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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

배중진 2020. 11. 24. 01:24

존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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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35대 대통령임기부통령신상정보출생일출생지사망일사망지학력정당배우자자녀종교서명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1961년 1월 20일 ~ 1963년 11월 22일
린든 B. 존슨

전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제34대)

후임: 린든 B. 존슨(제36대)

1917년 5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
1963년 11월 22일 (46세)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하버드대학교
민주당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1953-1963)
2
로마 가톨릭
 

존 피츠제럴드 ("잭") 케네디(John Fitzgerald ("Jack") Kennedy, 1917년 5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 또는 약어로 JFK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다. 1961년부터 1963년에 암살당하기까지 겨우 3년 가까이 대통령직에 있었지만 미국의 자유주의에 대한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남태평양에서 PT-109 고속 어뢰정의 해군 장교로 근무했고,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하원,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상원으로 미국 의회에 있었으며,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케네디는 대통령직에 1961년 1월 20일부터 1963년 11월 22일까지 있었고, 임기 동안에 피그스 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베를린 장벽, 우주 경쟁, 베트남 전쟁 간접 개입, 흑인 민권 운동 등 많은 일이 일어났었다.

다만, 케네디는 당시 미국 대통령 중에서 유일한 로마 가톨릭 신자라는 점과, 상류사회에서 잉글랜드계 혈통에 밀리던 아일랜드계 혈통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내세운 개신교 세력의 반발과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1]

목차

생애[편집]

 

해군 중위 시절 PT 109호에서

존 F. 케네디는 1917년 5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 빌즈 가 83번지에서 태어났다. 케네디 집안은 아일랜드인의 후손으로 19세기 후반 아일랜드에 닥친 대기근으로 말미암아 미국 매사추세츠주로 이주한 가톨릭 집안이다. 개신교가 사회의 주류여서 직업선택에서 차별받던 로마 가톨릭교회 집안 출신이었는데, 그 집안 형제 가운데 한명쯤 대통령이 나오기를 원했던 대(大) 조지프 P. 케네디의 아들로 태어나 1940년 하버드 대학 국제관계학을 전공으로 쿰 라우데 급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태평양 전쟁 중에 해군으로 복무했었다.

 

케네디와 닉슨 간의 토론

1950년대를 전후하여 민주당 정치인으로 두각을 드러냈고 19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 미국의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유세 도중 그는 미국이 소련보다 핵무기 개발 경쟁에서 뒤졌기 때문에 '미사일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하이오주의 선거인단을 장악하지 못했음에도 대통령에 당선되었기에 오하이오주에서 패배한 후보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한다는 이른바 '오하이오 징크스'를 깬 유일한 대통령이다.

대통령 재임[편집]

 

취임식을 올리는 케네디

유럽에서의 베를린 위기와 카리브 해에서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그에게 부담이 되었으나 극복하였으며, 핵 실험 금지 조약을 성사시켰다.

뉴 프런티어[편집]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케네디가 행한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주장한 새로운 개척자 정신을 말한다. 1961년 4월 입법부 의원들은 경제적으로 불황적인 지역들에 원조를 찬성하였다. 5월 의회는 1시간 당의 임금을 1 달러에서 1 달러 25 센트로 증대하는 데 찬성하였다. 1962년 9월 의회는 케네디의 무역 확장 결의서를 통과시켰다. 결의서는 대통령에게 관세를 삭감하는 데 넓은 권력을 주어 미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 국가들과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케네디의 가장 성공적인 프로그램들 중의 하나는 미국 평화 봉사단이었다. 1961년 3월 행정적 명령에 의하여 착수되었고, 후에 의회에 의하여 공인되었다. 평화 봉사단은 개발도상국들에 수천명의 미국인들을 보내어 그들의 생활 기준들을 늘였다.

케네디는 또한 주요 입법상 패배를 만나기도 하였다. 의회는 내각 수준의 도시 문제부와 연령자들을 위한 의료 계획을 거절하였다. 2개의 계획은 후에 린든 B. 존슨의 대통령 입기 때에 통과되었다. 케네디의 농장 프로그램도 또한 패배를 겪었다.

재래식 병기의 증가에 의하여 국가의 국방 정책들을 인정하였으며, 비핵무기 전쟁들을 준비하고 핵무기 사용을 피하는 모든 노력들을 만들기를 원하였다.

흑인 민권 운동[편집]

 

민권 운동에 강연하는 케네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동등한 권리를 위한 주장들은 케네디 정권 도중의 주요 국내적 논점이 되었다. 1961년 지방의 분리적 법률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흑백인들을 포함한 비폭력적 단체 "자유의 기수"는 버스를 타고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들어갔다. 백인 폭동자들이 그들을 공격하자, 당시 로버트 케네디 법무 장관은 질서를 복구하는 도움을 주기 위하여 도시에 연방 보안관들을 보냈다. 1962년 수많은 반대에 불구하고 제임스 메러디스는 미시시피 대학교에 처음으로 등록된 흑인 학생이 되었다.

