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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

배중진 2017. 12. 29.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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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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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KM-CHD.jpg

대한민국 국군의 국방부 참모총장

초대 채병덕

폐지

대한민국 육군총참모장

초대 이응준

2대 채병덕

3대 신태영

3대 신태영

4대 채병덕

5대 정일권


1. 개요
1.1. 일제강점기1.2. 광복1.3. 개전 직전1.4. 6.25 전쟁
2. 평가
2.1. 옹호2.2. 비판2.3. 결론2.4. 여담

1. 개요[편집]

채병덕(蔡秉德)
1914년 4월 17일1950년 7월 26일.

대한민국군인. 한국 전쟁 개전 당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키가 167cm인데도 불구하고 몸무게가 136kg까지 나갈 정도로 뚱뚱해서 미 육군에서는 그를 'fat채'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한다.

1.1. 일제강점기[편집]

채관수(蔡觀洙)의 둘째 아들로 1914년 태어났다.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와 평양공립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35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1] 일본 육군소위임관되었다가 그뒤 일본 육군 포공학교를 졸업, 병기장교가 되며 일본군에서 경력을 쌓았다. 이후 사세보 중포대 등을 거쳐 육군 소좌로 현재 부평지역에 있었던 인천 육군조병창 공장장(陸軍造兵廠工場長)에 재임 중 광복을 맞았다.

참고로 그 당시 채병덕이 근무했던 조병창은 한반도 내에서 무기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치고 한 번이라도 채병덕과 접선을 시도해서 무기를 반출하려 시도를 안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일본 육군이 막장이기는 했으나 내부통제능력은 아직 확고했기 때문에 채병덕이 무기나 물자를 빼돌리기는 어려웠으므로 독립운동에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았으나, 최소한 접선을 시도한 사람을 일본 육군에게 신고하지는 않았으므로 적어도 일본군 앞잡이로 평가받지는 않았다. '참고로 그때는 어떻게든 승진하기 위해 누구든지 독립운동가를 밀고하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일본군 경력은 경력인지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광복이 되자 이 조병창이 장래 국군 창설에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될 거라고 보고 설비가 파손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잘 관리했는데, 미 육군 제24군단이 와서 이곳에 주둔하며 '몽땅 때려부순 후 파묻어버렸다.'

1.2. 광복[편집]

1946년 1월 육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국방경비대 기간요원으로 특채되어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정위(正尉: 현재의 대위)로 임관되었다. 이후 국방경비대 제1연대장·1보급부대장·병기부대사령관·후방부대사령관·제4여단장 등을 지냈다.

1948년 8월 통위부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그 해 12월 육군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동시에 국방부 참모총장[2]이 되었으며, 1949년 2월 육군소장으로 진급하였다. 이해 5월 국방부의 기구간소화로 종래의 육·해군을 통합지휘하던 국방부 참모총장 직책이 폐지되고 국방장관이 총괄하게 됨에 따라 제2대 육군총참모장이 되었다. 총참모장 재직중 전력증강을 위한 부대증설, 교육강화를 위한 각종 군사학교의 신설, 북한 대남유격대 토벌작전 수행 등의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949년 10월 남북한간의 물자교역과정에서 발생한 남북교역사건, 이른바 '명태 사건'[3]으로 참모총장직에서 사임, 예편되었다. 같은해 12월 현역에 복귀, 국방부 병기행정본부장에 임용되었다.

1.3. 개전 직전[편집]

1950년 4월 제4대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취임 초기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의 남침정보를 접하였다. 그 중에서 6.25전쟁이 발발하기 일보직전의 상황을 채병덕에게 보고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훗날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 당시 그는 남로당 군사책임자임이 밝혀져 체포,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가 프락치 고발과 만주군 인맥의 보증을 통해 형집행정지 처분은 받았으되 결국 군에서는 파면당해 일반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동안 38선에서의 무력침공사건이 발생하거나 대남유격대가 준동할 때마다 채병덕은 비상경계의 형식으로 대처하였고, 또한 그것으로 실효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전 직전에는 정보국의 정보분석과 북한남침경고를 무시하였다.

그리고 개전 직전에 장비를 일제 회수하여 병기창에서 점검하거나 장병 외박을 대규모로 허가하고, 지휘관의 대규모 인사이동을 실시하는 등의 명령을 내려서 한국전쟁 개전 당시 한국군의 열세를 더욱 악화시키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1.4. 6.25 전쟁[편집]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특별시가 함락되는 등 패전을 거듭하였다. 특히 앞서 언급한 문제와 함께 한강대교 폭파 문제로 인해 엄청난 비판을 들었다. 다만 이걸로 인한 인사조치는 한강대교 폭파를 직접 지시, 이행한 당시 육군 공병감 최창식 대령총살시킨게 전부였지 다른 사람에 대한 인사조치는 없었다.

