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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三國志, (영어)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3세기 경)
서진의 진수(陳壽)가 짓고 남조 송나라의 배송지(裴松之)가 주를 달아 내용을 보충한 삼국시대의 인물들을 다룬 역사서로, <위지(魏志)> 30권, <촉지(蜀志)> 15권, <오지(吳志)> 20권, 합계 65권으로 되어 있다. 중국의 정사인 24사[1] 중 하나이며, 특히 ≪사기≫,≪한서≫,≪후한서≫와 함께 전사사(前四史)로 분류된다.
기전체 사서이나 표(表)나 지(志)는 포함되어 있지 않고 기(紀)와 전(傳)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는 나라에서 만든 관찬서가 아니라 개인이 만든 사찬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는 모두 사찬서로, 편찬 순서는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순인데, ≪진서(晉書)≫ 이후로는 모두 관찬서다.
원래 삼국시대 이후 천 년 동안 삼국지라고 하면 이 역사책 정사 삼국지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소설인 삼국지연의가 워낙 유명해졌기 때문에 현대에는 '삼국지연의'를 '삼국지'라고 하고 이 역사책을 집어 지칭하는 경우 정사라는 말을 굳이 붙여 '정사 삼국지'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이하 별다른 경우가 아니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삼국지≫로 표기한다.
서진의 진수(陳壽)가 짓고 남조 송나라의 배송지(裴松之)가 주를 달아 내용을 보충한 삼국시대의 인물들을 다룬 역사서로, <위지(魏志)> 30권, <촉지(蜀志)> 15권, <오지(吳志)> 20권, 합계 65권으로 되어 있다. 중국의 정사인 24사[1] 중 하나이며, 특히 ≪사기≫,≪한서≫,≪후한서≫와 함께 전사사(前四史)로 분류된다.
기전체 사서이나 표(表)나 지(志)는 포함되어 있지 않고 기(紀)와 전(傳)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는 나라에서 만든 관찬서가 아니라 개인이 만든 사찬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는 모두 사찬서로, 편찬 순서는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순인데, ≪진서(晉書)≫ 이후로는 모두 관찬서다.
원래 삼국시대 이후 천 년 동안 삼국지라고 하면 이 역사책 정사 삼국지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소설인 삼국지연의가 워낙 유명해졌기 때문에 현대에는 '삼국지연의'를 '삼국지'라고 하고 이 역사책을 집어 지칭하는 경우 정사라는 말을 굳이 붙여 '정사 삼국지'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이하 별다른 경우가 아니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삼국지≫로 표기한다.
2. 구성[편집]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의 표제는 위지(魏志), 촉지(蜀志), 오지(吳志)인데, 송나라 이후 위서, 촉서, 오서라는 표제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특징이라면 전체적인 역사보다 다양한 유명 인물들의 열전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지>는 왕침이 쓴 ≪위서≫ 등을 인용했고 <오지>는 위소가 쓴 ≪오서≫를 인용했다. 일단 국력이 가장 컸던 위나라의 기록이 가장 많고, 촉한의 기록이 가장 적은데, 특히 관우, 장비 등의 창업 공신들의 기록은 매우 짧다. 진수가 삼국시대 중에서도 꽤나 후반에 태어난 인물이고[2] 그 이전은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인, 굉장히 혼란한 시기라 자료를 구하기가 많이 힘들어서 그런듯하다. 관우, 장비같이 굵직굵직한 인물들도 생몰년이나 출신지가 제대로 표기 안 된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이에 대해 <후주전> 말미에 있는 진수가 제갈량과 유선을 까면서 쓴, "사관을 두지 않았다."[3]는 문장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후주전>을 보면 알겠지만 정작 바로 몇 줄 위에 있는 경요(景耀) 원년에 사관이 기록한 내용이 있으며, 당나라의 유지기(劉知幾)는 진수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후주전> 말미에 있는 진수가 제갈량과 유선을 까면서 쓴, "사관을 두지 않았다."[3]는 문장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후주전>을 보면 알겠지만 정작 바로 몇 줄 위에 있는 경요(景耀) 원년에 사관이 기록한 내용이 있으며, 당나라의 유지기(劉知幾)는 진수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景耀元年, 姜維還成都. 史官言景星見, 於是大赦, 改年。
경요(景耀) 원년(258년),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사관(史官)이 경성(景星-도가 있는 나라에서 보인다고 하는 상서로운 별)이 보였다고 말하자 이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陳氏≪國志·劉后主傳≫云:"蜀無史職,故災祥靡聞。" 案黃氣見于姊歸,群鳥墮于江水;成都言有景星出,益州言無宰相氣;若史官不置,此事從何而書?蓋由父辱受髡,故加茲謗議者也。
(진수가 ≪삼국지≫·<후주전>에 이르기를, “촉에는 사관(史官)이 없어서 천재지변과 상서로운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라고 했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자귀현(秭歸縣)에 누런 안개가 끼고, 강주현(江州縣)에서 새 떼가 물에 떨어졌다고 하였으며, 성도에 상서로운 별이 나타나고, 익주에 재상의 기운이 없다고 하였다.[4] 사관을 두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은 어떻게 기록됐단 말인가? 아마도 아버지가 제갈량에게 머리칼을 밀리는[5] 치욕을 당했기 때문에 이렇게 헐뜯었을 것이다.)- 유지기,≪사통(史通)≫권 7·<곡필(曲筆)>[6]
2.1. 위서(魏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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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에는 위나라 인물뿐만 아니라 후한 때에 유비 또는 손오 측에 가담한 인물을 제외하고 후한말 군웅들을 포함해서 모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촉서와 오서와는 비교조차 못할 양을 지닌다. 사실 위나라가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니만큼 사서의 기록에서도 양과 질에서 압도적일 수 밖에 없다.