1963년 동등한 인권과 경제적 권리들을 위한 흑인들의 주장들이 증가하였다. 미국 전역을 통하여 인종적 항의와 데모들이 일어났다. 5월 버밍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다음 달에 케네디는 앨라배마 대학교에 흑백인의 공동 입학을 집행하도록 앨라배마 주군을 연방화하였다. 9월에는 앨라배마 주의 3개의 도시들에서 학교들의 공동 입학을 보증하기 위하여 다시 주군을 연방화하였다. 8월 28일에는 워싱턴 D.C.에서 흑인들의 동등한 권리를 위한 요구를 데모하기 위하여 200,000명의 사람들이 "자유의 행렬"을 결성하였다.

흑인들의 주장들의 증가를 만나면서 케네디는 인종에 상관없이 공공장소들에 손님들을 허락하는 데 입법을 통과시키기를 의회에 청하였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쿠바 미사일 위기[편집]

1961년 4월 17일 망명한 쿠바인 반란군들이 쿠바혁명으로 수립된 피델 카스트로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자기들의 모국을 침공하였다. 폭력은 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케네디는 미국에 의하여 계획된 불행한 침입을 위한 책임을 받아들였다.

소비에트 연방이 쿠바에 미사일을 세우는 것을 미국이 알아내자 1962년 10월에 또 다른 위기들이 일어났다. 케네디는 해군에게 쿠바를 봉쇄하는 명령을 내렸다. 군함들은 쿠바에 소비에트 연방의 미사일을 배달하는 배들을 돌려보내는 데 명령을 받았다. 또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대략 14,000명의 공군 예비병들을 부르기도 하였다.

1주 동안 전쟁은 좋아보였다. 그러고나서 니키타 흐루쇼프 소비에트 연방 총리는 모든 소비에트 공세 미사일들을 이동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고나서 케네디는 검역소를 들어올렸다.

서베를린 연설[편집]

 

서베를린 연설의 현장

1963년 6월 26일 서베를린을 방문하여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 베를린 장벽 설치를 공산주의의 실패의 증거로 삼으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자유인은 그들이 어디에 있건 베를린 시민이라 할 수 있으므로 저 또한 자유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독일어: Ich bin ein Berliner.).'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흐루쇼프와 회담에서

서베를린 시민의 5/6이 거리에 나왔으며 케네디 자신도 놀랐다고 하였다.

1961년 오스트리아 에서 흐루쇼프와 회담하면서 베를린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고 위기만 더욱 깊어졌다. 미·소 양국은 군사력을 증가시켰다. 8월에 동독인들은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시민들을 막기 위하여 동·서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세웠다. 케네디는 미국의 군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주군들과 예비군들을 약 145,000명이나 동원하였다.

암살 사건[편집]

 

암살 직전의 케네디

이 부분의 본문은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입니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는 부인 재클린 부비에르와 존슨 부통령 부부와 함께 자신의 재선을 위하여 계획세운 1964년 대통령 선거 운동 전에 텍사스주의 민주당 회의에서 갈라짐을 고치기 위하여 댈러스에 내려왔는데 리무진에 타고 있던 중 리 하비 오스월드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향년 46세.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졌으며, 세계 92개국의 국가원수와 사절단들이 참석하였다. 대통령직은 부통령이었던 존슨이 승계했다.

뉴욕 아일드와일드 국제공항의 명칭이 이 사건을 추념하여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으로 바뀌었다.

비판[편집]

한국 관련 발언[편집]

1962년 4월 30일 백악관 노벨상 수상자 축하 만찬에서 이루어진 펄 벅과의 아시아 문제에 관한 짧은 대화에서 케네디는 "일본보고 한국 재건을 도우라고 하는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며 자문을 구했고, 놀란 펄 벅은 자신이 집필한 'The Living Reed'를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렸다고 한다.[2]

재평가[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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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0월)

케네디의 사후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알려진 그의 여러 업적들도 다시 평가받는 분위기다.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이 미국 근해에 공산정부(쿠바)를 유지시키고 장기 군비 확장을 자극한 사건으로, 베트남전 역시 과거에는 미국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베트남 철수를 지시한 지도자의 이미지였으나, 최근 비밀 해제된 자료에 의하면 정치적 목적에 의해 베트남전을 확대시켰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미국의 역사기술이 '성공의 기록'에서 '미국도 잘못이 있고 결점이 있다, 그의 결점 역시 인정해야 한다.' 라는 수정주의로 돌아선 영향이 있다.

