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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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교전국지휘관병력피해 규모
청나라 | 일본 제국 |
광서제 이홍장 정여창† 등세창† |
메이지 천황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스케유키 노기 마레스케 |
630,000 | 240,616 |
전상사 약35,000 | 전사 1,132 전상사 285 병사 11,894 전상병 3,758 |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갑오전쟁(중국어 간체자: 甲午战争, 정체자: 甲午戰爭, 병음: Jiǎwǔ Zhànzhēng 자우잔정[*]), 일본에서는 일청전쟁(일본어: 日清戦争 닛신센소[*]),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 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불린다.
목차
배경[편집]
18세기 서양 열강들은 산업혁명으로 원료 공급, 상품 시장 개척, 자본 투자를 위해 해외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산업 혁명의 선두 주자이자, 세계 최대의 해운국인 영국은 인도, 호주, 남아프리카를, 영국의 라이벌 프랑스는 안남, 알제리-모로코-모로코령라퓨타를, 동유럽의 강대국 러시아는 폴란드와 시베리아를, 독일은 통일 이후에 탕가를 각각 획득하고,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에 서부개척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열강의 진출은 동아시아에까지 미쳐 청나라와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청조는 영국과의 아편 전쟁에서 패배하여 난징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1860년에는 영불 연합군에 베이징이 함락당하기도 하였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한 이후 양무운동을 전개하여, 서양의 신식 문물과 무기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보수파의 반발과 서양의 겉모습을 모방하는데 그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의 포함외교에 굴복하여 천황의 칙허를 받지않고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여, 전국각지에서 존왕양이운동이 일어났으며, 급기야, 막부타도론이 대두되어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군이 막부를 타도하여 메이지천황을 옹립하면서 유신정부를 수립하였다. 일본인들은 봉건적인 후진 사회에서 근대 산업 국가로 변모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에 각국에 대표단과 학생들을 파견하여 서양의 예술과 과학을 배우고 모방하려 하였다. 또한, 일본은 급속한 근대화를 통한 무사층의 불만을 돌리기위해 대외진출을 모색하여 타이완에 출병하고, 오키나와를 병합하였으며, 정한론을 통해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었다.
당시의 조선은 쇄국 상태로, 주변의 사회 정세에 대해서 자세하지 않아서, 일본에서 일어난 개혁의 의도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치의 실권을 취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전통적으로 유지되어오던 청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제외한 모든 서양·일본과의 통상수교를 거부하였고, 결국 통상수교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대조선 정책의 일환으로 4가지 계획안을 준비했다. 각 계획은 다음과 같다.
* 갑(甲)의 계획은 앞서 기술된 조선의 지식인들과 일본이 조선의 정치에 관여하면서 내세우던 동양 평화론과 함께 조선의 자주성 이야기의 내용 그대로로서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서 진정한 독립국으로 조선을 만들고 그 자주도 맡기며 일본도 간섭을 안 하고 타국의 간섭도 허용을 하지 않는 형태로 조선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에게 맡긴다는 것. * 을(乙)의 계획은 명의상의 독립국으로 공인하지만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그 독립에 부지하며 타국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고자 한다는 계획. * 병(丙)의 계획은 조선 영토의 안전은 청일 양국이 담보한다는 청국과의 외교 교섭을 하는 것이 계획. * 정(丁)의 계획은 일본이 서양 국가들과 청나라에 제의하여 조선을 유럽의 벨기에나 스위스 같은 영세 중립국으로 만든다는 계획.
그러나 무츠 무네미츠 외교 대신은 조선이 영구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봤을 뿐만 아니라 친일 내각을 집권시켜도 다시 친청 내각이 집권할 가능성이 높아 허사가 된다고 판단함과 동시에 전쟁 시에 일본이 얻는 문제들을 감안할 경우를 고려하여 을의 계획안을 기반으로 해서 차후 논의를 지속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내세우는 명분으로 활용하였다. 이것이 바로 을사 조약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대조선 정책의 기초적 발향으로서 1894년 8월 17일 내각에서 결정하게 된다.
