풍을 쳤다. 하루만 기다리면 이백냥이 더 생긴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던 사또는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하루 후 모든 사건을 알고 출두 준비를 한 박문수는 군수의 하인이자 문제의 도자기를 훔친 하인을 붙잡아 자백을 받고 전말을 밝혀내는데, 탐관오리의 엽기적이고 사악한 행각에 크게 분노해 탐관오리를 엄벌에 처하고[54] 마음씨 착한 도자장 성덕수 부녀는 박문수의 도움으로 못된 사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55][56]
참고로 능인출판사와 옛날 이야기 판본에 수록된 박문수와 돌미륵이 만나 성덕수 부녀를 구한 내용은 사실 전설의 고향에 수록된 에피소드 <逋欠(포흠) 三千 兩(삼천냥)> 에피소드의 주제가 된 전설을 그대로 갖다 쓴 것이다. 정확히는 포흠 삼천냥 전설은 실존하는 전설로 경상북도 안동에 내려오는 전설이다.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시기가 바로 영조 때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출판사들이 박문수 설화로 둔갑시킨 것으로 실제 전해지는 전설에는 박문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 박문수를 등장시키는 이유는 교훈적인 내용을 다룰 때 위인이 있으면 편하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이야기의 제목에 쓰인 逋欠(포흠)은 나라에서 양인들에게 빌려주는 국가의 대출같은 제도인데 사실상 나라에서 고리대를 놓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국가에서는 이를 엄금했다. 다만 이미 포흠을 준 경우 원금과 이자를 상환받은 경우는 문제삼지 않았다. 삼천냥이 된 것도 처녀의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포흠을 썼는데 이자에 이자가 붙어 삼천냥까지 된 것이다. 처녀가 영상 첫머리에서 포흠을 갚기 위해 소금까지 팔아가며 노력하는데 그 이유는 나라에서 암행어사를 파견해 포흠을 주고 이자놀이를 하는 현감의 비리를 적발하려 했기에 현감이 당장 원금과 이자를 포함해 삼천냥을 갚으라고 해서 막막한 처녀가 돌미륵에 비는 거였다. 이 전설의 전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다면 逋欠(포흠) 三千 兩(삼천냥)을 보면 된다. 전설의 고향에서 해당 전설의 내용을 완전히 똑같이 영상화를 한 것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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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야사에 따르면 귀신에게서 신시(神詩)를 받고 장원에 급제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에 관련 에피소드가 소개된 바 있다. 과거를 보러 가다 어떤 초립동자에게서 과거가 이미 치러졌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혼란에 빠졌는데[57][58] 동자는 과거 시험의 시제나 장원 급제자의 시문이 이러이러했다며 가르쳐주고 갔다. 그래도 올라온 김에 한양에 사는 집안 어른에게[59] 인사나 드리고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그냥 서울로 올라가 찾아 뵈었더니 그 어른 왈, "뭔 소리야? 아직 시험까지 3일이나 남았는데?" 결국 시험을 무사히 볼 수 있었고 과거 시제에 동자가 가르쳐준 시문의 앞부분이 나와 그 덕에 급제했다는 소리.
落照吐紅掛碧山낙 조 토 홍 괘 벽 산 지는 해는 푸른 산에 걸려 붉은 해를 토하고
寒鴉尺盡白雲間한 아 척 진 백 운 간 찬 하늘에 가마귀가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진다.
問津行客鞭應急문 진 행 객 편 응 급 나루를 묻는 길손의 채찍질 급하고
尋寺歸僧杖不閑심 사 귀 승 장 불 한 절 찾아 가는 스님의 지팡이도 바쁘다.
放牧園中牛帶影방 목 원 중 우 대 영 뒷동산 풀어 놓은 소 그림자 길기만 하고,
望夫臺上妾低鬟망 부 대 상 첩 저 환 망부대 위로 아낙네 쪽(머리) 그림자 나지막하다.
蒼煙古木溪南路창 연 고 목 계 남 로 오래되어 예스런 고목들이 줄지어 선 남쪽 냇길에
短髮樵童弄笛還단 발 초 동 농 적 환 짧은 머리 초동이 피리 불며 돌아온다.
