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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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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0. 1. 26, 미국 아칸소 리틀록
사망 1964. 4. 5, 워싱턴 D. C.
국적 미국

요약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점령기에 전후의 일본을 통치했으며, 6·25전쟁 초기 유엔군 최고 사령관직을 맡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 1930년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되면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필리핀에서 군 고문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 12월 미육군 현역에서 은퇴했다. 1941년 7월 현역으로 소환된 맥아더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전투를 수행했다. 1945년 4월 태평양지역의 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45~51년에 일본 점령 연합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일본군의 해산, 군국주의자 제거, 경제복구 등을 지휘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말년에 기업인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목차

  1. 개요
    1. 초기생애
      1.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임무
        1. 6·25전쟁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 (MacArthur Manila)

          개요

          제2차 세계대전중에 남서태평양 전역(戰域) 사령관이었고, 연합군 점령기에 전후의 일본을 통치했으며, 6·25전쟁 초기의 9개월 동안 유엔군 총사령관직을 맡았다.

          초기생애

          맥아더는 후에 육군 고위장교가 된 아버지 아서 맥아더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야심적인 어머니 메리 하디 맥아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3년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0년 동안 부관과 하급부대 장교를 지내고 이어 4년을 일반참모로 복무했다. 1914년에는 멕시코의 베라크루스를 점령한 미군 부대에서 몇 달을 지냈다. 1917~19년에 제42사단의 참모진에 배속된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투작전과 뒤이은 라인 지구 점령군의 전투에 참여하면서 참모장·여단장·사단장 등으로 직책을 바꾸어가며 활약했다.

          1920년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했고, 윌리엄(빌리) 미첼의 군법회의에 참석했다. 필리핀에서 2차례 사령관직을 맡았으며, 미국의 2개 군단을 통솔했고, 1928년에는 미국 올림픽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았다.

          1918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7년 후에 소장이 된 맥아더는 1930년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되면서 대장으로 승진되었다. 군의 최고수뇌로서 그후 5년 동안 그가 주력한 사업은 대공황의 타격으로 약해져가는 미육군의 군사력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그가 1932년 중엽 정규군 부대를 워싱턴으로 보내 '노병 보너스 군대'(Bonus Army of veterans)를 축출하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1935~41년에 필리핀의 군사고문과 육군 원수로서 자금의 부족을 무릅쓰고 필리핀 방위군을 조직하는 데 전력했다. 1937년 12월 미육군 현역에서 은퇴했다. 맥아더는 1922년 루이스 크롬웰 브룩스와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한 이 결합은 7년 후 이혼으로 끝났다. 1937년 잔 페어클로스와 재혼했고, 이듬해 마닐라에서 외아들 아서를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임무

          1941년 7월 현역으로 소환된 맥아더는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했다.

          1942년 3월 남서태평양 전역 연합군 사령관직을 맡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소환되었다. 그는 곧 뉴기니에서 공격을 개시해 1943년 1월 파푸아로부터 일본군을 몰아냈다. 1943~44년의 일련의 작전으로 맥아더군은 라에에서 샌사포어까지 뉴기니의 전략지점들을 장악하고, 애드미럴티 제도와 뉴브리튼 서부를 점령했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솔로몬 제도의 남태평양군은 일제히 북진해 라바울 시를 제압하고 많은 일본군 부대를 우회했다.

          다음으로 타이완보다는 필리핀으로 진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킨 맥아더는 1944년 가을에 모로타이·레이테·민도로를 공격했다. 레이테 작전이 시작되고서야 전폭적인 병참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이전의 계획들은 태평양함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인원과 장비의 빈곤을 무릅쓰고 수행되었다. 맥아더는 태평양전쟁보다 유럽 전쟁을 우선시하고 자기가 담당한 남서태평양지역보다 중부태평양 전역을 우선시하는 상부의 결정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최대의 작전들은 1945년의 7개월간에 걸친 루손 전투에서 벌어졌다. 그해 봄에 그는 남부 필리핀과 보르네오의 재정복에 나서기도 했다. 그동안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의 어려운 소탕작전은 오스트레일리아군에 일임했다. 그는 1944년 12월 육군 원수로 승진되고, 4개월 후 태평양지역의 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9월 2일 그는 도쿄 만[東京灣]에서 항복 조인식에 승전국의 대표로 참석했다. 1945~51년에 일본 점령 연합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일본군의 해산, 군국주의자들의 제거, 경제복구, 자유주의 헌법의 기초(起草) 등을 독재적인 면은 있었으나 효과적으로 지휘했다.

          또한 토지 재분배, 교육, 노동, 공중위생, 여성의 권리 등에서 상당한 개혁을 이루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맥아더는 극동군 총사령관직도 맡았다.

          6·25전쟁의 유엔군 사령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즉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부산 근방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후 9월에 대담한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10월에 북한으로 진격했다. 북한군은 급속히 붕괴되어갔다. 하지만 11월 대규모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38선 이북에서 양단된 맥아더군은 서울 이남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2개월 후 맥아더가 지휘하는 부대들은 공세를 전환하여 북쪽으로 재진격했다. 1951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이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한전을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귀국한 맥아더는 처음에는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해임에 관한 상원의 공개청문회가 있은 후 그 열광은 가라앉았다. 1944, 1948, 1952년에 공화당의 보수세력은 연이어 맥아더의 대통령후보 지명을 따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맥아더는 1952년 레밍턴랜드사(社)의 이사회 회장직 제의를 수락했으며, 그후 회장의 직무를 보는 일 외에는 어쩌다 한번씩 공개석상에 나타날 뿐 뉴욕 시에서 은거생활을 보냈다.

          그는 1964년 워싱턴 D. C.에서 타계하여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혔다.

          인격적인 면에서 맥아더는 불가사의했고 모순적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고압적이고 도도하며, 이기적이고 잘난체하는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 특히 그의 사령부 직원들이 보기에는 다정하며 용기있고 가식이 없으며 겸손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가 우수한 지능과 보기 드문 통솔력을 갖추었고 의무·명예·조국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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