그리고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김홍일 장군을 장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강 방어선 전투를 승리로 이끌는데 도움(?)을 줬다.

채병덕이 해임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서울이 함락된 직후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려고 방문한 미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그의 부하인 육군 소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채병덕에게 "이제 방어를 어떻게 할 거냐? 참모총장으로서 지휘계획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했다. 이 자리에는 단둘이 독대면을 한게 아니고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도 같이 있었다. 그러자 채병덕은 "200만 남한 청년들을 모조리 징집해서 훈련시키면 침략을 알아서 격퇴해준다."고 말했다.[4] 한마디로 말해서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채병덕은 영어를 거의 못했고 가뜩이나 형편없는 보고가 통역을 위해 자꾸만 끊어졌다. 맥아더는 채병덕의 첫인상부터 살찐 미련곰탱이라는 인상을 받아 껄끄러워하던 차였는데 이와 같은 문제가 하나둘 겹치면서 알몬드에게 "저 인간 구제불능이군."이라는 말까지 하게 된다. 어쨌거나 맥아더 장군은 정치력을 발휘해서 이 자리에서는 채병덕 장군을 아주 크게 칭찬한 반면 그 날 저녁 이승만에게 독대면을 요구, 이승만과 단 둘이 독대면을 하게 되자 채병덕을 보직해임시키라고 요구했다. 채병덕은 이렇게 맥아더로부터 무능하다고 찍혀서 해임된 것이지 책임을 지고 사임한 것이 절대 아니다.

이에 이승만은 자신에게도 상당부분 있는 한국전쟁의 개전시 국군이 패배를 거듭한 책임을 덜어내는 동시에 이제부터 미군이 주축이 된 주한UN군의 지원을 제대로 받아야 할 입장에서 UN군 총사령관이 될 가능성이 100%인 맥아더의 이 요구를 즉각 이행했다. 사실 이승만은 친미주의자이긴 했지만 그동안 국군의 상황과는 동떨어지게 허장성세인 북진통일 주장을 펼치는 등 미국에게 밉보인 상태라서 이번 기회에 자신도 미국의 말을 제대로 따른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다음날 아침부로 이승만은 기상하자마자 제일 먼저 채병덕부터 직접 보직해임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그날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맥아더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채병덕을 해임한 이후 그 후임으로 미국에서 교육 중에 급히 귀국한 정일권 장군을 육군총참모장 겸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해임통보서를 정일권에게 들려보냈다. 정일권이 채병덕을 찾아갔는데 채병덕은 자신이 해임된 것은 알았지만 후임이 누군지는 모르던 판국이었고 정일권이 오자 몹시 반가워했다. 정일권 장군이 "제가 당신의 후임입니다. 당신을 도우러 왔는데 당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자 채병덕은 자네라면 믿을 수 있다고 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한다.

결국 채병덕은 보직해임당하고 나서 영남편선관구사령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해당 직책은 허울만 좋은 직책이었고, 말이 사령관이지 실제 휘하병력도 얼마 되지 않는 소규모였다. 일단 장군이 지휘하기에는 병력규모가 너무 작으며, 그 병력도 연대규모라는 설도 있고 대대 규모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병력 자체의 크기가 불분명하며, 당장 전선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아직 후방인 영남을 방어할 예비 부대를 편성할 리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바로 답이 나온다. 그나마도 채병덕의 신분이 장군이고 전직 육참총장이니까 이렇게 보직의 이름이나마 거창하게 지어줬을 뿐이지 실제 채병덕의 권한은 대대장 내지는 연대장 정도에 불과했다. 실제로도 한동안 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그 뒤 남해안을 돌아 공격하여 오는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호위병도 없이 단독으로 미군의 통역 겸 안내인과 같이 출전하였다가 그해 7월 하동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전사원인은 아군의 군복과 장비를 착용한 북한군을 탐색하기 위해 미군이 채병덕을 파견하였는데, 채병덕과 그의 전속부관 이상국, 미 육군 장교가 접근하여 소속을 묻자 북한군들은 즉각 길 양옆으로 흩어지면서 총을 갈겨댔다. 총에 맞은 채병덕은 이상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치명상을 입고 말았고, 유언으로 "장관님께 내가 죄송해하더라고 전해주게."라고 말하고는 숨졌다. 이에 전사로 인정되어 정부는 1계급 특진시켜 중장 계급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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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 장군 전사비.