맹꽁이 서당 버전이나 여러 채록에 따르면 초립을 쓴 동자는 마지막 구절은 생각이 안 난다고 하고 풀피리를 불며 가버렸는데 이 장면을 보고 박문수가 마지막 구절을 "환(돌아가다)"으로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일부 구전에서는 채점관들이 시를 보고 "이는 귀신의 시다"라고 하며 불합격시키려다가 마지막 구절만큼은 사람이 썼다고 하여 합격시켰다고도 한다. 이 일화와 이어지는 구술에서는 초립동이 박문수가 억울한 죽음을 풀어준 꼬마 신랑이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박문수가 과거 보러 올라가는 길에 어느 대갓댁에 신세를 졌다. 이날밤 박문수가 소변을 보러 나왔다가 누군가 월장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다음날 길을 떠났다가 초립동을 만나게 된다. 급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갓댁에 들르니 저번에 묵었을 때 갓 장가들었던 아들이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 며느리의 친정이 경상도라는 말을 들은 박문수는 짚이는 바가 있어 인근 서당을 수소문해 최근에 경상도에서 동네로 올라온 청년을 찾아낸다. 청년은 며느리와 애인 사이였고 며느리가 먼 지방으로 시집을 가자 따라와 신랑을 살해한 것. 그날밤 박문수가 목격한 월장하는 그림자가 청년이었고 살해당한 신랑은 그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줄 수 있게 과거 급제를 도왔다는 얘기다. 이 정도면 민담치고는 복잡한 플롯. 은혜갚게 하는 신랑이라... 근데 야사라는걸 감안하면 마지막 구절에서 모든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야사대로라면 늦깎이로 성공한 그의 인생 역정을 폄하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를 폄하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박문수처럼 노력하는 사람은 하늘이 돕게 되어 있다" 정도의 의미니 지나치게 깊게 보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숙박비가 없어 될대로 되란 식으로 귀신들린 흉가에 겁도 없이 묵었다가 귀신의 해골을 수습해주고 신인의 시를 얻었다든가 원한을 풀어주고 보답으로 시나 글을 받아 급제했다는 유형의 설화는 상당히 많다. 민담 속에서 사랑받는 인물이기 때문에 원래 있었던 다른 민담이 박문수의 것으로 둔갑했을 가능성도 높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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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능인출판사의 판본에서 도깨비불 사건을 해결한 사건도 나오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박문수가 밤늦게 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을이 폐허가 되어 있으며 남아 있는 마을 사람들도 짐을 싸들고 떠나는 흉흉한 광경을 보게 된다. 이것이 어떻게 된건지 영문을 모르는 박문수는 떠나는 마을 사람들을 잡고 물어보나 다들 아무 대답도 안하자 할수 없이 홀로 이 마을을 둘러본다. 그러던 도중 마을을 순찰하던 순찰 대장과 마주치게 되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 난데없이 맞게 되며 못이기다 못해 자신의 호패와 마패를 보여주어 정체를 밝히게 된다. 결국 기겁한 순찰대장은 박문수에게 죄송하다고 사죄를 하며 박문수도 순찰대장의 호쾌함에 도리어 웃으면서 넘어간다. 그뒤 순찰 대장으로 부터 이 마을의 사정을 듣게 되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본디 강을 경계로 A.B 두 마을이 있었는데 어느날부터 A마을에서 도깨비불이 떠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처음에는 단순 소문으로 여겨졌으나 그 도깨비불을 봤다는 목격담이 들려왔고 심지어 그 불로 인해 죽은 사람도 생기자 B마을 사람들은 A마을을 가길 꺼리며 A마을은 사람들이 떠나 빈 마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들은 박문수는 얼른 이 사태를 수습해야 겠다 싶어 주막에 있던 주모에게 도깨비불이 나타난 후 득을 본 사람이 없었냐며 묻고 B마을의 무당 부부와 A마을에 살고 있는 꼽추 노인이라는 걸 듣게 된다. 그뒤 순찰대장에게 의논하여 내가 불이 날 장소에 숨어 있을테니 몰래 매복해있다가 내 신호를 들으면 포졸들을 이끌고 오라는 명을 내린다
그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가 비어있던 집에서 불을 내려 기름을 부었으며 그걸 본 박문수는 신호를 보내어 그들을 잡는다. 문초해본 결과 이 무리는 무당 남편과 꼽추 노인이었으며 도깨비불의 소동도 바로 이들이 범인이었다. 알고 보니 무당이 돈을 벌기 위해 도깨비불이 나타난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그 일을 해결해준다는 핑계로 돈을 뜯어내고 있었으며 도깨비불의 소문을 믿기 위해 무당 남편이 꼽추 노인과 짜고 방화를 저지르는 천인공노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해 돈을 뜯어낸 것은 물론 아무 죄 없는 사람들도 죽게 한 그들의 뻔뻔한 행동에 노한 박문수는 그 무당 부부와 노인을 잡아 극형에 처한다.
