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갈
閔丙㵧 Carl Ferris Miller | |
前 미군정청 예하 주한미군사령부 정책비서고문관 (前 美軍政廳 隸下 駐韓美軍司令部 政策秘書顧問官) | |
임기 | 1947년 1월 27일 ~ 1948년 6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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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
주석 |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자) |
부주석 | 이시영 (대한민국 부통령 당선자) |
부통령 | 윌리엄 레이 (미국 합동참모총장) |
부총리 | 체스터 니미츠 (미국 해군참모총장) 루이 덴펠드 (미국 해군참모총장) |
수상 |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 장관) |
부수상 | 더글러스 맥아더 (UN연합군 최고사령관) |
장관 | 존 리드 하지 (미군정청 군정 장관) |
차관 | 의친왕 이강 (前 대한제국 대리청정공) |
사령관 | 지청천 (대한광복군 참모총사령관) |
지휘관 | 이범석 (대한광복군 제1중앙사령관) |
참모장 | 의민영친왕 이은 (대한제국 보위 청구자) |
前 대한민국 산림청 특임행정촉탁위원 (前 大韓民國 山林廳 特任行政囑託委員) | |
임기 | 1986년 2월 20일 ~ 1986년 5월 31일 |
대통령 | 전두환 |
前 대한민국 철도청 특임행정촉탁위원 (前 大韓民國 鐵道廳 特任行政囑託委員) | |
임기 | 1986년 7월 20일 ~ 1986년 10월 16일 |
대통령 | 전두환 |
前 대한민국 국방부 차관 예하 국방외교행정특보보좌관 직무대리 (前 大韓民國 國防部 隸下 國防外交行政特報補佐官 職務代理) | |
임기 | 1987년 12월 18일 ~ 1988년 2월 29일 |
대통령 | 전두환 노태우 |
차관 | 신치구 (대한민국 국방부 차관)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21년 12월 24일 |
출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웨스트 피츠턴 |
사망일 | 2002년 4월 8일 (80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본관 | 여흥(驪州) |
경력 | 대한민국 귀화한 미국계 한국인 수목원예가 겸 사회운동가 신민공 국제과학기술행정특보위원(1988년) 자민련 산림자원산업행정특임고문(1996년) 천리포수목원 재단 이사장 |
정당 | 무소속 |
부모 | 민대식(양부) |
형제 | 민병수(양형) 준 맥데이드(친가 누이동생)[1] |
배우자 | 無 |
자녀 | 無 |
친인척 | 민덕기(양조카) 민웅기(양종질) 민영휘(양조부) 민천식(양숙부) 민규식(양숙부) 민병도(양종형) |
종교 | 개신교(침례회) |
서훈 | 2002년 대한민국 금탑산업훈장 추서 2002년 미국 우정의 메달 추서 |
웹사이트 | 천리포수목원 네이버 데이터 |
군사 경력 | |
군복무 | 미국 해군 |
복무기간 | 1944년 ~ 1949년 |
최종계급 | 예비역 미국 해군 대위 |
지휘 | 주한미군사령부 통역장교 주한미군사령부 정책비서고문관 |
근무 | 미군정청 예하 주한미군사령부 |
민병갈(閔丙㵧, 1921년 4월 5일 ~ 2002년 4월 8일)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립수목원을 세운 미국계 귀화 한국인이며 예비역 미국 해군 대위이다. 민병도(閔丙燾)와 대한민국 관련 인연이 각별하였으며 칼 페리스 밀러(영어: Carl Ferris Miller)가 그의 귀화 前 이름이다.
생애[편집]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웨스트 피츠턴에서 태어났고, 버크넬(Bucknell)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할 줄 알았고, 한자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징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1944년 콜로라도 대학의 해군 정보학교 일본어 과정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1945년 4월을 기하여 일본 오키나와 섬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배치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대하여 일본군이 무조건 투항을 선언하는 사안을 목도한 그는 이후 1946년, 한국에 연합군 중위로 처음 오게 되었다. 당시 25살이었고, 그 후 다시 1947년 1월 주한미군사령부 사법분과위원회 정책비서고문관으로 지원해 한국으로 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 시절 다시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그 후 1953년 한국은행에 취직해 자리잡을 때까지 전쟁시에 일본과 미국, 한국을 왔다갔다 해야만 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천리포수목원 조성을 시작하여 1979년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귀화하였다. 그는 서울의 증권사에서 일하면서 수목원 조성에 힘을 쏟았고, 한국과 식물에 대한 공부에 힘을 쏟았다.
천리포수목원은 1979년에 재단이 되었고, 1989년까지 10년 동안 해외 교류 학습을 통해 영국 왕립 원예협회(RHS) 공로메달을 수여받았다. 재단 출범 전 해인 1978년 민병갈은 남해안 답사여행에서 감탕나무(Ilex)와 호랑가시나무의 자연 교잡(交雜)으로 생긴 신종 식물을 발견하였고, 세계에서 한국의 완도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으로 검증되었다. 민병갈은 국제규약에 따라 발견자와 서식지 이름을 넣은 학명 'Ilex × wandoensis C. F. Miller'을 국제학회에 등록했고 한국이름은 '완도호랑가시'로 정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배양된 완도호랑가시는 종자목록(Index Seminum) 발행을 통한 다국간 종자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퍼져나갔고, 천리포수목원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1978년부터 1998년까지 36개국 140개 기관과 교류 관계를 맺어 다양한 품종의 나무를 들여왔다. 민병갈은 국제적인 교류에 관심이 많아서 우리나라의 환경과 식물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1997년 4월 국제목련학회 연차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1998년 5월에는 미국 수목원이 주축을 이룬 범세계적 학술친목 단체인 HSA의 총회를 천리포수목원에서 개최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2002년 4월 8일, 81세로 숨을 거두었고, 천리포수목원 내에 수목장으로 묻혔다. 재단법인 천리포수목원은 민병갈 사망 후 후임 이사장에 문국현(文國鉉) 유한킴벌리 사장을 추대하였고, 2010년 이은복 한서대 명예교수를 이사장으로 추대하여 운영되고 있다.
민병갈은 2002년 대통령이 수여하는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으며, 같은 해 미국 프리덤 재단(Freedoms Foundation)에서 평화와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실현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우정의 메달을 수상했다. 안타깝게도 이 상훈은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여동생인 준 맥데이드(June MacDade)가 대리수상하였다. 그가 조성한 천리포수목원은 다양한 식물 품종으로 주목받았고 2000년 아시아 최초로 국제수목학회(IDS, International Dendrology Society)가 지정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Arboritum Distinguished for Merit)', 미국 호랑가시학회(HSA, Holly Society of America)가 선정하는 '공인 호랑가시 수목원(Official Holly Arboritum)'이 되었다.
개인사[편집]
민병갈은 1993년 72세의 나이에 동성애 성향이 있음을 커밍아웃한 바 있다.[2]
학력[편집]
명예 박사 학위[편집]
- 대한민국 단국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참고 자료[편집]
- 임준수 (지은이); 류기성 (사진) (2004년 11월 17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 김영사. ISBN 89-349-1509-9.
각주[편집]
- ↑ 친가 여동생 준 맥데이드는 영어로 June MacDade라 표기.
- ↑ 지상에 천국을 일군 한 동성애인의 꿈, 한겨레, 2013년 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