원래 해당 비석은 채병덕이 전사한 위치에 건립되었으나, 그 지역의 도로가 새로 뚫리면서 기존의 도로가 폐도되어 비석을 보러 오기 힘들어지자 위치를 이전한 것이다.

2. 평가[편집]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개전 초반의 패배를 불러온 총책임자로 평가된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과 비교하여 두 인물의 직위와 함께 초반 전황을 매우 위급하게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능력에 비하여 위급한 시기에 과도하게 중요한 자리에 앉아서 전황을 심히 위급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2.1. 옹호[편집]

그러나 일단 자세히 뜯어보면 옹호해줄 측면은 있다. 문제는 전쟁은 일단 결과가 우선인지라 최종적인 책임은 피할 수가 없지만...

  • 한국인 출신치고는 높은 편인 일본 육군소좌 계급을 지녔지만, 실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포병 출신이긴 한데, 대부분의 보직은 병기와 생산에 관련된 보직이라 병기과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 게다가 상당히 빠른 시점에서 포병에서 병기과로 자리를 옮겼고, 광복 직전까지 병기창에서 일했기 때문에 실전경험이 매우 적었다. 따라서 실전경험이 거의 없는 고위급 장교가 된 것이다. 포병연대 주임원사나 할만한 사람에게 육참총장을 맡겼다 하지만 병기창에서 근무했다는 것은 그 당시 창군과정이었던 한국군에게 있어서는 매우 소중한 자원이었다. 최소한 누군가 1명 이상은 높은 곳에서 서류를 만지고 물자와 장비를 관리하는 등 군 내부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이 필요했으며, 그 당시 관련 실무에 능통한 인물은 채병덕밖에 없었다.

  • 한국전쟁 개전 직전 한국군의 상황은 참담 그 자체였다. 일단 북한의 준동 대비와 빨치산 토벌을 위해 급격한 속도로 부대를 증강했지만, 미국은 이승만과의 불화문제도 있어서 예전에 약속했던 수준의 장비와 물자만 지급했기 때문에 결국 만성적인 장비부족, 물자부족, 연료부족에 시달렸다. 게다가 북한과의 소규모 충돌이나 빨치산과의 전투로 인해 그나마 보유했던 장비와 물자가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일부는 파손되어 수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군의 훈련수준도 그렇게 좋지 않았고, 수리시설도 조병창을 제외하면 전무에 가까웠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래서 이걸 해결하기 위해 장비를 대량으로 조병창에 보내서 일제수리를 한다든지 하는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 한국전쟁 개전 직전의 연이은 비상경계태세는 장병들의 피로를 극대화시켰을 뿐 아니라 군량의 고갈을 불러왔으며(대신 건빵만 쌓여있었다고 한다). 농촌에서는 일손이 부족한 시기였기 때문에 군량고갈을 막기 위해서라도(...) 주기적으로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하고 농촌 출신이 다수인 장병들을 고향 일손 돕게 할겸 대규모로 외박보내야 했다. 그래서 통상적인 관례에 따라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하였다.

  • 채병덕 스스로도 언젠가는 북한과의 충돌이 대규모로 벌어질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될수록 전투에 능한 인물로 38선을 지키는 사단의 주요 지휘관을 교체하려고 했는데, 이런 일의 특성상 빨리 대규모로 하지 않으면 부임한 지휘관이 부대를 장악할 시간이 없게 된다. 그래서 대규모 인사이동을 감행하였다.

  • 채병덕 최대의 실책으로 기록된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조기 폭파의 경우, 한강교 폭파 계획은 채병덕이 수립한 것이 맞으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채병덕이 결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해당 상황의 경우 서울 함락은 시간문제였으니 폭파 계획 자체를 수립한 것은 정당하며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 굳이 실책을 따지자면 폭파를 담당할 부대의 지휘관에게 누구의 명령을 받고 어떤 시점에서 폭파할 지 확실하게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채병덕의 명령은 대부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요약하자면 전쟁이 아닌 사무와 행정, 보급 능력때문에 장군으로 임명받은 사람이라는 것과 전면전을 준비하기 위한 지시들이 타이밍이 안맞아 병크가 난 것, 즉 불운이 좀 있었다. 어떤 면에서, 공교롭게도 출신 병과가 같은 포병인 미 육군중장 레슬리 맥네어 장군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2.2. 비판[편집]