3.1. 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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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이 한국인 - 박문수: 두번째 이야기로 박문수를 다뤘다. 성우는 박영재. 어렸을 때의 성우는 김자연. 오리지널 설정으로 젊었을 적 한량이었던 행적을 조금이나마 보여주었고, 기동이라는 수행원 같은 캐릭터가 생겨났다. 대체로 생애 문서의 행적을 따라가나 암행어사 일화를 재구성하는 에피소드가 상당수 존재한다.[61] 암행어사 일화가 재구성되어 여러 개의 사건들이 되기 때문에, 와이파이 한국인에서의 박문수는 사건과 맞닥뜨려 어사 탐정 박문수라 봐도 무방하다.[62] 작중에서의 암행어사 설화는 민생 문제 해결이나 민/형사 사건으로 표현된다. 또 오리지널 설정으로 부여된 말버릇이 있는데, "걱정마십시오~(중략)[63], 흣훗훗 어사 박문수입니다!" 이다. 주변의 조력자들도 말버릇을 바꾸라고 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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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 - 박문수: 역사 속 인물로 등장하였다. 이때 그로 변신한 아이의 이름은 방문수.
4.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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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도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아끼던 다산 정약용과 비슷한 면이 있다. 주류 당파인 서인 노론에 밀리는 비주류 당파에 속한다는 것.[65] 목민관으로 있을 때 치세를 잘 다스려 백성들의 민심을 얻고 같은 당류가 역모에 준하는 사고를 쳤을 때 반대파인 노론 벽파가 탄핵하여 정치적 위험이 생기자 현 군왕이 보호해주었다는 점, 설화를 남긴 인물이 되었다는 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박문수는 중앙 정계에 진출해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고 천수를 누렸지만, 정약용은 왕이 먼저 죽는 바람에 지켜줄 사람이 사라져 귀양 생활로 남은 일생을 지내야 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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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독대를 자주 했다고 한다. 군신 관계를 떠나서 거의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고... 거기다가 고개까지 빳빳이 들고 서있었는데, 다른 대신들이 머리를 숙이라고 하자 "아첨하는 무리일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지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자 영조는 박문수처럼 얼굴을 들고 왕과 마주볼 수 있도록 개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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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이지만 대중들에게는 특히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을 때의 인상이 강한 인물인데 '암행어사=박문수'라는 인식이 박혀있을 정도.[66] 허나 실제 암행어사로 활동한 시기는 1727년~1728년의 1년간에 불과하며 그 기간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배경 지역을 생각하면 영남 첩보 목적으로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박문수를 암행어사 이전에 이인좌의 난 종사관을 지낸 것으로 기억하는데 선후가 바뀐 것. 그러나 활동 시기가 1년에 불과할 뿐이지 암행어사 직을 담당할 때에 적지 않은 치적과 공훈을 세웠는데 소싯적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오히려 민초들과 관련된 세간 시정에 밝았던 것도 이에 한몫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민초들 사이에서는 그의 암행어사 시절에 관하여 갖가지 민담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67] 이런 이미지 때문인지 그가 빈민 구제 활동을 활발히 펼친 영남 지역에서는 신격화되기까지 했으며 특히 경상북도 영양군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신 서낭당을 만들어 지금도 제사를 지내는 곳도 있다. 박문수가 실제로 암행어사와 관찰사로 활약한 지역은 영남 지역 뿐이지만 영남 지방을 제외한 지방에도 박문수가 왔다갔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로 일반 백성들한테 명성을 떨쳤다. 타지 백성들을 대거 구한 일도 있는데 경상도 관찰사 시절 수해를 보고는[68] 즉각 구호곡들을 미리 거둬 배편으로 보내 함경도의 백성들을 구한 것이다. 구호가 더욱 급해지니 "대신들의 재물을 거두어 나라에서 돕자"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이는 절차를 무시하고 영조에게 다이렉트로 보낸거라 박문수가 각오한 대로 노론의 엄청난 공격을 받았으나 영조가 용서하였고 박문수에 대한 송덕비(북민감읍비)가 세워졌다. 1741년 함경도 진휼사로 백성을 구한 적도 있으며 아마 이 경력으로 다시 1번 백성을 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 또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만, 그가 암행어사를 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69] 어사를 하기는 했지만 암행어사가 아닌 ‘별견어사(別遣御史)’를 하였는데 지방관 시절 행적이 결합되어 암행어사 박문수의 이야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아래에 나온 지방관으로서 백성을 진휼한 일화들이 암행어사 설화로 변모하여 전해진 셈이다.