조선에서의 충돌[편집]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은 그 관심을 조선에 돌렸다. 일본은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약체화를 목격하고, 만주를 비롯한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또한 러시아의 남하를 대응하기 위해 조선을 병합, 식민지화하려고 하였다. 사이고다카모리를 중심으로 강경파는 정한론을 주장하였으나, 이토히로부미를 중심으로 주류의 반대로 좌절되었으며, 조선에 대해 포함외교를 통한 통상요구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일본은 과거 미국이 자기에게 했던 방식을 모방하여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으며,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조선에 부산, 원산, 인천 3개항구를 개항시키며 경제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청나라가 개입하여 대원군을 납치하고 난을 진압한 후 종주권을 구실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대청관계와 개화정책의 노선을 둘러싸고, 기성관료를 중심으로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받아들이고, 양무운동을 모델로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려는 동도서기파와 소장관료층을 중심으로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거부하고,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려는 변법개화파간 정치투쟁이 발발하였다.
변법개화파가 일본 공사관과 내통하여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3일만에 청나라 군사고문 원세개의 개입으로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청나라와 일본 군대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였고, 패배한 변법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영국의 중재로 청나라와 일본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듬해 1885년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킨다.
- 조선의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한 훈련교관을 보내지 않는다.
- 변란 등의 중요 사건으로 어느 한 쪽이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한다.
전쟁 초기[편집]
189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친일 개혁세력인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당하였다. 일본은 그 유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청나라가 이를 막고 청나라의 전함에 실어 조선으로 보냈고, 조선에서 그는 다시 능지처참당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를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황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봉기에 조선 정부가 청나라 정부에 지원병을 요청하였을 때에 더욱 심해졌다.
청나라는 톈진 조약에 따라 파병 사실을 일본 정부에 알렸고, 엽지초 휘하 2,8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일본은 일본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원정군인 오시마 요시마사 휘하의 병력 8,000명을 조선으로 보냈다. 이들은 조선의 항의에도 1894년 6월 9일 이후 인천에 상륙, 7월 23일 고종 임금이 거하는 경복궁을 점령하였고,조선군은 대항하였으나, 고종이 직접 조선군에게 무기를 버리라는 지시를 내려 해산한다. 일청전사 초안’은 그때 조선군의 발포가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1]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조선의 내각을 김홍집, 박정양, 민영달 등의 친일 인사로 교체하여 갑오경장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더 많은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청나라는 조선의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양국간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발생 과정[편집]
- 1894년 6월 1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 조정에 반란군의 진압을 요청하였다.
- 6월 6일, 청나라 조정은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에 파병을 알렸다. 약 2,460여 명의 청나라 군대가 당일 보내졌다.
- 6월 8일, 조선과 청나라는 항의하였으나, 제물포에 약 4,500명의 일본 군대가 상륙하였다.
- 6월 11일, 전주성에서 정부군과 농민군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어, 동학농민운동 1차봉기 기간이 종료되었다.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에 철병을 요구하였다.
- 6월 13일,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이 기회를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할 기회로 판단하였고, 조선에서의 일본군의 지휘를 담당한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에 가능하면 오랫동안 조선에 남을 것을 전달하였다.
- 6월 22일, 일본으로부터의 추가 병력이 조선에 도착하였다.
- 7월 3일,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가 철병요구를 거부하고, 도리어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안을 제시하였다.
- 7월 7일, 청나라 주재 영국 대사에 의해 청나라와 일본 간의 중재가 있었으나 결렬되었다.
- 7월 19일, 일본 해군의 거의 모든 선박으로 구성된 일본의 연합함대가 전쟁에 대비하여 구성되었다.
- 7월 23일, 일본군이 한양에 진입, 경복궁을 점령하여 새로운 친일 내각을 구성하였다. 새 내각은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2]
진행[편집]
1894년 7월, 조선 내의 청나라 군대는 약 3,000 ~ 3,500명 정도였으며, 아산만을 통해서만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일본의 목표는 우선 아산의 청국군을 봉쇄하고 일본 육군으로 포위하는 것이었다.