하지만 문제는 경계 해제와 지휘관 교체 등의 명령이 하필이면 '한국전쟁 개전 직전에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한국 육군은 개전 초반 물질적인 열세보다 더 심한 열세에 빠졌다. 당장 38선을 지키는 사단의 병력이 심하면 절반 정도나 외박을 나가서 전방에서 전투할 사람이 줄었으며, 장비도 정비한다고 대량으로 조병창에 가버리는 바람에 장비도 부족하고 화력지원도 약해졌다. 게다가 새로 부임한 지휘관은 현지부대 장악은 커녕 담당구역 파악도 안된 상태였고, 제7보병사단같은 일부 사단의 경우 새로 배속된 부대는 아직 기존 주둔지에 있는데 자신의 부대만 새로 배속된 곳으로 보내버려서 병력이 더욱 줄어드는 기괴한 상황에 놓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요한 시기에 훼방을 놓은 셈'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까지만 실책을 저질렀다면 '운수 없는 사람' 정도로 평가받았을 것이나 이후에도 본격적인 훼방을 놓았기에 처참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 채병덕은 전쟁발발 2일차인 6월 26일에 보고에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와중에 서울사수를 자신했고 명령만 있으면 4일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으며 육군 제17연대[5]가 배편으로 부랴부랴 인천으로 철수하고 있는 와중에 해주로 진격하여 반격할 것이라는 둥 헛소리를 해댔다.

  • 개전 후에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6] 전면전시 사용할 작전 계획도 거의 수립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나마 있는 계획조차 현실을 무시한 것이었다. 덕분에 개전 후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군대 지휘 경험이 있는 군 원로들을 급히 소집해서 만든 가칭 원로회의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이 회의에 참석한 멤버들은 김석원, 지청천, 김홍일, 이범석, 김정렬 등으로, 국민당군광복군, 만주국 육군, 일본 육군 등에서 야전 지휘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이었다. 이들이 채병덕의 삽질을 보고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덕분에 "당신은 지금 분대장처럼 보고하고 있소!"라며 비판뿐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할 대책을 조언이라고 읽고 강요까지 받는 처지에 몰린다.

  • 평소 한국군의 실상을 감안하지 않고 1 대 10 필승론이나 200만 한국 장정 훈련같은 호언장담을 했다. 물론 이런 짓은 이승만 등 다른 정치인들도 했지만... 문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치인들에게 그렇게 떠벌리고 다닌 능력을 보여줘라!란 압박을 받았다는 것이라는 말이 있으나 국방부 발간 6.25 전쟁사에서 이야기하기를 그렇게 정치인들이 결의서를 채택하여 이를 행정부인 이승만에게 전달하려고 했으나, 이승만이 도망갔고, 결국 입법부도 같이 도망갔기에 전달되지 못했다. 그래서 최악의 실책인 '동두천 반격작전'은 채병덕의 판단으로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국방부에서 공식적으로 발간한 정부문서에서 이렇게 서술할 정도로 채병덕의 실책은 너무나 컸다. 게다가 해당 반격작전 및 뒷수습을 위해 후방에 있던 3개 사단의 병력을 쪼개서 축차투입하는 바람에 사단장 등 지휘관들은 자기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물론(?) 채병덕과 육군본부도 투입한 부대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몰랐다(...). 이렇게 축차투입한 병력은 당연히 축차 소모 신세. 더 암담한 건 어디로 가서 방어하라는 지시만 있었지 마구잡이식으로 보낸 부대를 누가 통합해서 지휘할지 정한다던가 육본과 부대간, 그리고 부대와 부대간의 연락망을 확립한다던가 부상병을 후송하고 탄약식량을 추징해 보낸다던가 하는 조치가 일절 없었다. 이 때문에 많은 부대가 원래의 전투력도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여기에 더해 마땅히 후방으로 대피시킨 후 빨리 장교로 임관시켜서 부대를 이끌어야 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생도대대란 이름으로 전선에 보병으로 축차투입시키기도 했다.[7][8][9] 앞의 200만 장정 훈련 운운과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정말 삽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육군사관생도는 미래의 장교들이다. 전쟁이 터진 지금 상황에서 미래의 장교들을 1회용 총알받이로 내보낸 것.[10] 그것도 축차 소모 & 마구잡이 투입이었다. 200만의 장정을 어찌어찌 모아서 훈련시켜 소총을 쥐어주었다 한들 그들을 이끌 장교가 없다면? 아무리 혼란상황에 자기 병력이 어디있는 지도 모르는 막장 상황이라지만 그렇다고 어린 소년들을 저 상황으로 밀어넣는 게 말이 되는 소리가 되진 않는다. 반면 대한민국 해군은 비록 전선이 낙동강에 이르렀을 때에만 일시적으로 생도들을 해군 육전대로 편성해 육전을 시킨 적은 있으나, 전선이 안정되자 도로 복학시켰고 종전시까지 해군사관학교는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시켜 임관시켰다.