5. 관련 문서[편집]
[1] 생전에 오른 관직 중 가장 높은 품계의 관직은 정2품의 병조판서, 호조판서, 우참찬이었다. 대신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성격상 오르기를 스스로 꺼렸을 거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여러모로 안정복이나 홍대용과 유사한 케이스.[2] 인평대군의 증손자인 안흥군 이숙의 딸.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생가 고모할머니이다.[3]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현손이다.[4] 1692년생으로, 1691년생인 박문수의 외종제이다.[5] 경종이 소론만을 위해 실시한 특별 시험으로 박문수는 이전에 2번이나 과거에 응시했는데 떨어진 전력이 있었다.[6] 설서(說書). 정7품의 관직.[7] 어차피 영조 시절의 소론은 밀려난 강경파 준론과 이광좌 정도만 빼면 다 탕평파였다. 안 그러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8]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 사서였다. 참고로 사도세자가 아니라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이다. 영조가 즉위하기 전인 1718년생이었고 1724년에 즉위하자마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27년에 사망하고 만다. 사도세자는 1735년생이다.[9] 반란 진압군으로 참여한 군인이 쓴 기록인 <난리가>에서는 박문수가 병사들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칭찬하고는 일선 병사들의 고름을 직접 빨아 치료해 준 오기에 비하며 아주 높게 평가한다. 병사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충성심을 드높이는데 상당한 수완이 있었던 셈인데 다른 증인도 아니고 당시 토벌군 군인이 직접 작성한 수기인만큼 여기에서 묘사되는 박문수의 어진 품성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훗날의 암행어사 시절 백성들을 사랑한 것을 연상시키는 대목.[10] 경상남도 진주시와는 상관이 없고 중국과의 사이에 외교적으로 알려야 할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임시로 파견하는 사신[11] 1723년 과거 합격, 1737년 병조판서 임명.[12] 현재의 경기도 개풍군[13] KBS 역사저널 그날 - 60화에 관련 에피소드가 나왔다.[14] 이 때 청나라 배들의 불법 어업 및 밀무역을 막기 위해 전선을 건조하고 이에 필요한 예산을 조정에 요청했다가 영조에게 퇴짜를 맞았다. "이순신은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혼자서 전선을 만들었는데?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지, 알아서 돈을 마련해라." 영조가 이렇듯 얼핏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를 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전체 맥락을 파악해야 하는데 당시 상황에 대한 자세한 것은 조선왕조실록/내용 문서의 해당 부분 참조.[15] 물론 어영청에서 호조에 갚아야 할 그 군량미가 바로 임금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재산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탑전에서 이렇게 상례에 벗어날 정도로 말싸움을 벌이면 둘 다 추고되는게 일반적이다. 그만큼 박문수가 거칠게 물고 늘어지기도 했다.[16] 정조가 아닌 일찍 죽은 정조의 형이다. 후일 '의소 세손'으로 추증.[17] 생전에는 소론계였고 그 성격 때문인지 정승 자리에는 올라보지도 못했다.[18] 박문수의 작위 '영성 부원군'에서 따온 호칭. 이항복의 '오성'과 비슷한 의미다. 영성은 박문수의 본관인 고령군.