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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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金斗漢 | |
생애 | 1918년 5월 15일 ~ 1972년 11월 21일 (5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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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일제 강점기 경성부 종로방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
별명 | 호는 의송(義松) 별칭은 잇폰 (일본어: いっぽん) |
종교 | 불교 |
부모 | 김좌진(부) 오숙근(적모) 김계월(생모) |
배우자 | 이재희(李載熙, 1924년 ~ 1987년) 김부미(金富美, 1917년 ~ 1999년, 이혼) 김순옥(金順玉, 1945년 ~ , 이혼) 박정인(朴貞仁, 1933년 ~ , 사실상 내연녀) |
자녀 | 슬하 4남 2녀 장녀 김을동 차녀 김영채 장남 김경민 차남 김현성 3남 김주택 4남 김범상 |
친척 | 김석출(이복 누이동생) 김철한(이복 남동생) 김형규(할아버지) 김경진(큰아버지) 김옥출(고모) 김동진(작은아버지) 김옥균(족척) 김종진(13촌 족숙부) 송정웅(사위) 송일국(외손자) 송송이(외손녀) 송대한(진외종증손자) 송민국(진외종증손자) 송만세(진외종증손자) 참고로 송대한의 친할머니 김을동 친정아버지이다. 즉 송일국의 외가는 송대한한테는 진외가집이다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50년 ~ 1953년 |
최종 계급 | 대한민국 육군 상사 |
지휘 | 분대장 |
주요 참전 | 한국 전쟁 |
기타 이력 | 경성 교동공립보통학교 2학년 중퇴 [1] 대한민국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 대한민국 무소속 국회의원 |
김두한(金斗漢, 1918년 5월 15일~1972년 11월 21일)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건달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상사이다.
그의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의송(義松), 별칭은 잇폰(일본어: いっぽん 입폰[*])이다.
목차
[숨기기]
일생[편집]
일제 강점기 말 18세 약관으로 경성의 유력한 건달패의 우두머리로 군림하였으며, 일설에는 민족말살정책에 거부하는 등 일본 제국에 저항하였다고[2] 알려져 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서는 잠시 조선공산당 산하의 조선청년전위대 대장으로 있었으나, 이내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여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반공투쟁을 하였다.
한국전쟁에는 대한 학도의용군 등 전선에 참전하였고 노동운동에도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 제3대 국회 · 대한민국 제6대 국회 등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였다. 6대 국회의원에 당선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한국 비료 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하자 국회에서 삼성 이병철 회장과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국무위원 등에게 오물을 투척하였다.
경기도 수원 신민당 후보로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깃불 관련 발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해 오다, 1972년 11월 19일에 고혈압으로 인한 뇌일혈로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었다가 11월 21일 오전 9시 5분에 사망하였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유년[편집]
1918년 5월 1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김좌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고 김두한 자신이 주장하였으나 증거는 없다.[3][4] 한편 집안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고, 개성에서 살다 1930년 13세 때 혼자 경성에 왔으나 거지들에게 잡혀 수표교 아래에서 살아가다가, 원씨 성의 한 노인을 만나 17세까지 성장하였다. "왜놈의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 곧 독립하니 그때 공부하라."는 원 노인의 뜻에 따라 학교는 다니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하였다.[5][6]