위서(魏書) 구성 | |
권1 위서1 무제기 (武帝紀) | 조조(曹操) |
권2 위서2 문제기 (文帝紀) | 조비(曹丕) |
권3 위서3 명제기 (明帝紀) | 조예(曹叡) |
권4 위서4 삼소제기 (三少帝紀) | |
권5 위서5 후비전 (后妃傳) | |
권6 위서6 동이원유전 (董二袁劉傳) | |
권7 위서7 여포장홍전 (呂布臧洪傳) | |
권8 위서8 이공손도사장전 (二公孫陶四張傳) | |
권9 위서9 제하후조전 (諸夏侯曹傳) | |
권10 위서10 순욱순유가후전 (荀彧荀攸賈詡傳) | |
권11 위서11 원장양국전왕병관전 (袁張凉國田王邴管傳) | |
권12 위서12 최모서하형사마전 (崔毛徐何邢鮑司馬傳) | |
권13 위서13 종요화흠왕랑전 (鍾繇華歆王朗傳) | |
권14 위서14 정곽동유장유전 (程郭董劉蒋劉傳) | |
권15 위서15 유사마양장온가전 (劉司馬梁張溫賈傳) | |
권16 위서16 임소두정창전 (任蘇杜鄭倉傳) | |
권17 위서17 장악우장서전 (張樂于張徐傳) | |
권18 위서18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 (二李臧文呂許典二龐閻傳) | |
권19 위서19 임성진소왕전 (任城陳蕭王傳) | |
권20 위서20 무문세왕공전 (武文世王公傳) | |
권21 위서21 왕위이유부전 (王衛二劉傅傳) | |
권22 위서22 환이진서위노전 (桓二陳徐衛盧傳) | |
권23 위서23 화상양두조배전 (和常楊杜趙裴傳) | |
권24 위서24 한최고손왕전 (韓崔高孫王傳) | |
권25 위서25 신비양부고당융전 (辛毗楊阜高堂隆傳) | |
권26 위서26 만전견곽전 (滿田牽郭傳) | |
권27 위서27 서호이왕전 (徐胡二王傳) | |
권28 위서28 왕관구제갈등종전 (王毌丘諸葛鄧鍾傳) | |
권29 위서29 방기전 (方技傳) | |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烏丸鮮卑東夷傳) |
2.2. 촉서(蜀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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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구성 | |
권31 촉서1 유이목전 (劉二牧傳) | |
권32 촉서2 선주전 (先主傳) | 유비(劉備) |
권33 촉서3 후주전 (後主傳) | 유선(劉禪) |
권34 촉서4 이주비자전 (二主妃子傳) | |
권35 촉서5 제갈량전 (諸葛亮傳) | |
권36 촉서6 관장마황조전 (關張馬黃趙傳): | |
권37 촉서7 방통법정전 (龐統法正傳) | |
권38 촉서8 허미손간이진전 (許麋孫簡伊秦傳) | |
권39 촉서9 동유마진동여전 (董劉馬陳董呂傳) | |
권40 촉서10 유팽요이유위양전 (劉彭廖李劉魏楊傳) | |
권41 촉서11 곽왕상장양비전 (霍王向張楊費傳) | |
권42 촉서12 두주두허맹내윤이초극전 (杜周杜許孟来尹李譙郤傳) | |
권43 촉서13 황이여마왕장전 (黃李呂馬王張傳) | |
권44 촉서14 장완비의강유전 (蒋琬費禕姜維傳) | |
권45 촉서15 등장종양전 (鄧張宗楊傳) |
나무위키의 촉서 틀에는 권39(촉서9)에 마속이 들어 있었지만 이는 형인 마량이 촉서9에 있어 부속으로 붙은 것으로 정사에는 별도의 열전이 없다. 더군다나 촉서9는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고 촉을 이끈 인재들을 묶었는데 마속은 중요한 전투에서 패하고 책임을 회피해 달아나다가 붙잡혀 처형된 인물이라 여기에 넣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마속 열전을 실제 있다면 촉에 큰 해를 입힌 인물들을 묶은 권40(촉서10)에 넣는 것이 합당하다.
2.3. 오서(吳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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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吳書) 구성 | |
권46 오서1 손파로토역전 (孫破虜討逆傳) | |
권47 오서2 오주전 (吳主傳) | 손권(孫権) |
권48 오서3 삼사주전 (三嗣主傳) | |
권49 오서4 유요태사자사섭전 (劉繇太史慈士燮傳) | |
권50 오서5 비빈전 (妃嬪傳) | |
권51 오서6 종실전 (宗室傳) | |
권52 오서7 장고제갈보전 (張顧諸葛步傳) | |
권53 오서8 장엄정감설전 (張嚴程闞薛傳) | |
권54 오서9 주유노숙여몽전 (周瑜魯肅呂蒙傳) | |
권55 오서10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 (程黃韓蔣周陳董甘凌徐潘丁傳) | |
권56 오서11 주치주연여범주환전 (朱治朱然呂範朱桓傳) | |
권57 오서12 우육장낙육오주전 (虞陸張駱陸吾朱傳) | |
권58 오서13 육손전 (陸遜傳) | |
권59 오서14 오주오자전 (吳主五子傳) | |
권60 오서15 하전여주종리전 (賀全呂周鍾離傳) | |
권61 오서16 반준육개전 (潘濬陸凱傳) | |
권62 오서17 시의호종전 (是儀胡綜傳) | |
권63 오서18 오범유돈조달전 (吳範劉惇趙達傳) | |
권64 오서19 제갈등이손복양전 (諸葛滕二孫濮陽傳) | |
권65 오서20 왕누하위화전 (王樓賀韋華傳) |
3. 내용[편집]
삼국을 다룬 시각에선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아 조조를 무제(武帝)로, 조비를 문제(文帝), 조예를 명제(明帝) 등으로 호칭했고, 촉한은 유비, 유선을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불렀다. 그러나 오나라는 얄짤없이 모두 그냥 이름으로 불렸다.{...) 이렇게 위나라가 정통이지만 촉나라는 오나라보다는 더 권위있게 표현했다.[8] 조조가 위왕(魏王)에 오를 때는 깔끔하게 위왕이 되었다고만 썼지만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될 때는 신하들과 유비 본인이 한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글들을 자세히 실어 좀 더 비중 있게 표현한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후대의 촉한정통론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에게는 불만이 있었는지, 촉의 군주를 더욱 높이고(선주 → 소열제), 위의 군주는 그냥 조조, 조비 등으로 표기한 판본이 나오기도 했다.
인물의 알려진 일대기를 작성한 뒤 마지막에 각 인물의 평을 적는데, 조조는 시대를 초월한 영걸(英傑), 유비는 유방의 풍모가 있는 효웅(梟雄)) 등으로 묘사하며 하후돈과 조운, 한당은 거의 결점이 없는 모범적인 장수로 표현되는 점으로 볼 때 ≪삼국지≫는 서진 사서의 핵심인 조위정통론의 한계를 제외한 서술에서는 비교적 공정하게 저술한 편으로 위나라 편애라는 설은 좀 억측이다. 그러나 ≪삼국지≫의 내용을 얕게 이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주장되기도 한다.
서진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사마염을 본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사마의를 사마선왕 또는 선제, 사마사를 사마경왕 또는 경제, 사마소를 사마문왕 또는 문제라고 지칭하며 사마염은 무제라고 지칭한다. 따라서 이들의 전기는 ≪삼국지≫에는 없으며 ≪진서(晉書)≫에 있다.