[19] 각 지역별 구전되는 구비 문학을 집대성한 연구 총서.[20] 다만 알려진 설화중 상당수는 허문녕 작가의 1962년작 소설 '암행어사 박문수'에서 창작한 에피소드가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21] 이유는 모르지만 좌수의 말에 따르자면 문제의 그 승려를 만나 병을 고친 이들이 꽤 있다고 한다. 의학 지식이 아예 없는 돌팔이는 아니었던 모양.[22] 계림문고 판 암행어사 박문수에서는 이 승려는 더 막나가는 행위를 한다. 관찰사 집안과 혼담이 오가는 와중 딸을 본인에게 바치라고 한다.[23] 하지만 너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에 오히려 박문수의 눈에 띄어 범인인 것이 들통나게 되었다. 다만 여기에서는 흙 묻은 옷을 딸의 보따리 안에 집어넣고 빠져나갔는데 관속들은 보따리 안에 뭐가 들었는지 구두로만 확인하고 그냥 보내준다.[24] 이 일화는 맹꽁이 서당에서도 소개되었는데, 만화 내에서는 이 사기꾼 스님이 '승천 법사'라고 불렸다. 승천 법사가 타 죽은 후 조사관 중 한 사람이 승천 법사가 정말로 승천했네(...)라는 개드립을 친다.[25] 계림문고 판에서는 박문수가 호위역을 하는 시종과 같이 길을 떠나며 '의심은 승천선사의 제자들이 받을 것이다. 그 제자들은 승천선사 사망 사건의 실태 조사 시점에서 손을 씻은 상태였기에 '승천선사의 땅굴을 흙을 이용해 가로막는 작업 중 묻었던 흔적을 지웠다'는 정황증거도 있으며 더하여 이미 승천선사의 속임수까지 모두 알았던 공범들이기도 하다. 더하여 승천선사가 협박을 합당한 치료비를 초과하는 수준의 재물을 갈취하던 음성적 행위에 비해 승천선사가 사망시 승천선사의 재산을 본인들이 차지하게 된다는 명확한 동기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제자들은 승천선사와 한 패가 되어 무고한 백성들의 재물을 '합리적으로 지급받는 일회성 치료비'가 아닌 '병의 공개를 꺼리는 심리를 이용해 지속적인 벌이수단'으로 사용하던 자들이니 불쌍할 것 없다'는 의미의 발언을 하고 시종은 박문수에게 '정말 잘하신 결정'이라고 동의하며 해당 에피소드가 마무리된다.[26] 천씨 집성촌(集性村, 똑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룬 마을)이었다. 그중에서도 본가에 해당하는 천씨 집안이었는데 다른 성을 쓴다는 이유로 그 부자를 못 살게 굴었던 것. 구씨도 있는 집성촌이라는 말도 있으며, 능인출판사 본에서는 구씨, 천씨가 살아서 마을 이름이 구천동이라고 나온다.[27] 능인출판사 본에서는 천씨 부자의 며느리가 달아난 게 이유로 나온다. 자기 며느리가 달아난 것인데 관계없는 그 부자에게 화풀이한 것이다. 대교출판사 본에서는 천씨가 자기 조카딸을 며느리로 삼았는데, 이 며느리의 행실이 나쁘다는 소문이 나자 천씨가 그 늙은이의 자식이 밤마다 자기 며느리를 불러냈다는 누명을 씌웠다고 나온다.[28] 여기서 박문수의 능력(?)을 알 수 있는게, 길이 잘 닦인 현대에도 덕유산 자락에서 무주 읍내까지는 자동차로 30분 이상 걸리는 험준한 곳인데도 하룻밤만에 주파했다는 것이다.[29] 참수형을 집행하는 사람. 살인이라는 부담스러운 일을 맡고 있는 상당히 특수한 직업이다. 주로 광대들이 겸업하는 경우가 많았다.[30] 익스큐즈하고 용서해줬다는 식으로 각색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랬다면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능인출판사 본도 이 각색본을 따르고 있으며 자신이 어사임을 밝히고 평생 살 수 있는 돈을 주고 다른 곳에 숨어 살되 절대 이 일을 입 밖으로 꺼내면 정말로 처형하겠다고 했다. 아마 아이들이 보는 만화이다보니 천씨 부자를 끔살하는 장면을 그대로 묘사하면 너무 잔인해서 순화한 듯. 사실 능인출판사가 출판하는 만화는 이런 장면을 많이 순화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임진록에서는 동래 부사가 사명당이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된다고 하자 업신여기다가 처형당하는 내용이 있는데 능인출판사에서는 이 부분을 동래 부사를 하옥시키는 장면으로 순화시켰다. 