FED에서 국립중앙은행으로의 조폐권 이행시도[편집]

당시 미국정부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연방준비은행에서 지폐를 발행해왔고, 현재까지도 운영되어오고 있다. 이 은행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승인한 7명의 이사들로 구성된 이사회를 바탕으로하나, 소수의 국제민간금융업자들 소유의 사설은행이었고 현재까지 정부로부터 철저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케네디는 국가재정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헌법상의 조폐권(지폐를 발행하는 권리)를 가진 새 국립중앙은행으로 교체하려했지만 서거 후 이 정책은 무산되었다.

트리비아[편집]

링컨과의 연관성[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입니다.

존 F. 케네디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일치하는 점이 많으며 다음은 공통점의 일부이다.

  • 두 대통령 모두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는 점.
  • 두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은 재판 없이 의문사를 당했다는 점.
  • 그의 부인은 백악관에서 자식을 잃었다는 점.
  • 두 대통령이 하원의원에 당선된 때와 취임한 때가 1846년과 1946년이라는 점.
  • 두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때와 취임한 때가 1861년과 1961년이라는 점.
  • 두 대통령 모두 테쿰세의 저주를 당했다는 점.
  • 그의 후계자의 성이 존슨이라는 점 - 앤드루와 린든 B(두 대통령이 민주당 소속).
  • 그 두 후계자 존슨은 100년 차이라는 점 - 1808년생과 1908년생.
  • 그의 부인은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다는 점 - 메리 토드와 재클린 부비에르
  • 두 대통령 모두 흑인들을 위해 애를 썼던 점 - 노예 해방과 민권 운동.
  • 로버트와 에드워드란 친족이 있었다는 점 - 케네디의 동생들과 링컨의 아들들.
  • 두 대통령의 초상화가 모두 미국의 동전에 그려진 점.
  • 링컨 대통령은 포드 극장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만든 링컨 컨티넨탈 차를 타고 가다가 암살당했다는 점.

가족 관계[편집]

 

케네디 가족 (1962년 크리스마스)

 

케네디 형제. 좌로부터 법무 장관 로버트 F. 케네디, 연방 상원 에드워드 M. 케네디와 대통령 존 F. 케네디

같이 보기[편집]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 (선거인단)결과당락

1946년 선거 하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1선거구) 80대 민주당  71.87% 69,093표 1위  
1948년 선거 하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1선거구) 81대 민주당  100.00% 106,366표 1위  
1950년 선거 하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1선거구) 82대 민주당  82.28% 87,699표 1위  
1952년 선거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부) 83대 민주당  51.35% 1,211,984표 1위  
1958년 선거 상원의원 (매사추세츠 제1부) 86대 민주당  73.20% 1,362,926표 1위  
1960년 선거 미국의 대통령 36대 민주당  49.72% 34,226,731표 (303명) 1위  

각주[편집]

싱클레어 루이스의 풍자소설 엘머 갠트리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엘머 갠트리의 논쟁장면에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출마한 것에 대해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들이 못마땅해하는 내용이 있다. 주인공 엘머 갠트리는 부흥회를 제니스 시에서 할 것인가하는 논쟁을 제니스 시 개신교 신자들과 벌이는데, "신도들이나 제니스시의 교회 평의회(Council of Churches)와 무관하게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믿음은 사업이 될 수 없어요. 부흥운동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요.난 반대요."라며 부흥회에 반대하는 강직한 목사에게 기독교 근본주의자 조지 배비트가 "거리에 나가보시오. 온통 방황하는 젊은이들 천지요. 위험천만한 무신론 무정부주의가 판 치고 있소.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모두 개신교도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그러니 이제 로마가톨릭교교인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고 있는 지경이라는 말이오. "라며 부흥회를 열어아 한다고 주장한다.— 리처드 브룩스, 김진수.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엘머 갠트리〉〉. 《신을 찾는 사람들》. 예루살렘. 148쪽.

  1.  
  2.  Esposito, Joseph. “Pearl Sydenstricker Buck”. 2020년 11월 9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존 F. 케네디

제35대 미국 대통령

전 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961년 1월 20일 ~ 1963년 11월 22일 후 임
린든 B. 존슨
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밀러드 필모어 · 프랭클린 피어스 · 제임스 뷰캐넌 · 에이브러햄 링컨 · 앤드루 존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러더퍼드 B. 헤이스 · 제임스 A. 가필드 · 체스터 A. 아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윌리엄 매킨리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 허버트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 · 리처드 닉슨 · 제럴드 포드 · 지미 카터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전임
미국의 과학자들
제35대 타임 올해의 인물

 

1961년
후임
교황 요한 23세
전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의 국가 원수
1961년 1월 20일 ~ 1963년 11월 22일
후임
린든 B.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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