풍도 해전[편집]
1894년 풍도 해전, 판화
1894년 7월 25일, 아산 근해를 순찰하던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쓰시마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대가 청나라 순양함 제원(済遠)과 군함 광을(広乙)과 마주쳤다. 이들은 아산으로 물자를 나르는 또 다른 청나라의 군함 조강(操江)호와 만나기 위해 아산을 떠나 있었다. 1시간의 전투 끝에,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하여 암초에 좌초되고 제원호는 탈출하였다.
청나라에는 런던의 인도차이나 증기 선박회사(Indochina Steam Navigation Company) 소유의 2,134톤급 영국 상선 가오슝(高陞)호가 있었는데, 이 배는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대여한 것으로, 골즈워디(T. R. Galsworthy) 선장과 64명의 승무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가오슝호는 1,200명의 군사와 보급품과 장비가 적재되어 있었으며, 조강호와 함께 조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고문인 독일의 포병장교 하네켄 소령(Major von Hanneken)도 승선하고 있었고, 7월 25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도고 헤이하치로 선장이 지휘한 방호순양함 나니와가 두 배를 가로막았다. 군함은 결국 포획되었고, 일본은 가오슝호에 나니와호를 따를 것과 승선한 유럽인들은 나니와로 옮겨탈 것을 요구하였다. 어쨌거나, 승선한 1,200명의 중국인들은 다시 돌아갈 것을 원했고, 영국 선장과 선원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4시간의 협상 끝에, 도고 선장은 사격할 것을 명하였다. 유럽인들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중국인들은 이들을 사격했으며, 일본군은 승무원들을 구조하였다. 가오슝호의 침몰은 일본과 영국 간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으나, 폭동에 대한 국제법으로 처리되었다.
성환과 평양 전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평양 전투 (1894년)입니다.
조선인 병사와 중국인 포로
1894년 평양 전투, 미즈노 도시가타의 판화
친일 내각으로부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권한을 부여받은 오시마 요시마사는 약 4,000명의 일본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이동하여 아산과 성환(현재의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한 3,500명의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다.
1894년 7월 28일, 양측 군대는 아산 외곽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전투를 벌였다. 청나라 군대는 점차로 병력을 잃어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사상자는 500명에 달하였으나, 일본군 측은 82명에 불과했다.
8월 1일에는 공식적으로 청나라와 일본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8월 4일 이전에 조선에 남은 청나라의 병력들은 평양으로 철수하였고, 청나라로부터 파견된 병력과 합류하였다. 13,000 ~ 15,000명의 수비군은 일본군을 저지할 것을 기대하면서 대대적으로 전투에 대비하였다.
9월 15일, 일본군은 여러 경로로 평양에 모여들었다. 일본군은 평양을 습격하여 청나라 군대를 항복시켰다. 어쨌든, 폭우와 어둠을 이용하여 잔존 병력은 평양을 빠져나와 의주로 향했다. 청나라 군대는 사망자 2,000명에 부상자가 4,000명에 달했으며, 일본군은 5 ~ 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9월 16일 아침, 평양에 입성하였다. 평양 전투 이후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다. 이로부터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황해 해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황해 해전 (1894년)입니다.
압록강 전투 또는 황해 해전은 청일 전쟁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해전으로, 1894년 9월 17일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의 함대와 압록강 하구에서 맞서 싸웠으며, 청나라측은 화력이 우위에 있었음에도 선원들의 경험과 기동력의 열세로 참가한 10대의 군함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었으며, 85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4척 파손에 사망자 90명, 부상은 200명이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4,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 부근에 상륙하였다. 북양함대는 여순항으로 피신하였다.
1894년 황해 해전, 판화
압록강 전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압록강 전투입니다.
