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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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룡 李華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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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4년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
사망 | 1984년 2월 24일 (71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고려대학교 부속 병원 |
국적 | 대한민국 |
다른 이름 | 별명은 명동의 황제·신사·박치기왕 |
직업 | 청년운동가, 사회운동가, 영화제작자 |
배우자 | 임봉옥 |
자녀 | 슬하 2남 4녀 |
소속사 | 前 화성영화사 사장 |
이화룡(李華龍, 1914년 ~ 1984년 2월 24일)은 대한민국의 청년운동가 겸 사회운동가이며 영화제작자로도 활동하였고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박치기왕’, ‘명동백작’, ‘검은 신사’ 등의 별명으로 이름을 알렸다.
생애[편집]
일제 강점기부터 8.15 광복까지 평양 등 북조선 지역 등에서 "박치기 당하는 모습은 안보이는데 쓰러지는 모습은 보인다"는 말이 나오며 평양의 박치기왕으로 유명했다. 해방 후 월남하여 명동에서 정팔과 정착했다. 서북청년단 감찰부장을 맡아 반공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제주 4.3 사건에도 참여했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이범석의 족청계가 몰락하고 2인자로 떠오른 이기붕에게 자유당 당원 제의가 왔으나, 거절하기도 했다.
명동파를 이끌며 이정재의 동대문사단과 대립한 끝에 1958년 충정로 도끼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이 덕분에 이정재를 비롯한 폭력배들이 5.16 쿠데타로 몰락하는 와중에 명동파는 화를 피할 수 있었다. 1960년 이화룡은 화성영화사를 차려 영화사업에 투신하며 조직폭력계를 떠났고, 조직은 신상현이 넘겨받았다. 연예계를 어용화하여 관제영화나 제작하던 임화수 등과 달리 이화룡의 화성영화사는 《박서방》, 《주마등》, 《마부》, 《임자 없는 나룻배》, 《장희빈》 등 쟁쟁한 작품들을 내놓았다. 화성영화사는 1967년 등록취소되었다.
1984년 2월 24일 0시 56분 서울 혜화동 고대병원에서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묘는 선영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현 하남시)에 안장됐다.[1][2]
대중문화의 이화룡[편집]
TV 드라마[편집]
주석[편집]
- 이동 ↑ 서울의 깡패 생태 유혈소동의 내막과 세력분포 동아일보 1958년 9월 21일
- 이동 ↑ 박치기왕 이화룡씨(70) 경향신문 1984년 2월 24일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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