위나라를 비호하는 모습이 좀 있긴 한데, ≪삼국지≫가 나온 시기가 위나라의 후예인 서진이 집권하던 시대이다 보니 시대상 어쩔 수가 없다. 공명정대하게 모두 깔 때는 깐다라는 정신 자세로 글을 쓸 생각이었다면 일단 목숨은 집 밖에 내놓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지금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군주제 체제라는 시대적 한계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것 치고는 나름 균형이 잡힌 편이라는 평을 듣는다. 최고의 역사서 중 하나로 칭송 받는 ≪사기≫ 역시 당연하게도 이런 한계는 전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삼국시대 이전, 즉 후한 말의 군벌들에 한해서는 대체로 기록이 간략한 편이고, 좀 심하게 까이는 경우가 많다.[9] 따라서 후한 말 군웅들에 대해서는 후한서랑 같이 참고해서 보는 것이 좋다.
인물의 알려진 일대기를 작성한 뒤 마지막에 각 인물의 평을 적는데, 조조는 시대를 초월한 영걸(英傑), 유비는 유방의 풍모가 있는 효웅(梟雄)) 등으로 묘사하며 하후돈과 조운, 한당은 거의 결점이 없는 모범적인 장수로 표현되는 점으로 볼 때 ≪삼국지≫는 서진 사서의 핵심인 조위정통론의 한계를 제외한 서술에서는 비교적 공정하게 저술한 편으로 위나라 편애라는 설은 좀 억측이다. 그러나 ≪삼국지≫의 내용을 얕게 이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주장되기도 한다.
서진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사마염을 본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사마의를 사마선왕 또는 선제, 사마사를 사마경왕 또는 경제, 사마소를 사마문왕 또는 문제라고 지칭하며 사마염은 무제라고 지칭한다. 따라서 이들의 전기는 ≪삼국지≫에는 없으며 ≪진서(晉書)≫에 있다.
위나라를 비호하는 모습이 좀 있긴 한데, ≪삼국지≫가 나온 시기가 위나라의 후예인 서진이 집권하던 시대이다 보니 시대상 어쩔 수가 없다. 공명정대하게 모두 깔 때는 깐다라는 정신 자세로 글을 쓸 생각이었다면 일단 목숨은 집 밖에 내놓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지금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군주제 체제라는 시대적 한계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것 치고는 나름 균형이 잡힌 편이라는 평을 듣는다. 최고의 역사서 중 하나로 칭송 받는 ≪사기≫ 역시 당연하게도 이런 한계는 전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삼국시대 이전, 즉 후한 말의 군벌들에 한해서는 대체로 기록이 간략한 편이고, 좀 심하게 까이는 경우가 많다.[9] 따라서 후한 말 군웅들에 대해서는 후한서랑 같이 참고해서 보는 것이 좋다.
4. 한국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편집]
삼국의 이야기 말고도 <위지>의 끝 부분에는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이라고 하여 오환, 선비, 동이, 왜 등 중국 밖의 이민족 세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더 이전 시대 사서인 ≪사기≫·<조선열전>에서 위만조선에 대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은 한무제의 조선 원정과 그 멸망 과정만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한반도 일대의 고대 국가에 관한 위치와 사회상, 풍속까지 기록한 가장 오래된 사료는 ≪삼국지≫의 <동이전>이 된다. 게다가 한국의 삼국시대와 가장 인접한 시기에 작성되었으므로 더할 나위 없이 한반도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부여, 옥저, 동예, 초기 고구려 등의 정치사, 문화 등이 여기에 있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있는 내용이다.
한국에서 직접 집필한 역사서 중에서 현재까지 남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지금은 유실된 옛 기록을 참고해서 썼다고는 하나, 편찬연대로 따지면 동시대에 집필된 삼국지의 내용과는 거의 800~1,000년이나 차이가 나는 데다가, 초기 기록 중 많은 부분이 삼국지를 참고하여 쓴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전(일제강점기~대한민국 초기)의 역사 학계에선 삼국시대 초기는 ≪삼국지≫ <위지>의 기록을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우선적인 연구 대상으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마한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온조왕 시기, 즉 기원전 시점에 이미 백제에 의해 멸망하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한참 뒤인 3~4세기에도 마한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견의 결과는 6세기까지도 전라남도 지역에 백제와는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입증하고 있으므로, 삼국사기 기록보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 쪽이 더 신빙성이 있다. 물론 지금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도 기록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다수 발굴됨에 따라서, 100%까지는 아니라도 일제강점기에 거의 무시되던 것에 비하면 어느 정도는 신뢰를 받게 된 상태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왜인전>을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다만 ≪삼국지≫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일단 바다 건너의 정보들을 모아 쓴 것이므로 그리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많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있고, 가장 큰 단점은 1차 자료가 아니라 고대 중국인이 자국의 시점으로 가공한 자료라는 점. 특히, 주석을 단 배송지가 원래 ≪위략≫에 실려있던 기사들을 편집 축약한 내용을 달아았다는 것이 상당히 아쉬운 점이다.
간략하게 내용을 설명하면, 거의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고 볼 수 있는 부여와 고구려의 나라 묘사 내용이 극과 극을 오간다. 부여 사람들의 풍습은 호의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고구려 사람들은 대놓고 성질이 흉악하고 노략질에 맛들인 음탕한 족속으로 적어 놓았다. 아무래도 중국과의 관계가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 여부에 따라 설명을 다르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 당시 고구려는 만주벌판을 달리는 그런 강한 나라가 아니라 국내성 일대의 험한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나라라서 관구검에게 발린 이야기 정도만 나와 있다. 풍습을 보고 "음란하다." 라고 서술한 대목들이 있지만, 이런 표현들은 이민족을 경시하는 중화사상, 체통머리 없는 것을 혐오하는 유교사상의 관점에서 나왔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또한 단순히 '음(淫)'의 또 다른 뜻들인 '방종하다', '지나치다', '어지럽다' 등의 뜻으로 쓰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한국에서 직접 집필한 역사서 중에서 현재까지 남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지금은 유실된 옛 기록을 참고해서 썼다고는 하나, 편찬연대로 따지면 동시대에 집필된 삼국지의 내용과는 거의 800~1,000년이나 차이가 나는 데다가, 초기 기록 중 많은 부분이 삼국지를 참고하여 쓴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전(일제강점기~대한민국 초기)의 역사 학계에선 삼국시대 초기는 ≪삼국지≫ <위지>의 기록을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우선적인 연구 대상으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마한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온조왕 시기, 즉 기원전 시점에 이미 백제에 의해 멸망하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한참 뒤인 3~4세기에도 마한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견의 결과는 6세기까지도 전라남도 지역에 백제와는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입증하고 있으므로, 삼국사기 기록보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 쪽이 더 신빙성이 있다. 물론 지금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도 기록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다수 발굴됨에 따라서, 100%까지는 아니라도 일제강점기에 거의 무시되던 것에 비하면 어느 정도는 신뢰를 받게 된 상태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왜인전>을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다만 ≪삼국지≫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일단 바다 건너의 정보들을 모아 쓴 것이므로 그리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많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있고, 가장 큰 단점은 1차 자료가 아니라 고대 중국인이 자국의 시점으로 가공한 자료라는 점. 특히, 주석을 단 배송지가 원래 ≪위략≫에 실려있던 기사들을 편집 축약한 내용을 달아았다는 것이 상당히 아쉬운 점이다.