청년 시절[편집]
이후 원 노인마저 죽자 김두한은 서울에서 조직폭력배 들을 때려눕히며 1935년 나이 18세에 우미관을 장악하였다.[7]
또한 개인적으로 1930년 후반 배우 김승호, 동양극장 극단에 소개하고 곤경에 처한 권투선수 정복수, 레슬링 선수 황병관을 도와주기도 했다.[8]
태평양 전쟁이후 1942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인 강제 징용으로 징용장이 발부되었는데, 이때 그는 조선 총독부와 협상하여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 의용정신대)이라는 친일단체가 아닌 청년단체를 조직하였다. 한편, 1944년 전주 이씨 이재희와 혼인하였다.[6]
해방 정국 활동[편집]
광복 직후[편집]
1945년 해방 이후 김두한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참여하여 일본군 무기고를 점령하거나 치안에 힘을 기울이며 활약하였다. 그러나 곧 한국의 군정기로 인해 건국준비위원회 등 단체들이 해체되자 죽마고우이기도 한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자이던 정진영, 만담가 신불출, 박헌영과의 인연으로 조선 공산당의 전위대장을 역임했으며, 인민군 남조선 사령관 (소장)로 임명하겠다는 제의도 있었다고 한다.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김두한이 전위대장으로 역임 한 이후 민족진영에서는 조선 공산당에 대해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9] 이후 임시정부 계열 비밀결사인 백의사, 그리고 이규갑, 장덕수 등에게 부친 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김두한은 조선 공산당을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였다.[10][11]
그 뒤 김구, 이승만, 김규식 명예회장, 유진산 회장, 그리고 김두한을 감찰부장 겸 별동대 총대장으로 하여 대한민청이 조직되었는데, 김두한은 대한민청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 역할을 하면서 산정호수 김일성 별장습격, 박헌영 납치미수, 국군준비대 습격, 학병동맹 습격, 전평 본부습격, 심영, 신불출 습격, 9월 총파업 등에 활약하였고,[12] 김원봉 습격, 좌우합작 방해 (여운형 협박 벼랑에서 낙하사건, 김규식 협박) 등에도 관여하였다. 좌우합작 방해 이후 경교장에서 김구의 격려와 충고 이후에는 임시정부계열 인물들과 대립이 없었다고 한다.[13]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미군정과 경찰에 잡히면 안심했고 별동대에 잡히면 죽는다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9]
체포와 석방[편집]
김두한은 좌우대립 과정에서 5회 피습당했다고 하며 이후 계속해서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청년단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훗날 반민특위의 체포대상이었던 박흥식 등 친일파 자본가들 집에 습격하기도 했다고 하며 1원도 사사로운 곳에 쓰지 않았다는 근거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자신의 집을 저당과 이승만의 친필 휘호를 보여주며 영수증을 썼다고 한다.
1947년 대한민청 사건 등으로 미군정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3심 판관이 사퇴제출하는 등 재판 과정에서도 좌우간에 대립이 극심하였고,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14] 1948년 3월 24일 지청천, 이범석 등이 존 하지에게 진정하는 등 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15]
대한민국 초기[편집]
제1공화국[편집]
1948년 대한청년단의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했으며 이승만에게서 국민방위군 사령관 등 요직제의가 왔으나 독재노선에 들어선 자유당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이 제의를 난색 하여 거절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부에 의해 암살표적, 김구의 암살 시기인 1949년 6월 17일 국가보안법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16][17]
한국 전쟁[편집]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김두한은 과거 별동대의 대원으로 추정되는 4명에게 극적으로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17][18][19] 이후 인민군과 전투를 벌이며[20] 계속 남하하여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그의 회고록에는 그 당시에 부산에 피난해 있던 고위층이나 사회 유력인사들의 행태에 큰 실망을 느끼고 그들을 응징했다고 하는 부분이 보인다.
