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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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광 柳志光 | |
생애 | 1927년 ~ 1988년 11월 12일 (6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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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이천 |
사망지 | 대한민국 경기도 이천 |
본관 | 정주(貞州) |
친척 | 유보상(5촌 조카) 이정재(사돈) 이석재(사돈)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50년 ~ 1953년 |
최종 계급 | 대한민국 육군 중위 |
지휘 | 보병 소대장 |
주요 참전 | 한국 전쟁 |
기타 이력 | 단국대 정치학과 3년 중퇴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삼우회 전무이사 화랑동지회 이사장 경기 이천농고 축구진흥실 실장 |
유지광(柳志光, 1927년 ~ 1988년 11월 12일)은 육군 중위 출신이며 제1공화국 당시 정치폭력으로 악명을 떨친 정치깡패이다.
생애[편집]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한 그는 단국대학교 정치과 전문부 3학년 중퇴 이후 병역은 육군 갑종사관으로 복무하여 육군 중위 예편하였다.[1] 이정재, 곽영주와 더불어 이천 3인방으로 불리었고, 이정재와는 사돈[2]관계였다. 이정재의 권유로 훗날 화랑동지회가 되는 전신 삼우회라는 별동대 조직을 만들고 주먹세계에 입문했고, 행동대장으로 활약하면서 1957년 장충단집회 방해사건 등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테러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의 몰락이후 허정 과도정부와 제2공화국에서 구형 10년,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3] 1961년 5·16 군사군테타 이후 다시 재구속되었다.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신정식, 최인규 등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유지광은 처음엔 사형 선고를 받은 뒤 무기징역형에서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받고 5년 6개월간 복역 중 감형으로 석방되었다. 1978년에 고향인 이천으로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무명의 이천농고축구팀을 전국고교 축구대회에서 4강 진출하는데 공헌하는 등 이천 고향 발전에 활동을 벌였다.[4] 1988년 11월 12일 결혼식 주례 도중 심근 경색으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장례에는 대한민국·말레이시아·타이완·홍콩·마카오의 폭력조직들은 물론 일본의 야쿠자들이 참석하기도 하였다.[5]
저서[편집]
자서전[편집]
- 《대명》
- 《大義》(류보상(柳甫相)과 공저(共著))
유지광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이동 ↑ 서울의 깡패생태 유혈소동 내막과 세력분포 1958년 9월 21일 동아일보
- 이동 ↑ 이정재의 고모가 유지광의 형과 결혼
- 이동 ↑ 李丁載(이정재) 柳志光(유지광) 林和秀(임화수) 十年懲役(십년징역) 동아일보 1960년 8월 31일 작성
- 이동 ↑ 아직도 李博士(이박사)사진 지키는 柳志光(유지광)씨 蹴球(축구)·奉仕(봉사)사업에 정열 경향신문 1986년 5월 17일 작성
- 이동 ↑ 柳志光(유지광)씨 장례식에 韓日(한일)주먹스타 집결 경향신문 1988년 11월 1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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