간략하게 내용을 설명하면, 거의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고 볼 수 있는 부여와 고구려의 나라 묘사 내용이 극과 극을 오간다. 부여 사람들의 풍습은 호의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고구려 사람들은 대놓고 성질이 흉악하고 노략질에 맛들인 음탕한 족속으로 적어 놓았다. 아무래도 중국과의 관계가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 여부에 따라 설명을 다르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 당시 고구려는 만주벌판을 달리는 그런 강한 나라가 아니라 국내성 일대의 험한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나라라서 관구검에게 발린 이야기 정도만 나와 있다. 풍습을 보고 "음란하다." 라고 서술한 대목들이 있지만, 이런 표현들은 이민족을 경시하는 중화사상, 체통머리 없는 것을 혐오하는 유교사상의 관점에서 나왔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또한 단순히 '음(淫)'의 또 다른 뜻들인 '방종하다', '지나치다', '어지럽다' 등의 뜻으로 쓰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주서(周書)≫권 49·<이역상(異域上)>·<고구려>[12]
《북주서》(즉 ≪주서≫)에 따르면, 후대의 고구려 사람들도 삼국지를 읽었다.
5. 주의점[편집]
5.1. 다른 역사서와의 비교[편집]
진수의 삼국지가 가장 재미난 부분은 중국에 정사로 꼽히는 24사는 대개 유가적 사관에 의해 씌여졌어요.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는 정말 특이한 책인게, 그런게 없어요. 요즘 말로 하면 무한 경쟁의 시대에 누가 승리를 했느냐, 도덕, 착하고 그런 게 없어요. 정말 하드보일드 해요. 중국역사책에 이런 하드보일드(한 성향의 책이) 없어요.
기전체 사서는 인물 단위로 전기를 기록하는 구조이며, 해당하는 인물의 전기에서 그 인물의 공적은 강조하고 과오는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여러 명이 관련된 큰 사건은 한 인물의 전기만 읽어서는 사건의 전체상을 잘못 파악할 위험이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무제기>만 읽으면 적벽대전은 없었던 것 같다. 실제 2000년대 초 삼국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몇몇 책들을 보면 무제기의 기록을 들어 적벽대전이 실제하지 않았던 것처럼 쓴 경우가 있다. 하지만 <선주전>, <주유전> 등을 읽으면 적벽대전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조조는 대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다른 인물의 열전에 다른 사건이 기록돼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하나의 사건을 파악하려면 기, 전을 앞뒤로 열심히 뒤져봐야 한다.
삼국지는 정사이기는 하나, '표'와 '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결함이 있다. 이 부분은 ≪후한서≫나 ≪진서(晉書)≫를 참조하여 보충해야 한다.
후한 말의 인물(헌제, 왕윤 등)에 관한 것은 ≪후한서≫의 기록이 더 자세한 경우가 많으므로 ≪후한서≫도 구할 수 있다면 참조하는 것이 좋다. ≪삼국지≫만 참조해서는 기록 누락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잘못 그릴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는 원소나 공손찬 같이 이름을 떨쳤던 후한말의 군벌들에 대해서 대차게 까기 때문에 《후한서》를 참조해야 그들의 좀 더 참된 모습을 알 수 있다.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예가 바로 원소다.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후한서≫의 범엽의 평과 ≪삼국지≫의 진수의 평은 아주 때깔부터 다르다. 촉한의 인물에 관해서는, 이복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그 아들 이양에 대한 기록이 없어 고의로 누락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고 있다. 서진의 인물의 기록은 물론 ≪진서(晉書)≫가 더 자세하지만, ≪진서≫ 역시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사서인지라 주의해서 봐야 한다.
그리고 패배를 좀 순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자면 <무제기>에선 조조가 유비와 싸웠는데 불리했다고만 적혀 있지 패배를 언급 안 하고, <하후연전>에서 마초와 싸울 당시 불리했다고 적혀 있지만 패배는 언급 안 한다. 반면 ≪자치통감≫은 편년체로 작성되어 있어서 이 또한 참고하면 수많은 기, 전을 참조할 것 없이 한 번에 사건을 이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관우의 북진을 세세하게 이해하려면 <관우전>, <무제기> 말고도 <조엄전>, <동소전>, <서황전> 등의 열전을 뒤져봐야 하는데 ≪자치통감≫은 이를 하나로 엮어서 간편하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자치통감≫도 사건을 간략하게 축소하거나 나라의 정세에 큰 영향이 없는 일화들은 기록을 안 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하후연의 죽음도 <하후연전>과 <장합전>을 보면 꽤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자치통감에선 그냥 하후연이 황충한테 죽었다는 식으로 짧게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예로, 전예의 활약상을 알고 싶다면 <위지>·<전예전>을 보는 게 ≪자치통감≫에서 자료를 얻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 많다. 전예가 마성(馬城)에서 가비능에게 포위된 것까지는 나오는데, 포위를 뚫고 나온 것이 기록되지 않아서 위나라가 불리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화친을 구걸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세세하게 사건을 파헤치고 싶다면 ≪자치통감≫을 뼈대로, ≪삼국지≫의 열전으로 살을 붙이는 식으로 살펴보면 매우 좋다. 다만 삼국시대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이지만, 기전체로 쓰여 있는데다가 너무 오래된 서적이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이 있다. 다른 기록과의 교차 대조나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오히려주화입마 역사왜곡에 빠질 수 있다.
삼국지는 정사이기는 하나, '표'와 '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결함이 있다. 이 부분은 ≪후한서≫나 ≪진서(晉書)≫를 참조하여 보충해야 한다.
후한 말의 인물(헌제, 왕윤 등)에 관한 것은 ≪후한서≫의 기록이 더 자세한 경우가 많으므로 ≪후한서≫도 구할 수 있다면 참조하는 것이 좋다. ≪삼국지≫만 참조해서는 기록 누락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잘못 그릴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는 원소나 공손찬 같이 이름을 떨쳤던 후한말의 군벌들에 대해서 대차게 까기 때문에 《후한서》를 참조해야 그들의 좀 더 참된 모습을 알 수 있다.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예가 바로 원소다.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후한서≫의 범엽의 평과 ≪삼국지≫의 진수의 평은 아주 때깔부터 다르다. 촉한의 인물에 관해서는, 이복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그 아들 이양에 대한 기록이 없어 고의로 누락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고 있다. 서진의 인물의 기록은 물론 ≪진서(晉書)≫가 더 자세하지만, ≪진서≫ 역시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사서인지라 주의해서 봐야 한다.
