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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공습

배중진 2019. 11. 14. 11:45

둘리틀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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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공습
태평양 전쟁, 일본 본토 공습의 일부
Army B-25 (Doolittle Raid).jpg
공격 당일, 항공모함 호넷에서 이륙하는 둘리틀 폭격대
날짜1942년 4월 18일
장소
도쿄를 비롯한 일본 주요 도시
결과

미군의 승리

교전국

미국 미국

중화민국 중화민국[1][2]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지휘관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
윌리엄 홀시 주니어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병력
B-25 미첼 경폭격기 16기-
피해 규모
전사 - 3명
포로 - 8명 (이중 4명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
대략 50여 명 사망,
400여 명 부상

둘리틀 공습( - 空襲, 영어: Doolittle Raid, 1942년 4월 18일)은 제임스 해롤드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 간단히 Jimmy Doolittle) 중령이 지휘하는 B-25 미첼 경폭격기 편대가 항공모함 USS CV-8 호넷을 출발하여 일본을 폭격한 사건이다.

지미 둘리틀 중령(당시 계급)의 지휘하에 도쿄, 요코하마, 요코스카, 가와사키, 나고야, 고베, 욧카이치, 와카야마, 오사카일본 각지를 B-25 미첼 폭격기 16대로 폭격하였다. 이 공습으로 사상자 363명, 군 시설과 공장 등 약 350동의 손해를 주었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불침의 하늘이라 호언장담하던 일본의 군부, 특히 일본 해군 상부에 준 충격은 엄청났고, 미국은 비록 일본에 큰 피해를 입히진 않았지만 이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이 둘리틀 공습을 토대로 그해 6월 초에 미일 양국의 운명을 뒤바꾼, 진주만 공격 후 두 번째로 대규모 전투인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지게 된다.

배경[편집]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군은 일방적인 패퇴가 계속되었고, 1942년 2월 24일에 일어난 일본 해군 잠수함의 미국 본토의 캘리포니아주 산타 바바라 엘우드의 정유소에 대한 포격은 미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따라 사기를 높이는 방책으로서 미군은 일본의 수도 도쿄를 폭격할 계획을 세웠다.

미국 육군은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 행동 반경 내에 일본을 포함하는 기지는 없었고, 소련의 영토는 일소 중립 조약 때문에 폭격을 위한 기지 사용은 실시할 수 없었다. 또, 미국 해군항공모함 함재기는 항속 거리가 짧고, 폭격을 위해서는 항공모함을 일본 근해에 접근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은 태평양 상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가운데, 미국 해군의 잠수함 승무원이 "항속 거리가 긴 육군의 폭격기를 항공 모함으로부터 발진시키면 어떻겠는가"라고 루스벨트 대통령에 진언했다. 미군은 급히 B-25 폭격기를 항공모함의 짧은 비행 갑판으로부터 발진할 수 있도록 경량화를 도모했다.

육군 폭격기항공모함으로부터의 발진은 실전에서는 처음이며, 이 작전은 극비 사항으로 여겨졌다. 또, 폭격 이후 항공모함에 착함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열도를 횡단해 당시 일본군과 전쟁중이던 중국 동부로 중화민국군의 유도 신호 아래에서 착륙할 예정이었다. B-25를 탑재하는 항공 모함은 호넷 호였고, 엔터프라이즈 호가 호위를 맡아 뒤따르게 되었다.

경과[편집]

1942년 4월 1일, 16기의 B-25 미첼을 탑재한 항공모함 호넷 호 및 호위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도중에 엔터프라이즈와 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이 합류해 일본으로 향했다. 공격 예정 전날인 4월 17일, 미해군 함선 레이다에 비친 국적 불명의 2척의 어선을 초계기로 확인 중에 일본군의 감시정이란 것이 확인되었다. 이들 중 1척은 경순양함 내슈빌 호의 포격으로 격침되었고(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의 공격도 받고 있었다), 승무원 14명 전원은 함정과 운명을 같이했다. 발진 예정 해역 앞의 예상 외의 원거리에서 일본군에게 발견되어, 폭격대는 예정보다 빨리 항공모함 호넷 호에서 발진했다. 덧붙여 내슈빌은 또 1척의 감시정을 격침했다.