  • 즉결처분권에 대한 비판도 있다. 6·25초기에 탈영병이 많으니까 채병덕 총장이 사살령을 내렸으며 이후 이를 알아챈 미군측이 즉결처분이 전쟁범죄라고 강력하게 항의해서 6개월 뒤에 중단 명령이 내려갔는데 이게 제대로 하달이 안 됐다고 한다.#

  • 서울을 사수할 생각은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한 것이 없었다. 병력만 마구잡이 식으로 보냈지 보낸 병력과 통신망을 확립한다거나 보낸 병력이 누구 지휘를 받아 싸울지 정한다거나, 막상 소모한 탄약을 보충해준다거나 하는 작전통제 및 군수지원이 전무했다. 덕분에 서울과 부평에 집중된 장비와 물자를 전방에 뿌리거나 후방으로 이송하지 않고 당장의 전투지휘에만 매달리다가 결국 의정부 방면이 돌파되니 당황해서 물자와 장비를 그대로 방기하고 심지어는 병력 철수나 피난민 통과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를 결정하게 된다. 물론 당시 정부에서도 제대로 서울을 포기하는 계획을 짜지 못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피신만 간신히 진행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꼴이니 정부 기밀 문서나 한국은행 금괴같은 사소한 것들(...)에 신경쓸 리 만무했다. 다행히 이는 당시 대한민국 국회 부의장이었던 조봉암과 한국은행 구용서 총재의 노력으로 폭파 직전에 대피가 가능했다.[11] 하지만 민간인이 주축이 된 정부와는 달리 전쟁을 염두에 둔 군인이 비상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것은 욕을 먹어 마땅한 일이다. 덕분에 서울 시민들과 피난민이 한강 북쪽에 갇혀 버렸으며, 서울 북방에서 싸우던 병력들이 일제히 붕괴되었다. 당시 동두천-의정부시 축선에서 이미 붕괴되기 직전인 부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문산-파주 축선을 간신히 지키고 있던 1사단 병력도 거의 모든 중장비를 버리고 간신히 장병들만 한강을 건너서 후퇴할 수 있었으며 그나마 후퇴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상실했다. 따라서 서울을 함락당한 개전후 3일 시점에서 육군본부가 장악한 병력은 개전전 9만 8천명에서 2만 3천명으로 엄청나게 축소되고 만다. 한마디로 말해 3일만에 전체 육군 병력의 76.6%을 날린 셈이다.


위와 같은 수많은 행적들로 인해 채병덕은 당시 국방장관인 신성모와 함께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었다는 설까지 있다.조선인민군 로동영웅 한국판 무타구치 렌야이건 농담이 아니라 개전 당시 2사단장을 맡았던 이형근 장군 등은 전후 채병덕의 행적에 대해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다만 현재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간첩으로 오인받을 정도로 워낙 무능한 꼴을 많이 보인데다가, 북한 입장에서 봐도 계급만 높아서 회유시 매우 높은 대접을 해줘야 하는데 비해 능력은 엄청나게 떨어진다. 당장 적국의 현역 육군참모총장에 있는 인물을 포섭하려면 미끼로 뭘 던져주어야 하는 지 감안해보기만 해도 충분... 결정적으로 개전 당시 간첩행위를 한 것으로 보이는 위관급이나 영관급 장교 몇명은 해당 행위를 하자마자 탈영하여 북한군에 합류한 것에 비해 채병덕은 찬밥 신세가 되어서도 전사할 때까지 국군에 잔류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충성심 하나는 있었다는 이야기다. 유능한 적보다 무서운 게 무능한 아군이라더니

하지만 한국 육군의 최고 지휘관인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본인이 위의 모든 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런 사태가 발생했을 시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채병덕이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위에 언급한 실책을 포함할 경우 채병덕은 확실히 개전 전후의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2.3. 결론[편집]