대교출판사 본에서는 대놓고 처형이라고 쓰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 천씨 부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암시했다.[31] 그런데 진짜 죽였다면 이것도 이것대로 문제가 되는데 비록 하늘의 이름을 빌려 죽인 것이며 당사자 다섯명 외에는 아무도 진실을 모르는 일이지만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위법 행위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생명은 오직 왕만이 박탈할 수 있게 되어있다. 암행어사가 아무리 왕을 대행한거라지만 그래도 그것은 불가능하다(탐관오리의 파직조차 어사가 할 수 없고 파직 의견서 비슷한 것만 쓸 수 있을 뿐이었다). 영조가 총애한 박문수니 이런 월권 행위를 해도 봐줬을 수도 있지만 그냥 설화니까 그려려니 하고 진짜라곤 생각하지 말자.[32] 대교출판사 본에서는 아예 '본관도 같은 고령이었다'고 쓰여 있다.[33] 10일 뒤에 있는 아버지의 제사에 쓸 쌀이었다고 한다. 손님을 잘 대접하라는 생전 가르침에 따라 어려운 살림에 제사를 위해 마련한 쌀을 대접한 것.[34] 아예 둘이 서로 호감이 있었다고 쐐기를 박는 버전도 있다.[35] 조선시대에는 혼기를 놓친 처녀, 총각의 원한이 하늘에 닿게 되면 나라에 흉한 일이 생긴다 하여, 국가 차원에서 지방관들로 하여금 노처녀, 노총각의 혼사를 촉진시키는 임시 정책을 시행하게 한 적이 꽤 많다. 짝이 없으면 다른 고을에서까지 찾아다 준다거나, 혼례 비용이 없으면 빌려준다거나 하는 정책뿐 아니라 노처녀 노총각이 많은 고을의 수령일 경우 진급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36] 가진게 없어 어쩔 수 없이 모유를 먹인 것이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며 측은지심에 한 것으로 칭찬받아야 할 것인데도 아내를 핍박하고 음탕하다고 몰아붙이며 폭행을 한 것은 남편이 부덕하다는 것.[37] 구전으로 전해지는 설화답게 이본이 여럿 있는데, 여인이 쓰러진 낯선 사내에게 젖을 물리고 선행의 보답을 받는 건 동일하지만 그 사내가 박문수가 아닌 다른 암행어사인 이본도 있다. 금패령이 함경남도에 있는 지명이고 박문수는 영남 암행어사로 활동했다는 걸 보면 본래는 그냥 암행어사 설화였던 이야기가 원본이었다가 박문수 설화로 변이한 사례로 볼 수 있다.[38] 좌수는 향청의 가장 높은 직위로 보통 그 동네의 힘깨나 쓰는 양반이 맡는 자리다.[39] 이 이방은 과거 난처한 일이 생겼을 때 박좌수(당시는 박백정이었지만)에게 도움을 받아서 그 이후 형님 동생하는 사이였다.[40] 좌수로 임명한다는 걸 적은 임명장을 뜻한다.[41] 박문수의 이름을 댄 이유는 양반들이 "좌수까지 했다면 조정에 친척 있을테니 대봐라" 라고 했는데 하필 조정에서 벼슬하던 사람들 중에서 아는 이름은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밖에 없었다고 한다.[42] 당시는 신언서판이라 하여 외모나 언행, 글을 안다는 것 자체로 어느 정도 신용이 보증되고 사람 대우를 해주던 시대였다. 그래서 대체로 설화에서 박좌수는 출신만 백정이였고 돈을 모은 후 백정일을 그만두고 본인이 글공부도 하고 양반 예절도 배운데다가 본래 외모도 귀티나는 사람이라 박문수나 다른 양반들도 이 사람을 보고 양반 대접을 해주기도 한다.[43] 박문수의 설화를 다룬 어느 소설책에서는 아예 창고에 갇혀 버린다. 그 상태로 며칠이 지나서 굶어 죽을 상황이 되자 겨우 아부해서 좌수가 차려준 음식들을 배터지게 먹고 풀려나게 된다.[44] 현암사에서 출판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옛이야기 백가지'라는 책에 실린 버전에서는 어사가 출두한 후 숙부님을 모셔오라며 사람을 보냈는데, 백정이 '아니 그놈이 왔으면 마땅히 문안을 와야지 어른을 오라가라 하느냐'며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사가 백정에게 '어르신께서 어사또에게 이놈 저놈 하며 야단치는 모습을 보여주면 양반들도 믿을 겁니다'라며 귀띔을 미리 한 후 짜고 친 것.