정치활동[편집]
김두한은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종로구 을구 4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에서 이승만의 종신제를 위한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김두한은 이승만 정부를 비판한 혐의로 선거법 위반과 부하 김관철에게 충고하며 공포탄을 쏜 것이 원인이 되어 김관철 살해미수로 구속되었는데, 자유당 입당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이승만 종신제 추진 핵심인물에 한 명이었던 장경근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21]
1954년 7월 16일에 판잣집철거에 관한 청원에 참여하였다.[22] 이승만 3선 개헌한 때는 개헌한 공고 서명을 거부하였고 국회에서 1954년 11월 27일 비밀투표를 한 결과,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이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로 1표 차로 부결을 선포했으나,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을 일으켰다. 이후 반 자유당의원들은 제명조치되어 탈당하였고 김두한은 무소속으로 활동하였다.[23] 1956년 1월 진보당추진위원회에 조직부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부흥주택대지 2중 매매 혐의로 시경에 내사받았고 진보당을 탈퇴하였고 노농당으로 옮겼다.[24][25] 이승만 정부에 대한 비판하였고 이정재에게 국회 휴게실에서 권총으로 협박을 당했으나[26] 이정재를 호통쳤다고 한다.[27] 야당은 테러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결성하려고 했으나 당사자 김두한은 야당의 결성을 반대하였다.1956년 7월 27일 지방선거 입후보 방해에 대한 야당 국회의원들이 거리시위를 한 7.27 데모사건에서 김종원 치안국장의 지휘하에 거리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28][29] 시가행진 이후 김두한 등 야당 의원 15명은 이기붕 의장 사직권고결의안을 제출하였다.[30] 계속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였고[31] 1956년 10월 5일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라고 비판하여 국가원수모독죄로 의원징계 받았다.[32] 1956년 10월 13일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가하였다.[33] 1957년 5월 25일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야당 시국강연회에서 경호총책임자를 맡았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3대 국회 당시 한국불교태고종, 대한불교조계종 대립에서 비구승을 옹호하여 종로구에 대처승의 본부를 두고 있던 종교 인사들에게 탄압을 받았으며 또 당시 민주당 바람 영향 등으로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종로구에서 노농당 후보, 대한민국 제5대 국회 충남 홍성에서 무소속, 6대 국회 종로구에서 무소속 등 연이어 낙선하였다. 이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 선거운동에 참여하였고 전국고학생연맹 등 고학생들을 지원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하며 신기범[34], 이찬오[35][36] 등 학생들과 교류하였다. 4.19혁명 이후 남산의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였다.[37]
제2공화국 시절[편집]
1960년 8월 장면이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자 그가 친일파였다는 소문이 다시 확산되었다. 8월 19일 국회에서 장면의 총리 지명동의안 표결이 있기 전 김두한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나타나 장면의 친일경력을 문제삼았다. 김두한은 장면에게 역사적인 귀한 표를 던져서는 안된다는 내용과 장면의 창씨개명을 적은 문건을 뿌리고[38][39], 장면을 국무총리로 뽑는다면 의사당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쳤으나[38][39] 사전 제지당했고, 장면의 총리 인준안은 무난히 통과되었다. 총유효득표수 225표 중, 찬성 117, 반대 107, 기권 1로 정족수를 채우고 총리에 피선되었다.[40]
제3공화국[편집]
5·16 군사정변이후 1962년 3월 1일 독립유공자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식이 있었는데 김두한은 부친 김좌진을 대신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41] 일각에서는 그 역시 독립운동가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의 조직 폭력배와 결투한 것은 독립운동과는 무관하다는 비판 여론이 나오면서 사라졌다. 이후에 김두한은 5.16에 대해 관망하는 입장이었으나 군의 원대복귀한다는 공약을 믿고 애국단을 조직하였으나 곧 해체되었다.
한독당 내란음모사건[편집]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등으로 보궐선거에서 용산구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6년 1월 8일에 5단계 혁명계획을 수립하고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42][43] 1월 29일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 석방결의안이 통과되었고 4월 28일에 5년을 구형받은 이후 5월 10일에 김두한을 비롯한 모두 전원 무죄선고되었다.
이후 김두한은 용산에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서울시장과 만나 봉천동에 터를 마련해서 생계를 이주시키게 하였고 판잣집철거문제와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앞장서기도 했다고 한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편집]
1966년 9월 22일 한국 비료 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으로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중 무소속 김두한은 국회발언대에서 발언했는데 발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 이병철이 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이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 | ” |
— 국회회의록 中[44] |
라고 비판하며 국무위원 등에게 미리 준비한 똥물을 투척하였다.
이후 이병철 한국비료 사장(삼성그룹 회장)은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언론 및 학원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하였다. 그 후 이병철 사장은 헌납 교섭을 맡았던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되자 개각 1주일 만인 1967년 10월 11일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잃고 구속기소당하였다.