종합하자면 평시엔 유능하나 전시엔 무능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채병덕 본인도 평시에 필요한 능력인 꼼꼼한 사무처리나 신중한 판단을 잘했다. 문제는 한국전쟁 초반이 전시에 필요한 능력인 임기응변이나 빠른 판단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했다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욕을 먹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북한과 내통한 증거가 전혀 없는데다가 일제강점기의 행적을 봐도 적과 내통하지는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채병덕 본인도 그 일로 인해 육군의 최고 위치에서 거의 강제로 끌려나와 허울만 좋은 한직을 맡았고, 나중에는 소장 계급의 인물이 맡기에 어울리지 않는 미군 부대의 통역 겸 안내인을 맡아서 호위병도 없이 단독으로 전선에 복귀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고의성은 없다는 이야기며,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결과를 가지고 따지는 것이며, 과정은 참고할 수준에 불과하다는 문제도 있는데다가 결정적으로 고의는 아니었으나 부적절한 시기에 명령을 내렸고, 개전 후에는 당황해서 추가적인 실책을 저질렀다는 점에서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채병덕은 육군참모총장 직위보다는 교육사령관이나 군수사령관을 맡았으면 지금의 평가보다는 엄청나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실제 채병덕은 일본 육군에서 복무할 시절에는 병참과장이라든가 조병창장 등 전투근무지원 분야에서만 일했을 뿐이지 실제 전투부대에서는 채병덕 자신의 계급에 걸맞는 지휘관은 커녕 소총분대장조차 해본 적이 없는 위인이었다. 때문에 이런 채병덕을 육군 전투부대 최고의 지휘관 자리인 육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앉힌 건 채병덕의 병크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채병덕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일본 육군 장교의 교육훈련체계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비전투병과의 경우 장교로서의 최소한의 교육훈련이 아예 없었다는 점. 받은 훈련이 없으니 뭘 보여줄 수 있겠나? 실제 일본 육군의 장교훈련이라는게 철저하게 자신이 담당하는 병과만 훈련시키는 방식이어서 장교로서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시키는 건 전투병과 장교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었고, 자연히 비전투병과의 장교는 일반적인 군사훈련이나 지휘경험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채병덕의 본 병과는 엄연히 전투병과인 포병이다.

게다가 이건 일본 육군 전체의 문제였으며, 이런 문제점을 일본 육군도 스스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므로 정식지휘관의 유고시 지휘대행을 맡는게 남은 자들중 가장 높은 계급의 상급자가 아니라 전투병과중, 그것도 전투병과 끼리라면 보병중 가장 상급자였다고 한다. 즉, 극단적으로 말해 비전투병과의 대령(대좌)이 전투병과의 소위 지휘를 따라야했다는 뻘짓을 하게 만들었다. 당장 이렇게 할 경우 지휘경험같은 문제점은 약간 해결되지만, 장교간 계급체제가 붕괴되는 등의 큰 부작용이 초래된다.

또한 채병덕 장군의 전례로 인하여 대한민국 육군 장교의 인사체계가 크게 달라졌는데 비육사출신 + 특전사 또는 기행병과가 아닌 이상 소위로 임관하면 무조건 소대장이라는 불문율을 만들어냈다. 즉 육군사관학교는 졸업하면 무조건 소대장이고 비육사라도 특전사로 빠지거나 군종, 의무, 간호, 의정, 부관, 경리, 정훈같은 병과가 아니라면 무조건 소위 임관과 동시에 소대장으로 임명한다. 또한 모든 장교과정에서는 임관할 때 기행병과로 배정받더라도 지휘통솔을 매우 중요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군은 먼저 병과를 정하고 해당 병과에 필요한 훈련만 시키는 일본 육군과는 달리 병과없이 훈련 먼저 시키고 나서 소위 임관 일보직전에 병과를 배정하는 체계를 도입하게 되었다. 덕분에 대한민국 육군은 기행병과 소위라 해도 보병소대장으로서의 임무 수행이 이론상 가능하다.

전술했듯,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국판 레슬리 맥네어 장군이라 할 수 있다.

2.4. 여담[편집]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인물인데다가 고의성과 관계없이 한국전쟁 초기의 참패를 불러왔기 때문에 정식으로 다룬 전기가 드물다. 1990년대 이후 나온 여러 서적에서는 노골적으로 흑막으로 다루어지기도 했고 육사 8기생 회고록에서 거의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다만 흑막설의 증거라는게 평양 출신이라는 것과 백선엽정일권도 북한 출신인데? 그 주변의 전속부관이 나갈때 항상 정보를 갈망하는 눈초리였다가 전부. 육사 8기 회고록에서의 묘사는 한국전쟁 당시 소모품 소위였던 8기생들의 분노라고 보면 된다.