[45] 일부 출판사에서는 진범을 잡기 전 박문수의 착오로 이 사람을 먼저 체포하는데, 실은 점쟁이 노릇을 하려고 장님인 척 하다가 장님 집에 호롱불이 있고, 장님인데 자기 정체를 알았다는 근거로 박문수에게 들켰다고 나온다.[46] 일부 버전에서는 아이들 놀이 도중 잡혔던 내용과 소년의 지혜가 드러난 내용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47] 혹은 또 안심하고 돌아와서 쏘기는 했지만 맞히지는 못했다고 말하자 노인이 그걸로 됐다며 화살을 뽑으라고 말한다.[48] 손님이 왔으니 당연히 대감은 사랑채에 후처는 안채에 있었을 것이다.[49] 옛날 이야기 시리즈에서는 처녀의 아버지가 마을의 자산을 관리하는 아전인데 돈을 잃어버려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상황이라 하며 여기에서 그냥 돈을 주고 끝낸다. 능인출판사 본에서는 장승이 아닌 미륵 석상으로 나온다.[50] 도자값 얘기가 왜 나오냐면 사또가 금을 재료로 해서 만들게 하며 800냥어치의 금을 주었기 때문. 한 마디로 내가 준 금값 내놔라는 말.[51] 배달하던 하인을 지나치게 돈을 많이 들고 다니니 수상하다는 이유로 하옥했다. 반대로 임 대감네에서 온 하인은 무사히 성덕수네 집에 도착해 있었다.[52] 관아가 가까웠다면 모를까 아직 멀었기에 관아에 가기보다는 종소리가 나지 않게 해 관아에 정오가 되었음을 알리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53] 참고로 서양 배경으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왕이 내전에서 자신을 적대했던 신하를 '정오 종이 치면 처형하라'라고 명령하자, 그 신하의 딸이 어떻게든 아버지의 처형을 막기 위해 종 추에 몸을 매달고 종이 울리지 못하게 했고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그 딸의 아버지를 사면해 준다는 내용. 출판하면서 이 이야기가 섞여들어간 듯한데 문제는 타종 방식의 차이이다. 서양식 종은 종줄을 잡아당기면 종 안에 매달린 추가 종 몸체를 때려 울리는 방식이 대부분이라 딸이 자기 목숨을 걸고 추를 붙잡는다면 이게 가능한 이야기지만, 동양식 종은 바깥에서 당목으로 때려 울리는 방식이라 몸으로 종을 막아서 안 울리게 하려면 그 모습이 종지기 눈에 보일 수밖에 없으니 종지기가 눈도 귀도 어둡다는 무리수 설정을 둬야 얘기가 가능해진다.[54] 심지어 전말을 들은 고을 사람들이 "저 사람만도 못한놈 혼내주자!" 라면서 막 달려들자 박문수가 급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습니다." 라며 진정시키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그 박문수까지 분노할 정도라면 이 탐관오리의 횡포가 엄청나게 심했음을 반증하고 있다.[55] 1990년대 후반 전설의 고향에도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한 에피소드를 방영한 적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주인공은 어사가 아니고, 천애고아로 자라 동네에 온갖 민폐를 자행하며 삥을 뜯어 먹고 살던 건달. 건달 역은 윤철형이 맡았고, 신비한 노인은 김흥기가 맡았다. 엔딩은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돌미륵에(앞서 말한 신비한 노인) 지극정성으로 빌던 처녀 앞에 건달이 나타나 노인과 만나 모은 돈 3천냥을 건네주고, 그게 인연이 돼 그녀와 맺어지면서 마무리된다. 결과적으로 돌미륵이 처녀의 아버지도 치료해주고 노총각 건달도 혼인시켜준 것(극중에도 김흥기가 맡은 노인이 건달을 보며 상투만 임시로 틀었지 너 아직 총각이지? 장가보내주랴 대사치는 장면이 나왔다).[56] 건달이 준 돈은 3천냥으로 노인이 다른 이들을 도와주고 각각 천냥씩 어음을 받아 3천냥인 것이 전부로 자신이 모은 돈은 없었다. 