그리고 패배를 좀 순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자면 <무제기>에선 조조가 유비와 싸웠는데 불리했다고만 적혀 있지 패배를 언급 안 하고, <하후연전>에서 마초와 싸울 당시 불리했다고 적혀 있지만 패배는 언급 안 한다. 반면 ≪자치통감≫은 편년체로 작성되어 있어서 이 또한 참고하면 수많은 기, 전을 참조할 것 없이 한 번에 사건을 이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관우의 북진을 세세하게 이해하려면 <관우전>, <무제기> 말고도 <조엄전>, <동소전>, <서황전> 등의 열전을 뒤져봐야 하는데 ≪자치통감≫은 이를 하나로 엮어서 간편하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자치통감≫도 사건을 간략하게 축소하거나 나라의 정세에 큰 영향이 없는 일화들은 기록을 안 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하후연의 죽음도 <하후연전>과 <장합전>을 보면 꽤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자치통감에선 그냥 하후연이 황충한테 죽었다는 식으로 짧게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예로, 전예의 활약상을 알고 싶다면 <위지>·<전예전>을 보는 게 ≪자치통감≫에서 자료를 얻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 많다. 전예가 마성(馬城)에서 가비능에게 포위된 것까지는 나오는데, 포위를 뚫고 나온 것이 기록되지 않아서 위나라가 불리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화친을 구걸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세세하게 사건을 파헤치고 싶다면 ≪자치통감≫을 뼈대로, ≪삼국지≫의 열전으로 살을 붙이는 식으로 살펴보면 매우 좋다. 다만 삼국시대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이지만, 기전체로 쓰여 있는데다가 너무 오래된 서적이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이 있다. 다른 기록과의 교차 대조나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오히려
5.2. 주석 문제[편집]
진수는 ≪삼국지≫를 유려하고 간결한 명문장으로 썼지만 워낙 간결해서 후대에 이 정사에 주석을 달았다. 이것이 송나라(유송) 문제 유의륭의 명령으로 배송지가 단 주석이며 부족한 정사에 추가를 한 것이다. 배송지의 주석은 100여 년 뒤에 붙여진 것이지만, 주석으로서 기록된 사료 중에는 왕찬의 ≪영웅기≫를 비롯하여 ≪삼국지≫보다 시대가 앞선 1차 사료도 풍부하게 있으므로 가치가 높다. 배송지는 주석을 달 때 150가지 사서를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신뢰도가 낮은 책의 기록이 주석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기록의 출전을 살펴보고 책에 따라서 신용도를 달리하는 것이 좋다. 이에 대해 논란이 가장 많은 주석이 ≪위략≫이다. 그리고 ≪수신기≫나 ≪세설신어≫는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당시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 라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5.3. 저자 본인에 관한 문제[편집]
진수와 관련된 오해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첫째로, 진수의 아버지가 진식인데, 진식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해서 진수가 제갈량에 대해 안 좋게 썼다는 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식은 진수의 아버지가 아니다. 진식은 229년 3차 북벌에 종군한 걸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기록이 없고 진식이 제갈량에 의해 처형당하는 것은 연의에서만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진수의 아버지는 1차 북벌 당시 마속의 부장이었는데, 패배의 책임으로 머리카락을 깎이는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22사차기(二十二史劄記)≫(1795년)를 지은 청나라 고증학자 조익(趙翼; 1727년 ~ 1814년)은 <진수전>에서 제갈량이 진수의 아버지를 욕보였기 때문에 진수가 제갈량의 병법을 까내렸다는 기록에 대해서, "이것은 진짜로 무식한 소리다!"[13]라고 평했다.
다음은 조익의 해당 평가.
다음은 조익의 해당 평가.
이십이사차기 진수론제갈량(陳壽論諸葛亮):
(진서) 진수전(陳壽傳)에서 "진수의 부친은 마속(馬謖)의 참군(參軍)으로, 마속이 제갈량에게 주살당하며, 진수의 부친 또한 곤형을 당했기에, 진수는 제갈량전을 쓰며, 장수의 지략이 장기가 아니라고 일렀다." 라고 하는데, 이는 진실로 무식한 견해다! 제갈량의 미칠 수 없는 점은, 원래 반드시 용병으로 장기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진수가 제갈집(諸葛集)을 교정하고 상표한 것을 보면, 말하길 "제갈량은 법과 가르침이 엄명하고, 상벌은 반드시 신용할 수 있으며, 악한 이는 징계하지 않는 게 없었고, 선한 이는 드러내지 않는 게 없었습니다. 심지어 관리는 간사함을 용납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길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양(梁), 익(益)의 백성들은, 비록 감당(甘棠)의 소공(召公)을 읊는 거나, 정인(鄭人)들이 자산을 칭송하는 것도, 넘을 수 없습니다."
또한 제갈량전의 후미에 평하길 “제갈량의 다스림은, 성심을 펴고, 공평한 도리를 베풀며, 선한 이는 숨겨 상을 주지 않는 일이 없었고, 악한 이는 아끼며 물리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마침내 나라 안에선, 모두 그를 경외하며 사모하였다. 형벌과 정치는 비록 엄하나 원망하는 이가 없었으니, 그의 마음 씀이 공평하고 권계함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가 공명을 칭송함은, 유독 그의 대단함을 보인 거라 이를 수 있다! 또한 양홍전(楊洪傳)에서 이르길 “서쪽의 땅에선 모두 제갈량이 당시 사람들의 기량을 다하게 할 수 있음에 감복했다." 요립전(廖立傳)에서 이르길 "제갈량이 요립을 폐해 서민으로 삼았다. 제갈량이 죽으니, 요립이 울며 이르길 '나는 결국 미개인이 됐구나!'" 이평(이엄)전(李平傳)에서 또한 이르길 "이평이 제갈량에게 폐해졌다. 제갈량이 죽으니, 이평은 마침내 발병해 죽었다. 이평은 항상 제갈량이 있으면 마땅히 저절로 개선돼 돌아갈 거라 기대하며, 후인들은 할 수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진수가 또한 맹자(孟子)의 말을 인용하니 "편안한 도리로 백성을 부리면, 비록 힘들어도 원망하지 않고, 살아갈 도리로 백성을 죽이면, 비록 죽어도 죽인 이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는 진실로 왕좌(王佐)의 심사(心事)라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용병하여 이길 수 없던 것도, 또한 명백히 말하길 "대적한 바가, 어떤 이는 인걸(人傑)이라 할 만하고, 거기다 무리가 적어 같지 않고, 공수의 입장이 다르고, 또한 당시에 명장이 없었기에, 공업이 성하다 쇠하게 한 것이고, 또한 천명이 돌아감이 있어, 지력으로 싸울 수 없었습니다." 진수는 사마씨에 관해 피하고 보호한 것이 가장 많았기에,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건괵을 보내고,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일 등을, 열전 안에 모두 감히 쓰지 못했다.
