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들어가는 길이 있었는데 몰랐으며 나중에 나올 때는 스님의 배려로 몸이 불편하신
가친만 친히 차로 모셔 또 한 번 감사드립니다.
250년 수령 사철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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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가는길님 글 참조
간월암의 유래
이곳은 이태조의 왕사 무학스님이 창건한 암자로서, 당시에 무학스님이 이곳에서 달을 보고 홀연히 깨치셨다 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이라 하고,
따라서 섬 이름도 간월도라 하다. 무학스님은 충남 서산군 인지면 모월리가 고향이요, 스님이 아직도 어머니 엄씨 태중에 계실때 부친이 보시던
동사에 잘못되어 국채가 생긴지라 갚을 길이 없어 피신하다.
사령이 부인을 대신 호송하여 산 현감으로 가던 중, 갑자기 산기를 느껴 쉴 곳을 찾았으나, 때는 엄동설한이라 적설이 산천에 찼는데,
오직 한 곳이 기이하게 눈이 없어 마침내 이곳에 몸을 풀고, 아해를 옷가지로 덮어두고 현감에 이르니, 원이 부인이 몹시 피로해 함을
이상히 여겨 그 연유를 물어 알고, 인간의 도리 어찌 이럴 수 있으랴 하며 곧 사령을 아해 있는 곳에 보내니 큰 학이 두 날개로 깔고 덮어
아해를 보호하고 있는지라 돌아와 이 사실을 이야기 하니 원이 크게 상서한 일이라 하며 부인을 보고 아해 이름을 무학(舞鶴)이라고 지어주다.
후에 무학스님이 출태한 곳을 학돌재라 하다. 무학이 이십세에 나옹스님으로 하여 출가하다. 이때가 고려 공민황 3년 서기 1353년 경이다.
스님은 이곳 간월암에 토굴을 지어 열심히 수도하던 차 달을 보고 도를 깨치시니, 나옹스님이 더 배울 것 없다 하시며, 법도를 무학(無學)으로 지어 주시다.
고려의 국운도 저물어 갈 무렵, 스님께서는 함경도 고원 백연암에서 이성계에게 500일 기도를 올리게 하였으니 기도 마치는 날 이성계가 얻은 서까래 세개를 짊어질 이상한 꿈을 해몽하시고 이미 이태조가 될 것을 짐작하셧다. 이태조가 등극한 후 무학스님께서는 한양터를 짚으시고 창여문 첫자를 蒼字로 하시고 경복궁을 28간 반으로 하시니 이미 28대의 왕운을 짐작한 것이었다.
당시에 간월도 황도 등을 사폐지로 정하여 스님께 드렸으며 많은 수도인이 이곳 간월암에서 득력을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이조 말엽에 이 암자가 완전히 퇴폐된 것을 1941년 송만공 선사께서 선승의 안목을 기리시며 복구하실 뜻을 비치시매 마벽초 선사께서 그 뜻을 받들어 크게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대저 도인 난 곳이 명승대지 아닌 곳이 있으리오마는 이곳처럼 지리와 명기가 빛나는 곳도 드물 것이니라.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섬들이 이곳을 에워 싸고, 그 속에 한 송이 연화가 피었으니, 멀리 찾는 마음의 고향이 바로 예요, 적멸보궁이 또한 이자리가 아니겠는가?
== 현지 안내판 내용 ===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있는 작은 섬에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창건한 암자이다.
무학이 이곳에서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간월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작은 암자를 지어 무학사라 부르던 절이 자연 퇴락되어 폐사된 절터에
1941년 만공 대사가 다시 세우고 간월암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보낸 어리굴젓이 궁중의 진상품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또한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 군왕제가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시에 간월도리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벌어진다.
법당에는 무학대사를 비롯하여 이곳에서 수도한 고승들의 인물화가 걸려 있다. 이 암자는 바닷물이 들어오면 작은 섬이 되고
물이 빠지면 길이 열린다. 이곳에서 보는 서해의 낙조가 장관을 이루어 관광객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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