애초에 건달은 문경새재에서 왈패 짓을 하다가 불륜을 벌이다 발각돼서 안동으로 튀던 중이었고 당시 수중에 있던 돈이 꼭 열푼으로 자신이 술 한대를 닷푼에 먹고 남은 돈으로 노인에게 술을 사주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57] 맹꽁이 서당에 따르면 당시 박문수는 33세였고 그때 과거를 보지 못하면 3년 후인 36세에야 재도전이 가능해서였다.[58] 하지만 실제로는 어차피 경사 때마다 과거를 치렀기에 다음 해에 뭔 일로 과거를 볼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도 한양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에 한한 이야기라 박문수 입장에서 사실상 다음 기회인 경종 3년에 급제를 못했으면 노론이 득세한 영조 시절이니 급제를 영영 못할 수도 있기는 했다.[59] 이 어른이 당대 소론의 영수이자 박문수의 먼 친척 관계였던 운곡 이광좌라는 얘기가 있다. 백사 이항복의 현손.[60] 박문수와 같은 당색이자 정치 대선배인 최규서도 이런 설화가 있다. 과거보러 가는 중 귀신이 나온다는 한 흉가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말대로 진짜 귀신이 나왔으나 놀라지는 않았다. 귀신은 고려 시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충신으로 이 집은 본래 자신의 무덤이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 무덤 흔적이 사라지고 그 위에 집이 지어진데다 부뚜막이 해골 위에 지어지는 바람에 밤마다 집주인에게 나타나 자신의 해골을 수습해달라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모두 놀라서 죽거나 도망갔고 자연스럽게 집은 흉가가 되었다. 다음날 최규서가 귀신의 말대로 땅을 파보니 진짜 해골 1구가 있었고 정성껏 장례를 치루었다. 그날밤 귀신이 나타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과거 답안지를 선물로 주고 떠났고 최규서는 그 시로 급제한 뒤 식구들을 지금의 집보다는 나은 곳으로 이주시키고 흉가는 리모델링해서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61] 위 설화 항목에서 확인 가능.[62] 담당 성우가 셜록의 왓슨을 맡았기 때문에 박문수가 왓슨 드립을 치고, 기동이가 한 번 더 친다.[63] 계속 바뀐다.[64] 그래서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은 구미 모래실의 터줏대감인 백씨들과 서로 누가 더 양반입네 하고 싸웠다나 뭐라나..[65] 박문수는 소론이고 정약용은 남인.[66] 반면에 정약용이나 김정희가 암행어사 였다는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67] 그 중 절반 이상이 '어사 탐정 박문수' 수준이다. 애매한 송사 처리와 관련된 일화들 등 다른 암행어사들의 일화도 모조리 박문수의 이름으로 흡수되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예가 진주의 박씨 성을 가진 백정을 삼촌으로 모신 이야기.[68] 포항 영일만에 가재 도구와 관들이 밀려와 해변에 쌓인 것을 보고 사태를 직감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조선 8도가 가깝지 않았고 함경도는 높은 산맥에 막혀있었단걸 생각하자.[69] 어사라고 하면 모두들 암행어사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신분을 비밀로 하고 암행어사의 일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구휼, 감찰 등을 위해 파견이 될 때가 더 많았으며 파견된 어사가 제대로 일을 하는지를 감시하는 역할로 암행어사를 비밀리에 딸려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어사와 암행어사는 사실 동격인데 암행어사라고 권한이 더 있는건 아니며 오히려 고생할 확률이 더욱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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