그러나 지론이 유독 이와 같으니, 그가 제갈량에게 탄복함이 깊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가 부친이 곤형을 당한 까닭에, 이를 구실로 폄하했다고 이르는 것은, 진실로 경중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로, 제갈첨에게 무시를 당해 제갈량과 제갈첨에 대해 안 좋게 썼다는 것인데 이는 오해다. 특히 제갈량 같은 경우 진수는 '해마다 군사를 일으켰어도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아마도 임기응변의 용병술은 그의 장점이 아닌 것 같다.' 라고 그의 전술적 역량이 정치력에 비해서 못했을 뿐이라고 했고, 이조차도 모자랐다나 무능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다 좋았는데 아쉬운 점이 있었다는 뉘앙스다. 정치에 관해서는 관중과 소하에 버금간다고 하는 등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했다. 재상으로서 두 인물이 중국 역사상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진수가 제갈량을 편애한다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제갈량전 분량 자체도 다른 열전에 비교해봐도 서술량이 상당히 많다.[14] 오히려 이것 때문에 진수가 사마염에게 사죄와 해명을 하기도 하였다.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고 죽을 죄를 지었다는 내용이 상주문(上奏文)에 있다. 제갈량전 말미 상소문에서 진수는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힘써 본받으시고 호탕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시니, 이 때문에 비록 적국(敵國)의 비방하는 말일지라도 모두 싣게 하고 고치거나 숨기는 바가 없어 이로써 대통(大通)의 도를 밝히셨습니다. 삼가 베껴 적어 저작국에 올렸습니다.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도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태시(泰始) 10년(274년), 2월 1일 계사일, 평양후 상(平陽侯相) 신 진수(陳壽)가 올립니다."고 하여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제갈첨에 관해서도 안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다만 부정적인 면을 기록한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제갈량) 덕에 본인의 공적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칭송을 받는다고 기록했다. 뒤집어 말하면 알려진 것보다 실속이 없는 인물이라는 평가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제갈첨의 승진이 워낙 빠른 것도 있고 미처 재주를 펼치기 전에 젊은 나이로 전사했으니 그의 위치에 비해 공적이 부족했던 건 어쩔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저자 본인에게도 문제점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데, 정의, 정이 형제는 위의 이름난 사람인데, 진식이 그 자식들에게 쌀을 주면 열전을 써주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해 ≪삼국지≫에 이 '정씨 형제'의 전(傳)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정의를 비롯한 그의 가문은 남자들이 모두다 조비에게 제거당했기 때문에 후손이 있을 수가 없어서 모순되는 내용인지라 꾸며낸 일화일 수도 있다. 오히려 정씨 형제보다는 친구였다가 원수가 된 이양이나 비슷하게 진수와 동시기 촉한에서 관료로 일했던 관헌, 동문 관련해서 문제가 있다. 단적으로 나헌이나 이밀같은 사람들은 다른 사서에 거의 열전급의 기록이 있음에도 진수가 기록하지 않아서 배송지가 나헌은 양양기에서, 이밀은 화양국지에서 주석을 따와서 붙여야 했을 정도. 화양국지에 진수의 동문들이나 같이 이동했던 촉한의 관료들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진수가 이양등을 비롯해 낙양에 같이간 촉한의 관료, 동문들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기록들이 있으며 이 때문에 이들의 기전을 적지 않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둘 수 있는 부분이다. 저자에 얽힌 문제들은 진수 문서에서 '≪삼국지≫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 항목도 참조하자. 다만 나헌의 경우는 촉에서는 황호와의 불화 때문에 커리어가 꼬여서 촉한 멸망 이후 위의 관리로서 영안 방어에 큰 공을 세웠고, 이밀 역시 진에서 요직에 오른 인물이라 촉서에 적기에는 지나치게 후대의 사람이라 판단해서 넣지 않았을 확률도 있다. 촉서의 인물들 중 그나마 후대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게 초주나 극정인데, 초주의 경우는 촉한 멸망 이후 별활약 없이 병에 걸려 270년에 사망했고, 그나마 극정이 진에서도 요직을 맡았지만 촉에서 훨씬 오랫동안 주요 관직에 있었고, 촉한 멸망 후에도 한동안 유선의 곁을 지킨 인물이다.
5.4. 결론[편집]
결론을 내자면, 충분한 사전 지식이 필요한 역사책이다.[15] ≪삼국지≫는 어디까지나 역사서이며, 때문에 연의 읽듯이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다. 사실 '천 년도 더 전에' 쓰인 책을 그냥 읽기만 한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그렇게 쉽게 된다면 역사학자들이 있지도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옛날의 일화'를 예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삼국시대 관련 기록만 읽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괜히 ≪삼국지≫를 번역하고 있는 파성넷에서 예전 일화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결국 당대의 사회와 문화, 고전에 정통하지 않으면 ≪삼국지≫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삼국지≫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전문적인 학술 영역에 들어가는 작업이다. 실제로 ≪삼국지≫·<위지>·<동이전>만 가지고도 한국에서는 논문이 몇 개씩 나올 정도다.
2000년대 이후에 정사 ≪삼국지≫를 인터넷에서 어설프게 주워 들은 것 갖고 정사드립치면서 삼국시대의 유명인들을 까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왜곡하거나 무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삼국지 관련 책에선 촉의 명신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동윤이 간신 진지를 총애하며 코드인사를 단행했다고 깠는데, 실제로 진지를 좋게 보고 중용한 건 비의다. 또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과 관련된 일화를 앞뒤 잘라먹고 가져와 장완을 복지부동 공무원이라고 깐 적도 있는데, <장완전>을 처음부터 읽어 보면, 제갈량이 죽은 뒤 장완이 제갈량만 못하다며 못 미더워 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유연하게 받아넘겨 죽은 제갈량의 권위를 더욱 높여주고 자신의 평판도 올리는 장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의 사례들은 대체로 ≪삼국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유리한 내용만을 취사선택하여 주장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인터넷이나 대중 작가들이 흔히 그러듯이 그냥 이거 훑어보고 정사가 이렇다 저렇다 하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물론 다른 시대의 역사서에 비해서는 관련 연구가 풍부한 편이므로 참고할 만한 것이 많다. 질 좋고 연구가 잘된 정사 삼국지 관련 자료를 보고 싶다면, 일단은 도서관, 서점에서 책으로 출판된 자료들을 찾아보는 것이 최선이다. 그 외에 어느 정도 검증된 사람들의 블로그를 찾아가서 읽거나, 삼국지 팬카페 등을 들어가서 둘러보면좋다. 나무위키 항목 중에서도 군데군데 링크가 있으니 참고해 보도록 하자.