유일하게 나온 책이 국방부에서 나온 《채병덕 장군과 6.25》인데 박경석 장군 같은 경우는 이 책을 불쏘시개로 간주하지만 의외로 개념서이다. 위에 나온 채병덕에 대한 변명과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를 제기한 이형근 장군의 전략적 실책과[12] 채병덕과의 불화도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채병덕이 이형근과 불화가 생긴 원인은 찌질하게도 채병덕이 군번 00001을 그렇게나 받고 싶어하는 상황에서 그 00001번의 군번이 이형근에게 갔기 때문이였다. 이는 이형근이 이응준의 사위였다는 점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수 있다. 실지로 미 군사고문단의 이형근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정치적 혹은 친분에 의해서 계급이 오른 사람이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고 중대하다면 중대할 수도 있는 이 원인으로 채병덕과 이형근은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었다. 물론 채병덕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짬밥 경력이나 기타 여러 사항을 봐서는 분명히 채병덕이 앞번호를 따야 하고 이형근은 5번대(...)라는 것이 정설.[13] 이형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번을 딴 것은 군사영어학교 성적 때문이라는데 사실 당시 군번을 정할 정도의 평가 시험은 없었다는게 정설이다. 나중에 한국전쟁이 터지고 서울 함락 위기가 오자 이형근에게 채병덕이 휘하 부대를 즉각 전선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는데 이형근이 "지금 전열도 못 갖췄는데 북한군 밥될 일 있소?" 하면서 거부했고 격노한 채병덕이 이형근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는 등 상황이 아주 긴박하게 돌아가기도 했다.

앞서도 언급되었듯 실제 병과는 포병 출신인데 사실상 병기병과 장교의 업무를 수행했던지라 실제로 현역 병기병과장교들 중 전사(戰史)에 관심있는 장교들은 거의 흑역사 내지는 X맨 취급하거나, 그 사람 포병이라고 발끈하면서 애써 무시한다. 역대 병기장교 중 최고직급까지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볼드모트 취급 실제로 09년도 병기병과 초군반 훈련 중 보병전술훈련 교육시간에 교관인 보병병과 대위가 앞에 병기병과 교육생 소위들을 깔아놓고 전시 적접지역에서 수하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이 인간을 교보재(...)로 사용한 전례도 있다. 그자리에 병기병과 영관급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한국전쟁을 다룬 작품에서는 중요성에 비해서는 거의 단역 수준인데, 1970년대 영화 "증언"에서는 주선태(배우 주용만의 아버지)가, 1980년대 KBS 전쟁 다큐드라마 "전쟁! 6.25"에서는 카멜리아 호텔 회장 김성원이, MBC 제1공화국에서는 청춘스타 손창호(...), 야인시대에선 남영진이 채병덕 역할을 맡았다.

여담으로 짐 하우스먼(미 육군 군사고문관, 당시 대위. 전후 회고록을 출판했다)이 아니었으면 권총자살했을 수도 있었다. 인민군에 의한 함락 직전 서울에서 있었던 마지막 회의 이후 하우스먼 대위가 채병덕 장군을 두고 나왔는데 지프를 타고 이동하던 중 채병덕이 권총을 자기 앞에 두고 노려보고 있던 것이 생각나서 경악하여 다시 돌아와 보니 아직까지 그 자세 그대로 권총만 노려보고 있기에 데리고 나왔다 한다.

일단 일본군 출신이라 그런지 근무중에 더워서 팬티바람도 아니고 훈도시 하나 입고 있다가 미군 고문관이 보고 신사가 할 짓이 아니라며 경악하게 만든 적이 있다한다.