말년[편집]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두한은 대한민국 제7대 국회 선거 때 경기도 수원시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유세 도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깃불 발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서대문 형무소 교도관 서윤환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그날 저녁 김두한 씨가 비에 젖은 채 감방에 왔는데 손과 발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온몸이 피멍 투성이였다"고 하며 그 다음 날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돌아와서는 "서 동지, 나 죽을 뻔했어"라며 웃을 뿐 불만은 토로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45] 이후 석방된 김두한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였다.[44]
1972년 11월 19일 조일환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 길가에 쓰러져 11월 21일 오전 9시 5분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무허가 자택에서 향년 55세의 나이로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46] 장례는 조시원이 장례위원장으로 광복장으로 치렀다.[47][48][49]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1972년 11월 21일은 박정희 정부가 유신헌법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유신헌법을 확정한 날이다.
학력[편집]
- 무학력
-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
약력[편집]
- 전국학생연맹고문
- 대한학도의용군참모장
- 대한노동조합연합회최고위원
- 대한부흥건설단장
- 국민엽합전선의장
- 불교양로원부원장
- 대한권투총연맹이사
- 전국고학생총연맹위원장
평가[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 굿피플 선정 정치계 101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50][51][52]
- 전 통일부총리 권오기는 "조악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결코 야비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인간 김두한은 시원시원한 말투와 예의를 지닌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53]
비판적 평가[편집]
- 역사학자인 한홍구는 김두한에 대해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악역을 많이 맡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나름대로 자기 입장을 갖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그는 주변의 모사들에 의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끝내 자신의 이름보다 장군의 아들이란 아버지의 후광 속에 들어가야만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라고 평가했다.[55]
가족 관계[편집]
4명의 부인에서 4남 2녀의 자녀를 뒀으며 호적상으로는 본처 이재희의 자녀로 입적되었다.
- 어머니 : 해주 오씨 오숙근
- 생부 : 백야 김좌진 - 청산리전투 승리한 독립군 사령관(생부논란 빛어왔지만 사실상 맞는것 같다.)
- 생모 : 김계월(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박계숙' 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김두한의 수하[편집]
김두한이 등장한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 강인덕 - 1981년 《제1공화국》 MBC 드라마
- 강인덕 - 1989년 《제2공화국》 MBC 드라마
- 강인덕 - 1993년 《제3공화국》 MBC 드라마
- 김영인 - 1989년 《무풍지대》 KBS 드라마
- 이훈 - 1999년 《왕초》 MBC 드라마
- 장태성 - 2001년 《동양극장》 KBS 드라마
- 곽정욱 - 2002년 《야인시대》(소년시절) SBS 드라마
- 안재모 - 2002년 《야인시대》(청년시절) SBS 드라마
- 김영철 - 2003년 《야인시대》(중, 장년시절) SBS 드라마
- 강인덕 - 2004년 《명동백작》 EBS 드라마
- 김성태 - 2009년 《경숙이 경숙아버지》 KBS 드라마
- 김민교 - 2013년 《SNL 코리아, GTA경성》 tvN 예능
영화[편집]
- 장동휘 - 《팔도 사나이》 (1969년)[57]
- 이대근 - 《실록 김두한》 (1974년), 《협객 김두한》, 《김두한 (제3부)》, 《김두한 (제4부)》 (1975년), 《김두한과 서대문 1번지》 (1981년)
- 이강조 - 《김두한형 시라소니형》 (1981년), 《대명》 (1993년)
- 박상민 - 《장군의 아들》 (1990년), 《장군의 아들 2》 (1991년), 《장군의 아들 3》 (1992년)
문화 속 김두한[편집]
소설[편집]
만화[편집]
음반[편집]
게임[편집]
- 《야화》(1996)
- 《야화2》(1998)
같이 보기[편집]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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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총선 |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을) | 3대 | 무소속 | 28.63% | 8,762표 | 1위 | |
제4대 총선 |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을) | 4대 | 노농당 | 23.93% | 8,987표 | 2위 | 낙선 |
제5대 총선 | 국회의원(충남 홍성군) | 5대 | 무소속 | 18.37% | 9,593표 | 2위 | 낙선 |
11·9 재보궐선거 | 국회의원(서울 용산구) | 6대 | 한국독립당 | 28.4% | 12,049표 | 1위 | |
제7대 총선 | 국회의원(경기 수원시) | 7대 | 신민당 | 44.97% | 21,770표 | 2위 | 낙선 |
각주[편집]
- 이동 ↑ 2학년 도중 다니지 못했다.
