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이다. 973년(광종 24)영현선사(永賢禪師)가 창건하여 백암선원(白岩禪院)이라 하였다.
그 뒤 폐사가 되었다가 1068년(문종 22)이의(李顗)가 중건하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으며, 1089년(선종 6)이의의 아들인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자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에 산이름을 청평(淸平)이라 하고 절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이라 한 뒤, 견성암(見性庵)·양신암(養神庵)·칠성암(七星庵)·등운암(騰雲庵)·복희암(福禧庵)·지장암(地藏庵)·식암(息庵)·선동암(仙洞庵) 등 8암자를 짓고 크게 중창하였다.
1327년(충숙왕 14)원나라 황제 진종(晉宗)의 비가 불경·재물을 시주하였고, 1367년(공민왕 16)에 나옹(懶翁)이 복희암에서 2년 동안 머물렀다. 1555년(명종 10) 보우(普雨)가 이곳에 와서 청평사로 개칭하였고, 대부분 건물을 신축하였다.
1711년(숙종 37)에 환성(喚惺)이 중수하였고, 1728년(영조 4)에 각선(禪覺)이 삼존불상을 조성하였다. 6·25전쟁 때 구광전(九光殿)과 사성전(四聖殿) 등이 소실되었다.
1977년공철(空徹)이 극락보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였고, 1979년향봉(香峯)이 해탈문과 적멸보궁을, 1984년서호(西昊)가 요사와 청평루·서향원(瑞香院)을, 1988년석진(石眞)이 대웅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청평사 회전문(淸平寺回轉門)과 극락보전(極樂寶殿), 적멸보궁·청평루·서향원·해탈문·불각(佛閣) 1동이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요사채가 있다.
사지(寺址)는 강원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불전·회랑·문 등의 초석을 통하여 전성기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문화재로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호인 삼층석탑과 진락공부도(眞樂公浮屠)·환적당부도(幻寂堂浮屠) 등이 있다.
이 중 삼층석탑은 공주탑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2층 옥개석만 남아 있고, 3층 이상은 없어졌으며, 2층 옥개 위에 잡석들을 올려 놓았다. 이 탑은 상삿뱀에 몸이 얽혀 갖은 고생을 하던 원순제[元順帝:산동 성주라는 설도 있음]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가사불사(袈裟佛事)를 행한 뒤, 상삿뱀을 떨쳐버리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원순제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세웠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한, 이 절에 있는 고려 정원(高麗庭苑)은 지금까지 밝혀진 정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 교토[京都]의 사이호사[西芳寺]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여 년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1981년 조사단의 지표발굴 및 측량조사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연못인 영지(影池)와 거기서 400m쯤 떨어진 청평사 계곡 하류에서 정원 조성용 암석 및 석축을 발견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2㎞ 떨어진 상류에서는 이 정원을 만든 이자현이 새긴 ‘청평식암(淸平息菴)’이라는 각자(刻字)가 발견되어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영지 중심의 대규모 고려 정원임이 확인되었다.
또, 구성폭포에서 식암에 이르는 2㎞ 9,000여 평의 방대한 지역에는 계곡을 따라 주변의 자연 경관을 최대한으로 살려 수로를 만들고, 계곡의 물을 자연스럽게 정원 안으로 끌어들여 영지에 연결시켰으며 주위에 정자와 암자 등을 세우는 등,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선(禪)을 익히는 정신수양의 도량으로 짜임새 있게 가꾸어졌음이 밝혀졌다.
영지는 청평사 뒤의 오봉산이 비치도록 되어 있으며, 연못 가운데 세 개의 큰 돌이 있고, 그 사이에 갈대를 심어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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