[1] 당시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조선인 입교자는 채병덕과 이종찬 둘 뿐이었다고 하는데 이 해만 그런게 아니라 거의 조선인 생도는 매년 1~2명 정도였다. 사실 왕공족이 아닌 조선인은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2] 지금으로 치면 합참의장 격.[3] 1946년 2월 미소공동위원회 협의에 따라 1949년 3월까지 남북교역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남측에서는 통제기구도 없이 의약품, 전기제품을 비롯한 군수물자가 북으로 보내졌으며, 북측에서는 교역통제기구를 만들어 명태, 오징어 등 식료품만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1949년 1월 육군 제1사단장에 취임한 육군준장 김석원 장군은 이에 분개하여 남북 교역장에서의 교역을 중단시킨다. 그러던 4월 중순 어느 날 김석원 장군은 이북에서 토성 쪽으로 넘어오는 명태가 실린 트럭 20여 대를 압류한다. 이를 보고받은 채병덕 총참모장은 압류물자를 화주에게 돌려주라는 명령을 수차례에 걸쳐 하달하나, 김석원 장군은 이에 불복종하였다. 오히려 명태를 팔아 음료수, 과일, 사탕장병들의 부식을 구매해 배급했는데, 이는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남북교역을 잘 단속하라는 분부도 받은 데다가, 일본 육사 한참 후배인 49기 출신 채병덕이 탐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두 사람의 싸움은 경무대로 옮겨진다. 그러나 채병덕 총참모장 역시 군 작전상 첩보 수집활동을 명목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부 교역 수행의 허가를 받은 상태였으므로, 이 대통령은 김석원 장군과 채병덕 참모장을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다.[4] 100만 명이란 말도 있다.[5] 해당 연대는 옹진반도에 주둔중이었는데, 38선이 육로를 막아버린 탓에 뱃길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었다.[6] 제대로 된 상황도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다.[7] 당시 육군은 9회에 걸쳐 일본군/독립군 출신들을 잠깐씩 교육 받고 임관시켰다. 그러나 미육군사관학교처럼 젊은 인재들은 4년간 교육시켜서 장교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여 시범삼아 1년 과정으로 교육 중이었고(육사 10기) 4년제로 모집한 333명의 젊은이들이 입교 25일째 교육중이었다. 채병덕을 이들 육사 10기 생도와 입교 25일째인 생도들을 고기방패로 투입시킨 것이다. 그나마 육사 10기는 지금 기준으로는 1년 단기 교육 받은 꼬꼬마이지만 당시에는 지금까지 군사영어학교 혹은 육사 1~9기와는 비교도 안되게 오래 교육받은 자원들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있어 사기도 왕성하고 특히 조교들은 육군내 최강의 인재들이었다. 특히 북한군을 상대로한 교전에서 조교들은 신들린 박격포 사격으로 적을 격퇴하였다. 반면 입교 25일째인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국내 최고의 똑똑한 학생들인 동시에 완벽한 고기방패였다. 이들은 육사 기수도 부여 못받고 전쟁터에서 소모되었다. 당연히 전쟁 후반에 모집된 전두환, 노태우가 속한 육사 11기와는 아무 관련 없다. 아니, 전두환 등은 이들 25일 교육받은 생도들을 선배 취급 안한 것은 물론 존재 자체를 부인하였다.하극상[8] 부연설명을 하자면, 25일 교육받은 생도 2기의 경우 333명 중 채병덕이 명령한 첫 전투-포천 전투에서 86명이 전사하였으며 12명이 실종되었다. 포천 전투와 모교인 태릉 전투 그리고 한강방어에 투입되면서 거의 절반인 43%가 전사하였고, 게다가 육사가 휴교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기수인정도 받질 못했다. 그해 10월 23일에 부산에 도착한 생도들을 육군종합학교에 편입시켜 임관한 것이다. 즉 지금상황에 비유하면 전쟁이 나서 육사 생도를 학사사관, 학군사관 등과 같이 섞어서 임관시킨 것이다. 그 뒤에 밴 플리트 장군의 도움으로 재개교 한 후인 1951년 10월에 입교한 11기의 경우 후방으로 내려가 1955년에 임관할 때 까지 피해가 없었다. 문제는 11기가 임관할때 되자 이들 생도 2기는 이미 중위 이상으로 진급한 뒤라 생도로 돌아갈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10기의 뒤에 10-2기로 붙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휴전 후 40년 가까이 묻혔다. 다행히도 1996년에 전원 육사 졸업생으로 인정받고 생도 2기라는 명예 기수를 부여받았다. 또한 졸업 명부에 올라 명예회복(?)하였으며 2010년에는 전원 육사인상을 받는다. 현재 333명 중 생존인은 약 100명이고 현재 시인으로 활동하는 박경석 예비역 준장원창희 예비역 준장이 있다.[9] 당시 에피소드 하나를 말하자면 육사 10기생중 한명이 군기를 잡는다고 후퇴하던 25일째 교육중인 생도 한명을 즉결처형하였다(...). 즉결처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마구 써 댄 대표적인 예로 당시 국군이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10] 심지어 구 일본군의 경우에도 본토가 본격적으로 위협을 받기 시작한 1944년 말 이후, 군사훈련을 받은 생도들을 예비대대로 편성하여 전장에 투입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국가가 망하더라도 국가의 미래를 해칠 수 없다"는 이유로 기각당한 적 있다. 물론 그 일본군은 카미카제 따윌 정식 전술로 채택한 만큼 국군보다 나을 건 없다..[11] 하지만 경무대(청와대)의 일부 기밀문서들은 적에게 노획당했다. 또한 다수의 국회의원이나 김규식 같은 고위급 인사들이 납북당했다.[12] 개전 시간은 4시, 국방부에서 후방부대 지휘관들에게 전방으로 귀환하라고 구두명령을 내린건 8시, 이형근의 주장에 따르면 소식을 듣고 올라간건 오후 2시이다. 재밌는건 이형근의 군사 고문관은 2시 이전에 명령을 들었다는 것으로 고의 혹은 실수로 늦게 올라간 것.[13] 채병덕은 일본육사 49기 출신 소좌, 이형근은 일본육사 56기 출신의 대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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