- 이동 ↑ 두산백과
- 이동 ↑ “기미년에 군정사 창립, 군사운동의 기초, 기미년 만주로 망명한 동지와 악수, 놀라운 소식을 전하던 운동의 기초, 長逝한 김좌진 일생(4)”. 중외일보. 1930년 2월 18일.
- 이동 ↑ “난중생활 1년여 고국와서 또 유리, 풍전등화같은 고부생명, 백치 김좌진유족 참경”. 중외일보. 1932년 12월 23일.
- 이동 ↑ 노변야화 (1969년 10월 19일 방송). “제6화 소년시절과 우미관 뒷골목 이야기”. 동아방송.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date=
(도움말) - ↑ 이동: 가 나 “김을동 의원 홈페이지 나의가족 김두한”.
- 이동 ↑ “우리나라 최초의 映畵館 優美館 없어진다”. 동아일보. 1982년 11월.
- 이동 ↑ “흔들리는 職業倫理 (3)「代價제일」에 무너지는 프로精神”. 경향신문. 1989년 10월 18일.
- ↑ 이동: 가 나 “비밀결사 - 백의사”. MBC. 2002년 1월 20일.
- 이동 ↑ 노변야화 (1969년 11월 11일 방송). “제25화 해방후 대한민청 모체에 대해”. 동아방송.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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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 이동 ↑ 조한필 기자 (2009년 11월 16일). “(명문家를 찾아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덕수 이씨家”. 조인스.
- 이동 ↑ “한강하구 군사사3-한국전쟁기(종합)”. 통일뉴스. 2006년 11월 03일.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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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 이동 ↑ 노변야화 (1969년 12월 6일). “제43화 김구선생과의 관계”. 동아방송.
- 이동 ↑ 김구 (1948년 3월 21일). “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 임하여 남하한 이북 동포에게 기(奇)함”.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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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 이동 ↑ “金斗漢 감형을 양 李장군이 陳情”. 자유신문. 1948년 3월 24일.
- 이동 ↑ “金斗漢 大韓靑年團 건설국장,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검에 송청”. 한성일보. 1949년 09월 10일.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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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 ↑ 이동: 가 나 “제67화 백범 김구선생 암살에 관계됨”. 동아방송. 1949년 09월 10일.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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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 이동 ↑ “6.25를 回想(회상)한다 (5) 三統士(삼통사)는 지금 어디에…”. 경향신문. 1980년 6월 27일.
- 이동 ↑ “4) 맥아더 장군의 일선 시찰과 중공군 소속 북한 의용군-김웅수장군회고록”.
- 이동 ↑ “제68화 6.25도강 피난”. 1970년 1월 12일 방송. 다음 날짜 값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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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 ↑ 굿피플 101인 선정과정 2003년 09월 17일 굿데이
- 이동 ↑ 굿피플 101인 뽑고보니… 굿데이 2003년 0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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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 이동 ↑ 박정인이 야인시대의 박인애라는 일부 언론에서 기사화되기도 했으나 박씨 여성과 박정인은 별개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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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 ↑ 조선일보에 연재됐다가 뒤에 "장군의 아들"(8권)로 제목이 바뀌어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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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 김두한 - 대한민국헌정회
- "장군 아들 아니면, 족보엔 왜 실렸나" 한국일보
바깥 고리[편집]
전 임 (종로구 갑)박순천 (종로구 을)오화영 |
제3대 국회의원(종로구 을)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무소속 → 노농당 (종로구 갑)윤보선 |
후 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한근조 |
전 임 서민호 |
제6대 국회의원(용산구) 1965년 11월 10일 - 1967년 6월 30일 한국독립당 → 신민당 |
후 임 김원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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