평양에서의 격퇴로 청나라 군대는 조선의 북부를 떠나 압록강가의 요새에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일본군은 병력을 보충한 후 1894년 10월 10일 빠른 속도로 만주로 진격했다. 10월 24일 밤, 일본군은 몰래 압록강을 건너 부교를 띄웠다. 다음날 오후에는 단둥 동쪽 호산의 주둔기지를 공격하였다. 오후 10시 30분, 청나라 군대는 방어 위치를 버리고 다음날까지 단둥으로 후퇴하였다. 야마가타 장군이 지휘하는 제1군(3,5사단으로 구성)은 단둥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하여 사망 4명, 부상 14명의 희생만으로 중국 영토에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가쓰라 다로의 3사단은 서쪽으로 도주하는 청국군을 쫓아 요동 반도의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오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일본 육군 2사단은 요동반도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도시들을 점령하였고, 여순항은 일본군에 포위되었다.
여순 함락[편집]
1894년 11월 21일까지, 일본군은 여순항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여순에 거주했던 수천 또는 2만 명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는데, 이를 ‘여순 대학살’이라 한다. 1894년 12월 10일까지 요동의 건양이 일본군 1사단에 점령되었다.
우금치 전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우금치 전투입니다.
동학의병은 전봉준의 남접과 손병희의 북접이 연합하여 수만의 병력이 되었다. 이들은 1894년 10월, 관군이 지키던 공주 감영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곧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였고, 11월의 우금치 전투에서는 1만여 명 중 500명만 살아남는 등 크게 패하였다. 12월 말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웨이하이 요새 함락[편집]
북양함대는 여순항을 거쳐 웨이하이 요새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육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웨이하이의 전투는 육군과 해군이 동원되어 1895년 1월 20일 부터 2월 12일까지 23일간 진행되었고, 웨이하이 요새는 일본군에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남쪽과 북쪽으로 진격하여, 1895년 3월에는 북경이 바라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3월 5일에는 잉커우 외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동중국해 점령[편집]
1895년 3월 26일, 일본군은 타이완 부근의 펑후 제도를 희생자 없이 점령하였고, 같은 해 3월 29일 가바야마 스케노리 지휘하에 타이완에 상륙,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동중국해는 사실상 일본의 영역처럼 변하였다.
전쟁 종료 및 영향[편집]
시모노세키 조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하여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확립시켜 주었고, 배상금 2억 냥(兩)을 일본에 지불하였으며, 랴오둥 반도·타이완, 펑후 제도 등을 할양하였으며,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는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국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고, 일본은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침략의 야욕을 표시하여 필연적으로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요동반도는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반환되었다.
조선의 명성황후는 이 같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일본은 이에 큰 위협을 느꼈고,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는 일본 공사 미우라가 지휘하는 일본군의 2개 대대가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에게 왕비의 폐출 조서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그것을 거부하자 세자(순종)에 칼을 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조선을 압박하여 을미개혁을 실행하였으나, 민중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조선 내에서 일본의 세력은 감소하였다. 이듬해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한편, 동아시아에 대한 주도권은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옮겨졌으며, 청나라 조정과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에 치명타를 주었다. 이러한 경향이 이후 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이후 일본제국은 러시아제국과의 치열한 대립을 펼친다.
또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출정한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이대로 곧장 중국으로 쳐들어가 성경과 길림과 흑룡강 3성을 점령하여 일본의 수중에 넣고, 북경까지 진공하여 보물과 고서적 같은 귀한 재보들을 약탈하라는 내용을 담은 글을 연일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3]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 news.joins.com/amparticle/3695868
- ↑ 한계옥 (1998년 4월 10일). 〈‘국왕 생포 작전’과 왕비 학살〉. 《망언의 뿌리를 찾아서》. 조양욱 1 1쇄판. 서울: (주)자유포럼. 89~92쪽쪽. ISBN 89-87811-05-0.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는 “조선 병사의 발포에 의해 우발적인 충돌이 시작되어, 일본군은 도리없이 응전하여 왕궁으로 들어갔다”이다. 그러나 1994년 나라 여자 대학 교수 나카즈카 아키라[中塚明] 씨가 발견한 일본군 참모 본부편 《淸日戰爭草案》(42권)은 그 모든 과정이 일본 외무성과 군부의 용의주도하고 계획적인 작전이었음을 실증하고 있다.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 야스카와 주노스케(やすかわ じゅのすけ).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福澤諭吉のアジア認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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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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