결국 당대의 사회와 문화, 고전에 정통하지 않으면 ≪삼국지≫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삼국지≫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전문적인 학술 영역에 들어가는 작업이다. 실제로 ≪삼국지≫·<위지>·<동이전>만 가지고도 한국에서는 논문이 몇 개씩 나올 정도다.
2000년대 이후에 정사 ≪삼국지≫를 인터넷에서 어설프게 주워 들은 것 갖고 정사드립치면서 삼국시대의 유명인들을 까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왜곡하거나 무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삼국지 관련 책에선 촉의 명신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동윤이 간신 진지를 총애하며 코드인사를 단행했다고 깠는데, 실제로 진지를 좋게 보고 중용한 건 비의다. 또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과 관련된 일화를 앞뒤 잘라먹고 가져와 장완을 복지부동 공무원이라고 깐 적도 있는데, <장완전>을 처음부터 읽어 보면, 제갈량이 죽은 뒤 장완이 제갈량만 못하다며 못 미더워 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유연하게 받아넘겨 죽은 제갈량의 권위를 더욱 높여주고 자신의 평판도 올리는 장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의 사례들은 대체로 ≪삼국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유리한 내용만을 취사선택하여 주장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인터넷이나 대중 작가들이 흔히 그러듯이 그냥 이거 훑어보고 정사가 이렇다 저렇다 하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물론 다른 시대의 역사서에 비해서는 관련 연구가 풍부한 편이므로 참고할 만한 것이 많다. 질 좋고 연구가 잘된 정사 삼국지 관련 자료를 보고 싶다면, 일단은 도서관, 서점에서 책으로 출판된 자료들을 찾아보는 것이 최선이다. 그 외에 어느 정도 검증된 사람들의 블로그를 찾아가서 읽거나, 삼국지 팬카페 등을 들어가서 둘러보면좋다. 나무위키 항목 중에서도 군데군데 링크가 있으니 참고해 보도록 하자.
6. 번역[편집]
번역하면 이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김원중 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8월, 군사 장제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우저를 사공으로 임명하였지만 ...”
이 번역은 문장을 이렇게 본 꼴이다.
이 번역은 문장을 이렇게 본 꼴이다.
중간을 이유 없이 잘라먹은 상황이다. 같은 역자의 ≪사기≫ 번역본이 좋은 번역으로 인정받는 걸 생각해 보면, 왜 이런 결과물이 나왔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오류가 여러 군데 존재한다 예를 들어 위서 서황전에 조조가 서황에게 그대에게 주아부의 모습이 보인다라고 칭찬해놓은 장면에서 주아부를 초한시대의 범증(?)으로 해석하는 오류가 있다.
또, 배송지 주석을 일부만 번역했다. 물론 다른 이십사사 번역본도 주석은 잘 번역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단순히 주석을 다 번역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건 지나친 처사지만, 할 거면 다 하든지 아니면 아예 하질 말든지, 어떤 건 하고 어떤 건 안 해서 중간중간 구멍이 숭숭 나버렸다. '주석 하나'를 중간에 잘라먹은 사례도 하나 있다. <여범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강표전>을 인용해서 손권이 여범과 노숙을 칭찬하고, 엄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손권이 이유를 설명해 주어 엄준을 설득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걸 뒤에 나오는 손권의 설득을 빼먹고 엄준의 말에서 번역을 끝맺는 바람에 결론이 이상하게 나버렸다. 차라리 배송지 주석을 번역하는 데 들일 수고로 본문 번역에 더 정성을 들이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심지어 김원중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정사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 배송지 주석을 안 좋게 평가했다. 배송지의 주석은 "번잡하고 초점이 없다"고 깠는데, 그래놓고선 자기의 번역은 자기만의 연구가 들어간 정본이라는 엉터리 논리를 내세웠다. 그의 책이 국내에서 유일한 ≪삼국지≫ 번역본인게 현실이긴 하나, 이것이 어느 한 번역본이 정본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인 "엄밀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소설'인 ≪삼국지연의≫가 "역사흐름을 왜곡"한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 한다는 드립은 매우 뜬금없다.[16]
일부 팬들은 국역 ≪자치통감≫은 번역이 괜찮은 편이라면서 국역 ≪삼국지≫보다 차라리 국역 ≪자치통감≫의 삼국 시대 부분을 읽는 것을 권하기까지 한다. 가격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편년체라서 읽기 편하다는 장점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기본 뼈대는 정사이므로 ≪자치통감≫은 보조적으로 참조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자치통감≫의 중립적 관점이 문제가 될 수 있겠는데, 연호 같은 경우는 위·진의 연호를 쓰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연도를 세기 위해서 위·진의 연호를 기준으로 삼은 것일 뿐이다. 공식적으로 헌제가 양위한 후에 바로 위 문제가 황제로 즉위했고, 역시 조환을 폐위하고 사마염이 진의 황제로 즉위했으니 위·진의 연호를 따르는 것이 편년체로 서술한 ≪자치통감≫에 어울렸기 때문이다. 사마광도 직접 '삼국 중 어느 쪽도 정통으로 삼지 않았다.' 라고 ≪자치통감≫에 명시해 놨다. 다만 사마광의 조상이 사마부라는 점 때문에, 현대인들 중에선 ≪자치통감≫이 '위·진정통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참고로 남송 시대 주희가 ≪자치통감≫을 재분류한 ≪자치통감강목≫에서는 사마광의 견해를 까내리며 '촉한정통론'을 내세웠다.
인터넷에서는 한때 파성넷에서 번역을 꾸준히 해서 일단 정사 원본의 번역을 끝내고 데이터베이스를 꾸렸으나, 운영자가 관리 안 하는 사이에 사이트가 폭파되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문제는 홈페이지가 야후에 계정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즉, 야후코리아의 철수로 정보가 모두 날아가 복구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백업해둔 곳이 있어 파성넷 운영자 견초와 함께 사이트를 하나 새로 세웠다는 것이다. 김원중 역 ≪삼국지≫를 바탕으로 시작을 했기에 오류가 많아 번역이 미진한 부분도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긴 하나, 이 부분은 오래전부터 발견 즉시 오류를 수정하는 사후 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오류가 여러 군데 존재한다 예를 들어 위서 서황전에 조조가 서황에게 그대에게 주아부의 모습이 보인다라고 칭찬해놓은 장면에서 주아부를 초한시대의 범증(?)으로 해석하는 오류가 있다.
