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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광

배중진 2017. 1. 16. 14:33

유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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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광
柳志光
유지광.JPG
생애1927년 ~ 1988년 11월 12일 (62세)
출생지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이천
사망지대한민국 대한민국 경기도 이천
본관정주(貞州)
친척유보상(5촌 조카)
이정재(사돈)
이석재(사돈)
복무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50년 ~ 1953년
최종 계급중위.JPG 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 중위
지휘보병 소대장
주요 참전한국 전쟁
기타 이력단국대 정치학과 3년 중퇴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삼우회 전무이사
화랑동지회 이사장
경기 이천농고 축구진흥실 실장

유지광(柳志光, 1927년 ~ 1988년 11월 12일)은 육군 중위 출신이며 제1공화국 당시 정치폭력으로 악명을 떨친 정치깡패이다.

생애[편집]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한 그는 단국대학교 정치과 전문부 3학년 중퇴 이후 병역육군 갑종사관으로 복무하여 육군 중위 예편하였다.[1] 이정재, 곽영주와 더불어 이천 3인방으로 불리었고, 이정재와는 사돈[2]관계였다. 이정재의 권유로 훗날 화랑동지회가 되는 전신 삼우회라는 별동대 조직을 만들고 주먹세계에 입문했고, 행동대장으로 활약하면서 1957년 장충단집회 방해사건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테러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의 몰락이후 허정 과도정부와 제2공화국에서 구형 10년,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3] 1961년 5·16 군사군테타 이후 다시 재구속되었다.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신정식, 최인규 등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유지광은 처음엔 사형 선고를 받은 뒤 무기징역형에서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받고 5년 6개월간 복역 중 감형으로 석방되었다. 1978년에 고향인 이천으로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무명의 이천농고축구팀을 전국고교 축구대회에서 4강 진출하는데 공헌하는 등 이천 고향 발전에 활동을 벌였다.[4] 1988년 11월 12일 결혼식 주례 도중 심근 경색으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장례에는 대한민국·말레이시아·타이완·홍콩·마카오의 폭력조직들은 물론 일본야쿠자들이 참석하기도 하였다.[5]

저서[편집]

자서전[편집]

  • 《대명》
  • 《大義》(류보상(柳甫相)과 공저(共著))

유지광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이동 서울의 깡패생태 유혈소동 내막과 세력분포 1958년 9월 21일 동아일보
  2. 이동 이정재의 고모가 유지광의 형과 결혼
  3. 이동 李丁載(이정재) 柳志光(유지광) 林和秀(임화수) 十年懲役(십년징역) 동아일보 1960년 8월 31일 작성
  4. 이동 아직도 李博士(이박사)사진 지키는 柳志光(유지광)씨 蹴球(축구)·奉仕(봉사)사업에 정열 경향신문 1986년 5월 17일 작성
  5. 이동 柳志光(유지광)씨 장례식에 韓日(한일)주먹스타 집결 경향신문 1988년 11월 1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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