지미 둘리틀 중령이 인솔하는 B-25 폭격기 16기는 도쿄 시, 가와사키 시, 요코스카 시, 나고야 시, 욧카이치 시, 고베 시를 폭격했다.

일본 측에는 50명의 사망자, 가옥 262호의 피해가 나왔다.

폭격기는 일본 열도를 횡단해, 그 중 12기는 중국 본토에 추락, 3기는 중국 영해에 추락, 나머지 1기는 소련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했다. 소련에 착륙한 폭격기의 승무원은 억류되었다가 얄타밀약 성립후 석방되었다. 승무원은 전사가 1명, 행방 불명이 2명, 포로가 8명이고, 나머지는 미국으로 귀환했다. 대본영은 이 피해를 "적기 9기를 격추했으며, 손해는 적다"고 포장해 발표했다. 그러나 폭격 당일의 날씨는 맑았으며, 추락한 항공기 중 민간인에게는 단 1기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본영의 발표에 대해 "웃기지 마라. 황군은 아무것도 격추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 일본군에 체포된 폭격기 승무원은 도시의 무차별 폭격을 실시한 혐의에 대해 포로가 아닌 전쟁범죄자로서 다루어져 조종사 2명과 사격수 1명이 처형되었으며, 5명은 징역을 살았다. 미국은 제네바 협약을 어긴 사형에 대해 "야만적인 만행"이라고 비판했으며, 20세기 폭스1944년에 선전 영화 《퍼플 하트》에서 이들을 다루었다.

영향[편집]

미드웨이 해전[편집]

이 공격을 보고받은 후에, 본토 방공을 맡고 있던 일본 육군해군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 함대 사령장관은 충격을 받았다. 진주만 공격에서 공격을 면한 미국항공모함 기동부대는 1942년 초반부터 이미 크고 작은 섬들에 대해 공격하고 있었지만, 이 본토 공습 이후 야마모토 장관이 일본 본토의 안전 확보를 위해 미군 항공모함 섬멸을 위한 교두보로 미드웨이 섬 공략 작전의 실행을 서둘렀다는 설도 있다.

중국 대륙 비행장의 파괴[편집]

일본 육군은 둘리틀 공습의 재발을 막기 위해 작전에 이용된 저장 성 이남의 중국군의 비행장을 이용할 수 없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 파견군에 명해 파괴 작전을 실시했다. 작전은 1942년 5월 중순부터 6월에 걸쳐 실시되어 동원 병력 약 18만, 비행기 3개 비행 전대에 의해 목적 비행장의 파괴와 같은 곳을 방어하는 구주퉁이 지휘하는 중국 제3전구군 34개 사단을 격퇴하는 것에 성공한다. 작전은 1942년 9월 30일에 종료되었다.

나리마스 비행장[편집]

둘리틀 공습은, 일본의 수도 방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동부 군사령관 나카무라 코타로 대장은, 육군 방공 학교 및 고사포 제 7 연대의 고사기관포를 황궁 주변에 배치해, 1942년 4월 20일에, 독립비행 제 47 중대를 방위 사령관의 지휘하에 두어 수도 방공을 맡겼다. 일본군에서는, 이를 위한 비행장으로서 나리마스 비행장을 건설했다.

의의[편집]

일본의 본토는 둘리틀 공습 이전까지 외세에 의해 단 한 번도 직접 타격을 받은 적이 없다. 13세기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은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였고, 조선초에 대마도 정벌을 당하였지만 타격은 대마도에 국한되었을 뿐 일본 본토는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둘리틀 공습에 의한 일본 본토 직접 타격은 의의가 크다 볼 수 있다.

각주[편집]

  1. Glines, General James H. "Jimmy" Doolittle, with Carroll V. (1995). 《I could never be so lucky again : an autobiography》. Atglen, PA: Schiffer Military/Aviation History. 3, 541쪽. ISBN 0887407374. 
  2. James M. Scott. “The Untold Story of the Vengeful Japanese Attack After the Doolittle Raid”. 《Smithsonian》 (영어).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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