또, 배송지 주석을 일부만 번역했다. 물론 다른 이십사사 번역본도 주석은 잘 번역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단순히 주석을 다 번역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건 지나친 처사지만, 할 거면 다 하든지 아니면 아예 하질 말든지, 어떤 건 하고 어떤 건 안 해서 중간중간 구멍이 숭숭 나버렸다. '주석 하나'를 중간에 잘라먹은 사례도 하나 있다. <여범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강표전>을 인용해서 손권이 여범과 노숙을 칭찬하고, 엄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손권이 이유를 설명해 주어 엄준을 설득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걸 뒤에 나오는 손권의 설득을 빼먹고 엄준의 말에서 번역을 끝맺는 바람에 결론이 이상하게 나버렸다. 차라리 배송지 주석을 번역하는 데 들일 수고로 본문 번역에 더 정성을 들이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심지어 김원중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정사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 배송지 주석을 안 좋게 평가했다. 배송지의 주석은 "번잡하고 초점이 없다"고 깠는데, 그래놓고선 자기의 번역은 자기만의 연구가 들어간 정본이라는 엉터리 논리를 내세웠다. 그의 책이 국내에서 유일한 ≪삼국지≫ 번역본인게 현실이긴 하나, 이것이 어느 한 번역본이 정본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인 "엄밀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소설'인 ≪삼국지연의≫가 "역사흐름을 왜곡"한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 한다는 드립은 매우 뜬금없다.[16]
일부 팬들은 국역 ≪자치통감≫은 번역이 괜찮은 편이라면서 국역 ≪삼국지≫보다 차라리 국역 ≪자치통감≫의 삼국 시대 부분을 읽는 것을 권하기까지 한다. 가격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편년체라서 읽기 편하다는 장점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기본 뼈대는 정사이므로 ≪자치통감≫은 보조적으로 참조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자치통감≫의 중립적 관점이 문제가 될 수 있겠는데, 연호 같은 경우는 위·진의 연호를 쓰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연도를 세기 위해서 위·진의 연호를 기준으로 삼은 것일 뿐이다. 공식적으로 헌제가 양위한 후에 바로 위 문제가 황제로 즉위했고, 역시 조환을 폐위하고 사마염이 진의 황제로 즉위했으니 위·진의 연호를 따르는 것이 편년체로 서술한 ≪자치통감≫에 어울렸기 때문이다. 사마광도 직접 '삼국 중 어느 쪽도 정통으로 삼지 않았다.' 라고 ≪자치통감≫에 명시해 놨다. 다만 사마광의 조상이 사마부라는 점 때문에, 현대인들 중에선 ≪자치통감≫이 '위·진정통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참고로 남송 시대 주희가 ≪자치통감≫을 재분류한 ≪자치통감강목≫에서는 사마광의 견해를 까내리며 '촉한정통론'을 내세웠다.
인터넷에서는 한때 파성넷에서 번역을 꾸준히 해서 일단 정사 원본의 번역을 끝내고 데이터베이스를 꾸렸으나, 운영자가 관리 안 하는 사이에 사이트가 폭파되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문제는 홈페이지가 야후에 계정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즉, 야후코리아의 철수로 정보가 모두 날아가 복구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백업해둔 곳이 있어 파성넷 운영자 견초와 함께 사이트를 하나 새로 세웠다는 것이다. 김원중 역 ≪삼국지≫를 바탕으로 시작을 했기에 오류가 많아 번역이 미진한 부분도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긴 하나, 이 부분은 오래전부터 발견 즉시 오류를 수정하는 사후 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7. 참고 링크[편집]
-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중국정사조선전: 링크에 있는 중국정사조선전은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역주(譯註) 중국정사외국열전 시리즈로 낸 바 있으므로 도서관 등에서 열람할 수 있다. 단, 이 기사들은 철저하게 당대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쓰인 것들이라는 것을 사전에 염두에 두어야한다. 그 외에 한자 단어의 한글 표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많다.
- 파성넷: 한국의 ≪삼국지≫ 원문 및 기타 역사 등 한문 고전 번역 데이터베이스. 전체 검색은 오른쪽 위에 있고 원문 번역문만을 검색하기 위해서는 삼국지 자료실 탭을 클릭하면 나오는 창을 사용하면 된다.
8. 관련 고사성어[편집]
9. 둘러보기[편집]
[1] ≪청사고≫를 넣어 25사, 25사에 ≪신원사≫를 넣어 26사라고도 한다.[2] 저자 진수는 233년생이고 삼국지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는 황건적의 난이 184년이니 대충 따져봐도 반세기는 넘게 차이가 난다. 즉 진수는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쓴 것. 그것도 전란 중이라 기록을 하기도 힘들고, 보존하긴 더더욱 힘들었던 때이다. 특히나 촉한의 인물들은 중원 천지를 종횡하며 다녔던 인물이니 기록이 더 희귀할 수 밖에 없다.[3] ≪삼국지≫권 33·<촉서>·<후주전> : 國不置史,注記無官 ...출처[4] ≪정사 삼국지≫·<촉서>·<비의전>에 '연희(延熙) 14년 여름에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는데, 성도의 망기(望氣; 안개·구름을 살펴 길흉을 점침)하는 이가 도읍에 재상(宰相)의 자리가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겨울에 다시 북쪽으로 가서 한수(漢壽)에 주둔하였다.'라는 기록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 十四年夏,還成都,成都望氣者云都邑無宰相位,故冬復北屯漢壽。) [5] 곤형(髡刑): 고대에 죄인의 머리카락 전부 또는 일부분을 밀어버리는 형벌.[6] 출처[7] 군주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독자적인 열전이 있다.[8] 아무래도 촉한은 제갈량 사후에 위나라에 항복하지만 오나라는 정통성에서도 위촉에 비하면 영 딸리고 끝까지 싸웠으니 당연하다.[9] 가장 좋은 예는 원소다. ≪후한서≫의 <원소전>을 참고하면 원소도 뛰어난 군벌에 우유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진수의 평에선 유표와 더불어 엄청나게 까인다.[10] 사기, 한서, 후한서.[11] 진(晉)나라의 손성(孫盛)이 쓴 진나라 역사서[12] 출처[13] ≪22사차기≫권 6·<삼국지>: ... 此真無識之論也!출처[14]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제갈량전은 선주전보다도 길다. 제갈량전보다 긴 것은 무제기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15] 하지만 정작 나무위키의 삼국시대 관련 문서들도 사서의 내용을 인용한 문구를 제외하면 대부분 출처가 없는 독자 연구로 보이는 내용으로만 가득 차있다. 현대 자치통감의 아버지이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한 한국인 권중달급의 인물들의 의견은 평가 부분에서도 전혀 기재되어있지 않으며, 한국 못지않게 삼국지 붐이 일은 일본의 고대 사학 관계자들의 말을 이용한 문서도 그 수가 매우 적다. 특히 본토이자 홈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전문가들의 내용은 깡그리 무시되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나무위키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삼국시대에 대한 평가를 좀 더 활발히 만들고 싶다면 필히 보충되어야할 문제. 아직도 링크 타고 들어가봤더니 삼국지랑은 관련도 없는 웬 문제 많은 야구 사이트가 나오는 수준이다...[16]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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